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15
#1714.
응전하다 (4)
왕옌홍이 눈을 부릅떴다.
‘정말 미친놈인가?’
물론 무인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보다 고통에 익숙하다. 무학이란 기본적으로 육체를 한계에 몰아넣어 단련하는 과정의 반복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고도로 훈련을 받은 군인이라고 해도 팔이 잘려 나가는 순간에 쇼크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육체의 한 덩어리가 잘려 나간다는 건 생각 이상의 충격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런데…….
팔이 잘려 나가고 복부에 도가 틀어박힌 상황에서 반격을 한다?
이건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 이성휘에게 그만한 정신력을 발휘해야 할 동력이 있는가?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인간은 자신의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 이성휘에게 그만한 의지력이 존재했던가.
“웃기지도 않는군.”
왕옌홍이 이 어이없는 상황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스로의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서 나라와 동료마저 팔아넘기려 한, 저 박쥐 같은 놈이 이제 와 대단한 투사라도 된 것처럼 굴어 대다니.
그야말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이성휘는 절뚝거리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잘린 어깨와 꿰뚫린 배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지를 적시며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지금까지 흘린 피만으로도 평범한 이는 죽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싸운다라…….
‘비합리적이군.’
만약 왕옌홍이 같은 상황이었다면, 저항보다는 도주를 택했을 것이다. 어차피 저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달아나 몸을 회복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지 않은가.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왕옌홍이 바닥에 피를 내뱉었다. 진득하게 배어난 피가 바닥을 적셨다.
“머저리 같은 놈이…….”
이성휘는 왕옌홍의 반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미소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고통에 찌들어 버린 얼굴은 그가 원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마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찡그림 정도겠지.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며 감각이 둔해진다.
다행스러운 점은 어깨와 복부에서 느껴지던 끔찍한 고통마저 둔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쿨럭…….”
목에서 솟구친 피가 육체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입 밖으로 흘러나간다.
‘죽겠는데.’
농담이 아니다.
강진호와 적대하면서 죽을 위가 같은 건 몇 번이고 겪었지만, 지금처럼 죽음이 확실하게 목 뒤에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점점 떨어져 가는 육체의 기능이 조금씩 이성휘를 몰아붙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여기서 더 싸우는 건 무리다. 다리는 다치지 않았으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면 최소한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팔 하나가 잘려 나간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여기서 살아나는 대가로 팔 하나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그런데…….
이성휘가 히죽 웃었다.
“……이상하게 도망가고 싶지가 않단 말이야.”
머리에 피가 들지 않아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건가?
모르지.
어차피 이성적인 판단 같은 건 이곳에 난입하면서부터 날아가 버렸으니까. 머리에 뇌가 박혀 있는 인간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이성휘가 하나 남은 주먹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단전은 꿰뚫리지 않았는지, 아직 내력은 돌고 있었다.
“이, 이성휘!”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성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성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착각하지 마.’
값싼 미련이 남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을 구하고 죽는다는, 그럴싸한 마무리로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고픈 생각도 없다.
속죄?
웃기는 소리.
속죄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하는 거지.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죽는 세상이다. 다른 길을 걷기에 적대했을 뿐, 그가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웃기고 있네.’
스스로 저지른 일을 후회할 거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후회한다고 해도 이딴 짓거리로 저지른 짓을 면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럼에도 왜 이곳에 서 있는가.
‘모르지.’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버렸는데, 이제 와 논리를 따져서 뭣 하겠는가.
그저…….
우우우우우웅.
이성휘의 주먹에 시커먼 마기가 몰려든다.
“……자살이라고?”
이성휘가 피에 젖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죽을 것처럼 말하는군. 너희 따위가 나를……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난 이중걸의 제자다.”
이성휘가 이를 으득, 갈았다.
“……지금은 꼴같잖아져 버린 총회라 해도, 총회는 사부와 내가 모든 걸 바친 곳이야. 너……희 따위가 무너뜨리는 꼴을 볼 수는 없다고, 이 짱깨 새끼야.”
왕옌홍의 눈빛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정말 정신이 나가 버린 모양이군.”
왕옌홍이 도를 늘어뜨린 채 이성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하나 남은 그의 주먹에 시커먼 마기가 몰려들고 있지만, 왕옌홍은 그걸 전혀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왕옌홍이 도의 옆면으로 이성휘를 후려쳤다.
퍼어어어억!
이성휘도 나름 어찌 막아보려 한 모양이지만, 그의 육체는 생각이상으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턱이 으스러진 이성휘가 축 늘어진 시체처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이현수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려들려 하자, 이현주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놔봐! 지금…….”
쫘아아아아악!
이현주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현수의 볼을 후려쳤다.
입술이 터지도록 얻어맞은 이현수가 당황한 얼굴로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머리 식혀요.”
“…….”
“지금 저 사람이 누구 때문에 앞을 막아섰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너…….”
“웃기지 마. 저 사람, 그럴 사람 아니야.”
이현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핏발이 선 눈으로 이현수를 노려보았다.
“사람 우습게 보지 마, 영남회 출신. 총회의 적자는 고작 이 정도로 물러서지 않아.”
“큭…… 큭큭큭.”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억눌린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축 늘어져 있던 이성휘가 몸을 들썩였다. 그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렇지. 그게 맞지.”
이성휘가 피에 젖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얻어맞은 턱과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부어올라 뭐라 말할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비틀거리는 다리.
덜덜 떨리는 상체.
여전히 출혈이 잡히지 않은 상처.
지금 당장 목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다.
하지만 부어오른 눈두덩이 사이로 보이는 이성휘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겨우 이거냐?”
이성휘가 피식 웃으며 왕옌홍을 바라봤다.
그러자 왕옌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싸해. 마치 영화 같군. 문제는 감독이 삼류라는 것과 결말이 너무 빤하다는 거야. 한국은 영화 강국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너무 올드하군.”
왕옌홍이 도를 한 번 떨쳐 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런 삼류 영화를 지켜보지 못하는 성미라서 말이야. 조금 더 리얼할 수 있게 해주지.”
왕옌홍의 도에 시뻘건 도기가 어렸다.
그러고는 뭉친 도기가 순식간에 발출되어 이성휘에게 날아간다.
이성휘가 이를 악물고 주먹을 뻗었다.
쿠우우웅!
마기에 둘러싸인 주먹이 도기를 후려친다. 하지만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는지, 그 여력이 하나 남은 이성휘의 주먹을 파고들었다.
서걱.
손목이 잘려 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성휘는 떨어진 손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왕옌홍을 향해 걸어갔다.
“그거 알아?”
“…….”
“너희…… 창왕계인지 뭔지 하는 것……들, 처음부터 재수 없었어.”
왕옌홍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이 죽음에 조금의 가치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확실히 넌 병신이야.”
“……뭐?”
이성휘가 실실 웃었다.
“죽음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사람은 위인이지. 너는 내가 위인으로 보이나?”
“…….”
부어 터진 눈 사이로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한 눈빛이 흘러나온다.
“나는 쓰레기야. 쓰레기는 쓰레기답게 죽는 거지. 그게 뭐가 이상하냐, 이 개새끼야!”
이성휘가 힘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왕옌홍에게 달려들었다.
잘려 나간 팔, 그리고 잘려 버린 손목.
권을 쓰는 이성휘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왕옌홍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흐아아아아아아악!”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절규가 왕옌홍의 귀를 파고들었다. 천하의 왕옌홍도 이 순간만큼은 등골을 누비는 섬뜩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미친놈.’
잘려 나간 손목 어림에서 시커먼 마기가 줄줄이 흘러나온다. 제대로 형상도 잡지 못하는 저런 권력으로는 왕옌홍의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못할 것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이성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다.
“이 병신 새끼가!”
왕옌홍이 발작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촤아아악!
이성휘의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가 길게 갈라진다.
벌어진 상처로 잘린 내장 조각이 흘러나왔지만, 이성휘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
도가 다시 휘둘러진다.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는 참격.
이성휘는 피하는 대신 몸을 뒤틀었다. 날아든 도기가 이성휘의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육체를 꿰뚫고 나간다.
그럼에도 이성휘는 멈추지 않았다.
‘대체?’
왕옌홍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어렸다.
“흐아아아앗!”
그 기세에 눌린 왕옌홍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을 내딛고 말았다.
“비, 빌어먹을!”
스스로의 추태를 알아챈 왕옌홍이 도를 휘둘러 달려드는 이성휘의 다리 어림을 베어냈다.
서걱!
쿵!
다리가 잘려 나가고도 달릴 수는 없었는지, 과격한 기세로 달려들던 이성휘의 몸이 바닥으로 구르듯 엎어졌다.
“허억…….”
왕옌홍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서고, 뒤통수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내가 이런 약해 빠진 놈에게.’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수하들도 질린 기색을 어쩌지 못한 채 꿈틀대는 이성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좋지 않아.’
왕옌홍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반도에서 네놈이 가장 미친놈인 모양이군. 솔직히 감탄했다.”
왕옌홍이 도를 움켜잡고는 이성휘를 향해 다가갔다. 적어도 그가 직접 숨통을 끊어주는 게 예의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지금까지 상황을 기다리던 이현주와 이현수가 달려 나와서 이성휘의 앞을 막아섰다.
“……도망치지 않는다고?”
이현수가 이를 드러냈다.
“지금부터는 싸우는 게 이득이거든.”
왕옌홍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같이 제정신인 놈이 없군. 반도에 미친놈은 여기에 다 모인 모양이지?”
“큭…… 큭큭, 큭.”
그때, 바닥에서 경련하던 이성휘가 끊어질 듯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우습지?”
왕옌홍의 얼굴이 굳었다.
“이제 단 일격이면 네가 그리 지키려는 이들은 물론, 네놈의 목까지 날아갈 텐데, 뭐가 그리 우습지? 개죽음을 당한 게 그리 즐겁나?”
“흐…… 너무 적……절해서 말이야.”
“……무슨 소리냐?”
“네가…… 네가 말했잖아.”
이성휘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기에…… 여기에 다 모였다고, 미친놈들이.”
왕옌홍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피를 너무 흘려서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그러니…… 반갑게 맞아주라고.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제일 미친놈이 왔으니까.”
“…….”
그 순간.
“어떻게 죽고 싶지?”
왕옌홍의 등 뒤에서 마치 지옥으로부터 흘러나온 것 같은, 거칠고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왕옌홍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어둠.
어둠이 내린 숲 사이로 어둠보다 더욱 짙은 암흑을 둘러싼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마, 마…… 마왕…….’
왕옌홍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짙디짙은 어둠 속에서 두 줄기 핏빛 안광이 섬뜩하게 그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말해봐, 어떻게 죽고 싶은지 말이야.”
비릿한 혈향이 왕옌홍의 코끝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