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18
#1717.
씁쓸하다 (2)
“……엿 될 뻔했네요.”
방진훈이 사색이 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엿 될 뻔했지.’
만약 강진호가 이 상황을 알아채고 재빨리 제주도로 향하지 않았더라면, 이현수는 지금쯤 시체가 되어 총회로 돌아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체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이현수가 없는 총회라니.’
어느 순간부터 총회를 이현수가 운영하는 게 너무 당연해져서인지, 이현수가 없는 총회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단 며칠 동안 이현수가 빠진 것만으로도 총회가 엎어질 판이었는데, 이현수가 죽어버리면 대체 그 뒷감당은 누가 한단 말인가.
“확실히 창왕은 미친놈이지만…….”
방진훈이 뒷말을 삼켰다.
상대의 약점을 찔러 들어오는 실력 하나만큼은 정말 비길 데가 없었다.
“근본적으로…….”
바토르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건 우리 잘못이다.”
방진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저희요?”
“그래.”
바토르가 혀를 찼다.
“주인이 이런 일까지 일일이 신경을 쓸 수는 없지. 이런 일은 우리 이사진들급에서 알아서 대처했어야 하는 일이다.”
“아니, 원래 이건 이현…….”
방진훈이 입을 닫았다.
호위의 배치야 이현수가 알아서 하는 일이지만, 이현수가 아무리 뻔뻔한 놈이라 해도 자신의 주위에 호위를 구름같이 깔아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래야 한다는 자각도 없었겠지.’
총회에서 이현수를 가장 무시하는 사람이 누굴까?
방진훈, 아니면 위긴스?
천만에.
이현수를 가장 무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현수다.
‘웃기는 일이지, 그거.’
반쪽짜리라고 평생 멸시의 시선을 받다 보니 본인도 본인을 그렇게 평가하게 된 모양이다.
“이현수 스스로 호위를 보강할 수 없다면, 그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우리가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호위를 붙여줬어야 해. 이건 명백하게 우리의 실책이다.”
방진훈이 입맛을 다셨다.
“거, 본인 몸은 본인이…….”
“쯔읏.”
괜스레 어색해 한마디를 붙이자마자 장민이 혀를 크게 찼다.
“사내놈이 잘못한 게 있으면 당당히 인정하고 반성하면 그만이지!”
“……죄송합니다.”
“쯧쯧.”
한마디가 더 길고 불평이 많은 게 방진훈의 문제점이었다.
장민은 그런 방진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연신 혀를 차 제꼈다.
“저놈의 말이 맞다. 이건 바쁘다는 핑계로 제 일을 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다. 만약 이 일로 이현수가 죽기라도 했으면, 마존께서 얼마나 상심하셨겠느냐!”
“끄응, 그렇죠.”
상상하기도 싫다.
이현수의 죽음도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그 일이 벌어졌을 때 강진호의 눈이 얼마나 뒤집어졌을지를 생각하면…… 이성휘의 무덤을 찾아가 대가리를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 반년 정도는 모든 총회인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겠네요.”
“그거면 다행이지. 마존이시라면 중국으로 바로 쳐들어가신다.”
“……숨 참는 게 낫겠네.”
방진훈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여하튼 이번 일은 정말 천운이었다.
정부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조금 늦었거나, 강진호가 조금만 시간을 지체했거나, 이성휘가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무덤에 묻히는 건 이성휘가 아니라 이현수였을 테니까.
‘모르지.’
강진호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극한의 상황까지 가버린다면 강진호가 그 책임을 물어 몇몇 정도의 목은 제 손으로 날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강진호의 자기 사람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니까.
“여하튼…….”
위긴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 일로 얻은 교훈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현수에 대한 호위를 당장 보강하고, 동선도 어느 정도는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총회 안에 집을 지어 살게 하는 건 어떻고?”
“기숙사가 있는데요?”
“거기도 불안하다.”
사람은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고 했던가.
이사들 역시 이현수를 중요 전력이라 말하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나름 무인이다 보니 무력이 극도로 약한 이현수에 대한 은근한 폄하의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사들도 정신이 바짝 들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이현수가 사라지면 그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총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서 이현수를 지켜야 합니다.”
“동감.”
방진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가 또 불만인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방진훈이 머리를 긁었다.
“우리는 이현수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딱히 지키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저 창왕 새끼는 그 틈을 파고들어 이현수를 거의 죽일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밖에서 볼 때 더 잘 볼 수 있다는 말은 그냥 변명이죠. 그냥 내 눈이 개눈깔이었구나 싶어서.”
“크흠.”
방진훈의 솔직한 대답에 이사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래서 그 이현수는 어디에 있나?”
“이성휘 쪽 처리를 하고 있을 겁니다. 무덤에 있을걸요?”
“그 위험한 데에!”
“회주님이 같이 가셨습니다.”
“아, 그럼 뭐…….”
대답을 한 방진훈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휘, 이성휘…….’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딱히 감흥이 있을 만한 이름이 아니다. 대부분은 그저 이름만 들어봤을 테고, 기껏해야 과거 일본과의 선상격전에서 얼핏 본 것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방진훈은 다르다.
그는 이중걸과 적대하면서 그 이성휘와도 몇 번이고 충돌했다.
그때의 이성휘는 더없이 빛나던 사람이었다.
사부인 이중걸과는 다르게 구김이 없고, 그 재능 역시 반짝였다. 그렇기에 그 이중걸이 자신의 제자로 삼아 총회를 물려주려 하지 않았겠는가.
“……멍청한 놈.”
조금만 선택을 잘했더라면 지금 그가 이 자리에 껴 있을지도 모를 텐데.
방진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진훈도, 그리고 강진호의 손에 죽은 이중걸마저도 이런 결과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씁쓸함을 억누르며 방진훈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지금 젊은 놈들이 총회를 이끌게 될 겁니다.”
“으음…….”
“회주님도 저 자리에 크게 미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고, 이현수도 놀 상대가 없어지면 애나 키우겠죠. 창왕을 쓰러뜨리고 흑왕마저 무찌른다면, 결국 저 둘은 일선에서 물러날 겁니다.”
“웃기는 소리.”
장민이 눈을 찌푸렸다.
“본디 교주는, 그리고 제왕은 일선에 나서는 법이 아니다. 일은 아랫것들이 하는 법이지. 너희는 저분이 저리 나서야만 하는 상황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빌어먹을, 원나라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자빠졌네.”
“……너는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으응?”
바토르가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둘의 대화를 들은 방진훈이 고개를 내젓고는 말을 이어갔다.
“여하튼 그러니 앞으로도 제자들의 육성에 신경을 써주십시오. 강함만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이성휘처럼 되어버리기 마련입니다.”
“…….”
“올바르게는 아니더라도,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방진훈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조금 다른 이야기겠지만, 사실 지금 이사들이 거둬 키우고 있는 제자들은 원래는 방진훈의 휘하에서 무학을 배워야 했던 이들이다.
그러니 방진훈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좋은 말이지만 너무 멀리 갔어. 우선은 저 창왕을 어떻게 해야겠지.”
“예. 그렇지요.”
“그리고 아마도…….”
위긴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로드께서 결심을 굳히신 듯합니다. 아마 곧 뭔가가 다시 시작될 겁니다.”
“크흠.”
“음.”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물론 이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창왕에게 머리를 조아릴 생각이 없다면, 이따위로 얻어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길 수는 없으니까.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상대에게 한 방을 먹여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그들이 창왕을 후려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정비가 필요한 쪽은 오히려 총회, 아니, 정확하게는 홍왕계 쪽이었으니까.
“방법은?”
“……그건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요. 로드께서 고민하고 계실 겁니다.”
“이현수도 같이?”
“아마도.”
바토르가 피식피식 웃었다.
“주인이 얼마나 열이 받았느냐에 따라 어떻게 들이받는지가 결정 나겠군. 창왕도 똑똑한 척하지만 그렇게까지 똑똑하지는 못하단 말이야. 나라면 주인은 안 건드린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아닙니까?”
“그렇다고 빨리 죽을 필요는 없잖아?”
“하기야 뭐, 그도 맞는 말이지요.”
방진훈이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거, 청승맞게.”
방진훈이 이죽거리듯 말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완전히 갖춰진 무덤을 검은 옷을 입은 세 사람이 바라보고 있다.
강진호, 이현수, 그리고 이현주였다.
“거참, 매정하군.”
이현수가 씁쓸하게 말을 내뱉었다.
“잠깐 들렀다 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말이야. 연락을 안 준 것도 아니고.”
이중걸 일파는 완전히 소탕을 당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때 숙청당한 이들은 장로급의 윗사람이고, 당시 이중걸의 일파로서 이성휘와 친하게 지내던 젊은 무인들은 여전히 총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며칠간 빈소에 들른 이들도 손에 꼽을 정도다.
기껏해야 방진훈이 제 제자들을 데리고 들른 정도일까. 그 외에 드문드문 찾아온 이들도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빈소를 떠났다.
“내가 오지 않았어야 했나?”
“아니요.”
강진호의 말에 이현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회주님이 안 오셨으면 그 사람들도 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나마 회주님이 계시니까 눈치를 덜 보고 들른 거죠.”
“……그런가?”
“그냥 업보예요. 등신이 저지른 업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현주의 눈빛은 여전히 씁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인 이현수가 연기를 들이마시며 이성휘의 무덤을 바라봤다.
“제 사부 옆에 묻혔으니…… 아쉬울 건 없겠지.”
“그럴 거예요. 생전에 워낙 사이가 좋았으니까.”
따로 부모라고 할 사람도 없고, 가족이라 말할 사람도 없다. 이성휘에게는 이중걸과 이현주가 친인이자 가족이었다.
“이걸로 됐어요.”
“…….”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거든요. 무인은 죽을 자리를 잘 찾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후회는 없을 거예요. 그보다 어울리는 자리가 없었을 테니까.”
이현주가 가만히 이성휘의 무덤을 바라보다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갈게요.”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멀어져 갔다.
아마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던 모양이다.
그런 마음을 짐작한 두 사람은 굳이 이현주를 탓하지 않았다.
“간다.”
“예.”
강진호마저 몸을 돌리자 이현수가 한 걸음을 뗐다.
“…….”
그러고는 못내 뭐가 남는지 다시 고개를 돌린 이현수가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무덤에 다가갔다.
찰칵.
새 담배에 불을 붙인 이현수가 담뱃갑을 무덤 앞에 놓고, 그 위에 불붙인 담배를 올린다.
쓰고 있던 우산으로 담배 위로 쏟아지는 비를 가린 이현수가 비를 맞으며 무덤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이현수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간다.
그들의 뒤로 비에 젖은 두 개의 무덤만이 조용히 산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