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19
#1718.
씁쓸하다 (3)
“뭔 일 있어?”
“딱히?”
“흐음.”
한진성이 보육원 거실에 앉아 있는 강진호를 보며 묘한 눈빛을 띠었다.
“편히 쉬다 가시게, 나그네여.”
“너 게임하냐?”
“아, 아냐. 재수생이 무슨 게임이야. 절대 아냐.”
강진호의 눈이 가늘어지자 한진성이 찔끔하여 목을 움츠렸다.
“……조금. 진짜 틈날 때마다 조금씩 하고 있는데.”
“재수생이?”
“……재수생은 사람 아닌가?”
강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미혜가 쟁반에 과일을 들고 나오며 혀를 찼다.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오빠. 그럴 수도 있지.”
“오?”
한진성이 반색하는 눈으로 조미혜를 바라본다. 저게 웬일로 자신의 편을 다 들어준단 말인가.
“어차피 망할 건데, 게임 좀 더 한다고 별 차이 있겠어?”
“…….”
한진성의 눈이 썩은 생선처럼 죽어갔다.
“망하다니!”
“어머? 그럼 설마 성공할 줄 알았던 거야? 패기롭네.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패기로워.”
강진호가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자, 오빠.”
“응?”
“과일 좀 먹어.”
“괜찮은데.”
“후원 들어온 거야. 좀 먹어.”
“응.”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내밀어 접시를 바라보았다. 싱싱해 보이는 사과가 예쁘게 깎여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런 건 진성이 시키지.”
“……저 인간은 손에 들어간 모든 것을 파괴해.”
“…….”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뭐라도 써먹을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참 나도 걱정이다.”
조미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진성이 그 말을 듣고 씩씩댔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반발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응?”
“……아니, 아니야.”
보육원의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라서인지, 타인의 변화에 꽤 민감한 편이었다. 그런 조미혜이다 보니 강진호가 속상한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면 보육원을 찾는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겠지.’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될 때도 있는 법이니까.
“오빠.”
“응?”
“너무 무리하지 마.”
“…….”
“이거 먹고.”
“그래.”
강진호가 선을 뻗어 사과 한쪽을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벽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우울해 보이나?’
오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딱히 우울하거나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이성휘의 죽음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리 큰 관계가 없는 인간의 죽음 때문에 감상에 젖을 만큼 강진호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되레 이현주나 이현수 쪽이 문제겠지.’
이현수는 여전히 이성휘가 왜 자신을 구하고 죽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니까.
어떤 사람이든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양면성이 존재하고, 어떤 인간이든 살아온 궤적과 다른 선택을 하는 순간은 반드시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을 짓밟아온 이가 뜬금없이 거액을 기부하기도 하고, 평생을 선하게 살아온 이가 어느 순간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 모든 게 사람이다.
그렇기에 강진호는 굳이 이성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감상에 젖는 건 그와는 맞지 않는 일이니까.
되레 강진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창왕에 대한 증오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타인을 증오하고 죽여온 강진호지만, 이번 일을 통해 창왕에 대해 가지게 된 악감정은 지금까지 그의 삶에 있던 어떤 증오와도 그 궤를 달리했다.
심지어 그를 죽인 청마나 정파의 고수들에게도 이런 증오심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이성적이 돼야 해.’
하지만 창왕은 증오로 상대할 수는 없는 존재.
그가 창왕에 대한 적대심을 품고 돌진하는 순간, 창왕은 되레 그 상황을 이용해 강진호를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 사실을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보육원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곳 중 가장 증오와는 거리가 먼 곳이 이곳이니까.
“커피 줄까?”
“응?”
한진성이 뚱하게 물었다.
“아니, 형, 커피 좋아하잖아.”
“…….”
강진호가 한진성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닌 척하지만 다들 강진호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조미혜는 그나마 능숙하게 배려를 해주지만, 한진성은 쭈뼛대는 모양새가 빤히 보였다.
“줘?”
“그래.”
강진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진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강진호가 그런 한진성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자 조미혜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돼서 저러는 거야. 진성이 오빠도 오빠 엄청 좋아하니까.”
“…….”
아직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어색하다. 아니, 이건 굳이 강진호가 아니더라도 비슷하겠지.
“괜히 내가 걱정 끼치는 것 같네.”
“별말을 다 해.”
조미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쉬다 가. 오빠 있으면 분위기 밝아져서 다들 좋아하니까.”
“……고맙다.”
“아, 그리고 오빠.”
“응?”
“마당에 있는 그네가 고장 났는데, 애들이 아쉬워하더라. 수리 오려면 좀 걸린다는데.”
“…….”
“좀 걸린…….”
“내가 고쳐 놓을게.”
“어머, 그럴래?”
활짝 웃는 조미혜를 보며 강진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 * *
“그래?”
이현수가 전화를 받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딱히 평소와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평소대로 업무를 처리하고 계십니다. 표정이나 행동도 다를 게 없구요.]“……일단 알았어. 혹시나 이상한 점 보이면 나한테 전화해 줘.”
[예, 실장님. 그런데…… 이게 뭐랄까, 부하 직원 주제에 상사를 감시하는 것 같아서 조금 껄끄럽긴 합니다. 소속도 다른데 이게 참…….]“보너스 준비해 줄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끊어라…….”
전화를 끊은 이현수가 휴대폰을 책상 위로 가볍게 던지고는 드러눕듯 의자에 기댔다.
‘무리하네.’
찰칵.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이 붙었다. 최근 들어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잦아진 것 같지만, 의식적으로 줄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스트레스가 늘어났다는 뜻이겠지.
하루 정도는 더 쉬라고 충고해 줬지만, 이현주는 이현수의 제안을 거부하고는 그대로 출근을 했다.
‘가족이 죽은 거나 그리 다를 게 없을 텐데.’
이현주에게는 가족이 없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어릴 때 죽어버렸고, 이중걸은 그에게 있어 엄한 스승이자 자상한 할아버지지만, 그 역할을 모두 대신해 주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이현주에게 있어 이성휘는 가족 같은 오빠이자 친인이다.
‘가족이라…….’
그렇기에 쉽사리 위로할 수가 없다.
이현수에게 가족이라는 건 멀기만 한 개념이니까. 가족을 잃은 이들이 어떤 절망을 느끼는지, 지금 이현주가 어떤 심정인지 그저 어설프게 짐작만 할 뿐이었다.
“후…….”
어차피 이 일이 없었다고 해도 이현주와 이성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크게 갈라져 버린 길은 어떤 수를 써도 다시 이어지지 않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개 같은 기분이군.”
이현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일했다.
창왕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노릴 수 있다는 걸 감안했어야 한다. 총회의 모두가 그 사실을 놓친다고 해도 이현수만큼은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상대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에 정신이 팔려 상대가 나를 공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못했다.
이성휘의 난입으로 목숨을 부지해 돌아왔지만, 이번 승부 역시 이현수가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 사실이 이현수를 굴욕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후…….”
담배를 거칠게 빨아들인 이현수가 담배를 문 채 의자에서 일어난다.
‘결국은 정보량의 차이야.’
머리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창왕은 어떻게 해야 총회를 공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총회에서 누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고, 어떤 부분의 나사를 풀어내면 총회라는 거대한 기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지 이해하고 있다.
반면 이현수는?
창왕과 창왕계라는 대략적인 개념만을 머리에 넣고 있을 뿐, 저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이러니 싸울 수 있을 리가 있나.
이현수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이현수가 입에 담배를 문 채 복도를 걸었다. 지나가던 이들이 그런 이현수의 모습을 보고는 복도 끝으로 달라붙어 크게 목례했다.
“안녕하십니까!”
“…….”
이현수가 대답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이 이현수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뭔 표정이 저렇게 무시무시하냐?”
“그러게.”
최근 들어 본 적 없는 이현수의 표정을 목격한 이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사람들한테 조심하라고 말해둬야겠다.”
“그래. 괜히 문제 안 생기게.”
그들의 시선이 이현수가 내려간 계단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서 오십시오!”
“들어온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현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예!”
경비를 서던 이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육중한 철문이 뒤틀리듯 열리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낸다.
“모시겠습니다.”
“됐어.”
“……회주님께서 이 실장님이 오시면 호위해야 한다고.”
“그럼 호위했다고 해.”
“하지만…….”
이현수가 슬쩍 고개를 돌려 경비와 시선을 마주치자, 말끝을 흐리던 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십시오.”
“조금 있다 보고해. 쉬시는 것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예!”
이현수가 어두운 복도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저벅.
저벅.
이 복도를 걸을 때마다 이현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뒤틀린 느낌이군.’
현대에는 잘 볼 수 없는 양식이다. 하기야 이 건물이 지어진 건 수십 년 전이니까 당연한 거겠지.
늘어뜨려진 전선 끝에 매달린 백열전구들이 이현수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춤을 추듯 흔들렸다.
한 층.
또 한 층.
지하로 내려간 이현수가 텁텁해지기 시작한 공기를 맡으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경계 중 이상 무!”
“경계 중 이상 무!”
가장 아래층,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 앞을 지키던 두 사람이 이현수를 발견하고는 크게 경례를 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좁은 복도를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놈은?”
“똑같습니다.”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예!”
경비들이 열쇠를 들어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보며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저게 뭔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삼중으로 된 철문.
과거의 총회였다면 저 문은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웬만한 무인은 저 문을 뚫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이 다루는 죄수들에게 저 철문이 의미가 있을까?
‘건물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군.’
무엇이든 꾸준히 바꾸고 변화하지 않으면 결국은 낡아버리기 마련이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세 개의 철문이 모조리 열리고 나서야 이현수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안으로 들어선 이현수가 양팔을 벌리며 입을 열었다.
“식사는 마음에 드신지 모르겠군, 왕옌홍.”
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의 눈에서 뿜어지는, 칼날 같은 눈빛을 받은 이현수가 되레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이현수가 이를 드러냈다.
“지금 내 기분이면 정말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한쪽에 있는 의자를 끌고 온 이현수가 의자에 앉아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