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26
#1725.
선공하다 (5)
“고민 있죠?”
“응?”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내려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른 것은 건너편이 아닌 옆을 바라보았다는 정도?
소파 옆자리에 앉은 최연하가 뚱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딴생각 중인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 강진호 많이 컸네. 내가 옆에 있는데 딴생각도 다 하고.”
“…….”
최연하의 이마에 핏대가 돋아난다.
그 빡친 얼굴을 본 강진호가 슬그머니 눈꼬리를 내렸다.
“안 그래도 요즘 볼 시간도 잘 없는데!”
“아, 아니, 그건…….”
억울하다.
물론 최근 강진호가 최연하를 보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건 강진호가 바빠서가 아니라 최연하가 바빠서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구박을 받으니 억울함이…….
“뭐?”
“……아닙니다.”
강진호가 상큼하게 웃었다.
억울은 얼어 죽을.
“네네. 뭐, 어디 세상 바쁜 강진호 씨가 고민이 없는 날이 있겠어요? 이번에는 또 뭔데요?”
“저…….”
강진호가 살짝 진지한 얼굴로 최연하를 바라봤다.
“뭐, 뭐…….”
최연하가 움찔했다.
“그렇게 진지한 얼굴 하지 말아요. 잘생겨 보이니까.”
“…….”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낮게 헛기침을 한 강진호가 말을 이어갔다.
“제가 고민이 있는 건 맞지만…….”
“네.”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최연하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강진호를 빤히 바라봤다.
“저는 최연하 씨와 고민 상담을 하러 오는 게 아니니까요. 그냥 둘이 있을 때는 그런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
“진호 씨.”
“네?”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 말해요.”
“……네.”
강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라는 건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듣는 것일 텐데, 이 대화는 왜 이리도 일방통행이란 말인가.
“다름이 아니라, 음…….”
“거, 전기 밥솥이신가. 뜸 오지게 들이시네.”
“…….”
강진호는 새삼 최연하의 소중함을 느꼈다.
세상에 그를 이리 대해주는 사람이 최연하 말고 또 누가 있던가.
“다른 게 아니라…… 음, 이현수가…….”
하지만 그의 입에서 이현수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최연하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야! 둘이 사귀어라! 난 괜찮으니까 가서 걔랑 살아!”
“…….”
“이것들이 각각 여자 친구를 놔두고 바람이라도 피우나?”
“……살면서 이토록 모욕적인 말을 들어본 건 처음입니다.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현수를 고층 빌딩 옥상에서 던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인간은 그래도 살아남을 것 같은데?”
“그럼 파묻을까요?”
“흐음…….”
최연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정도로 결백을 증명한다면 믿어줄 수 있지.
삽시간에 고층 빌딩에서 던져졌다가 땅에 묻힌 이현수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이현수 씨가 뭐요.”
“요즘 이현수를 보면서 조금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부담을 내려놓는다는 게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는 게 아닌가 하는…….”
“또 지지리 궁상 나셨네.”
“…….”
최연하가 강진호를 보며 세상 한심하다는 눈을 했다.
“진호 씨 뭐 매저키스트예요? 아이고, 내가 미처 그쪽 취향이신지는 몰랐네.”
“…….”
강진호가 멍한 눈으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아니, 요즘 미국에 가더니 슬럼가에서 랩 배틀이라도 뜨고 다니나? 딜이 왜 이리 높아졌지?
“이보세요, 진호 씨. 그렇게 남 일을 대신 해주고 싶으면, 놀지 말고 저 미국 갈 때 가방이라도 좀 들어주세요. 안 그래도 요즘 짐 많아서 죽을 것 같은데.”
“코디 있잖…….”
“걔들 데리고 게이트를 어떻게 타요! 요즘 은솔이 팔뚝이 아주 그냥 장사 팔뚝이야. 애가 예전에는 여리여리한 맛이 있었는데, 이제는 헬스 머신이라니까!”
은솔이가?
상상이 안 가는데?
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강진호를 보며 최연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은솔이가 그걸 들어주는 게 기본이지. 내가 그 짐을 다 들고 다니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주 그냥 건강미 넘치는 여배우 하나 탄생하겠지.”
어…….
나쁘지 않은 것 같은…….
“그러니까 내 말은.”
최연하가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사람은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는 거예요. 물론 배려해 주고 도와주는 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그 사람을 편하게 해주겠다고 그 일을 다 떠맡는 게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강진호가 말없이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왜요? 뭐 틀린 말이라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강진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참 똑 부러진다 싶어서.”
최연하가 ‘하’ 하고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네?”
그동안의 설움을 토해내겠다는 듯 최연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남들은 다 그렇게 생각해요. 진호 씨만 나를 동네 지나가는 아줌마쯤으로 보는거지.”
“아, 아니, 그런 적은…….”
“그럼 좀 이쁜 아줌마쯤으로 보겠지.”
“…….”
강진호가 입을 다물자 최연하가 눈을 부라렸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맞아?”
“아, 아니…….”
맞아도 맞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이래 봬도 잘나가는 배우에, 사업도 승승장구시키고 있는 사람이야. 지금 우리 엔터로 소속 옮기고 싶다고 연락해 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진짜요?”
“그럼?”
“아, 아니, 그 성격에 동료 배우 연락처가 그렇게 많을 리가 없을…….”
강진호가 입을 닫았다.
최연하의 눈에 독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모든 화는 입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또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지껄였단 말인가.
“뒈진다, 진짜.”
“……죄송합니다.”
최연하가 도끼눈을 떴다.
“좀 더 나를 예쁘게 보라고!”
“그, 그러고 있어요.”
“더! 제대로!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최연하가 강진호의 등짝을 후려쳤다.
“나를 앞에다 두고 딴생각이나 하고 있고! 내 팬들이 알면 진호 씨를 거꾸로 매달려고 할 거라고!”
물론 거꾸로 매달리는 건 그쪽이겠지만.
여긴 너무 과도하게 강하니까.
“어쨌든 간에.”
최연하가 묘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봤다.
“쯧.”
“…….”
혀를 차는 최연하를 보며 강진호가 움찔했다.
또 무슨 구박을…….
“이리 와봐요.”
“네?”
제가 지금 당신 바로 옆에 있는데 대체 어디로 오라는 말씀…….
“붙어봐.”
“…….”
강진호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최연하 쪽으로 살짝 옮겼다.
“제대로 바짝.”
“…….”
강진호가 최연하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그러자 최연하가 양팔을 벌렸다.
“앵겨.”
“…….”
“어서.”
“넵.”
강진호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자, 최연하가 강진호의 머리를 덥썩 끌어안았다.
“저…….”
“어허, 어디 남정네가 이럴 때 입을 열어.”
“…….”
“가만히 있어, 가만히. 누나가 다 알아서 할게.”
뭘 알아서 해요, 뭘.
최연하가 가만히 강진호의 등을 두드렸다.
“잔소리를 해 대기는 했지만, 진호 씨도 생각없이 고민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가만히 있어봐요. 내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린대요. 어차피 내가 뭔 말을 해도 고민이 풀리지 않을 거면 스트레스라도 풀어야지.”
강진호가 살짝 눈을 감았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연하가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맙…….’
“겸사겸사 나도 좀 풀고.”
“…….”
강진호가 움찔하자, 최연하가 그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꽉 조였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확 그냥!”
“…….”
강진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행복하냐고?
어……. 어, 그래. 행복하지.
그런데 내가 생각한 연애는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때요?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아직은 잘…….”
“음, 효과가 애매한 모양인데.”
강진호가 움찔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최연하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다음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다음이요?”
“네. 내가 인터넷에서 본 바로는 맨살이 닿으면 스트레스가…….”
“어디서 그런 이상한 것만 읽고 다닙니까!”
“이상한 거라니! 저명한 학자들이 연구한 거예요!”
“학자 누구요?”
“나야 모르지.”
“…….”
안 돼.
이 여자, 대책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어디 오늘 한번 맨살끼리 대화를 나눠보실?”
“……괜찮습니다.”
“나는 안 괜찮은데?”
강진호가 바둥대려 하자 최연하가 피식 웃으면서 강진호를 끌어안았다.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어봐요.”
“…….”
“괜찮으니까.”
강진호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알고 있다.
이런 장난스러운 대화도 은연중에 보이는 강진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최연하 나름의 배려라는 걸 말이다.
‘아슬아슬해 보였나 보군.’
스스로는 담담하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강진호도 사람.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는 최후의 격전을 앞에 두고 동요가 없을 수는 없다.
강철로 위장한 마음 안에서 어찌할 수 없는 불안함과 공포가 내면을 갉아먹고 있겠지.
최연하의 체온이 전해져 온다.
눈을 감은 강진호가 생각을 잊어갔다.
최연하의 손이 강진호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그의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고, 이내 규칙적으로 변해간다.
최연하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조금의 안쓰러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걱정스러움.
‘별일이네.’
잠에 든 건지, 아니면 잠시 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강진호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그만큼 몰려 있었다는 뜻이겠지.’
평소의 강진호라면 이 정도로 긴장을 풀거나 잠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 바보 같은 사람이야.’
차라리 대놓고 불만을 토하고 피곤함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오히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어느 정도는 위로를 받으니까.
오히려 강진호처럼 자신의 상황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보거나, 스스로는 괜찮다고 믿는 이들이 더 빨리 무너지는 법이다.
강진호는 그저 다른 이들보다 버텨낼 수 있는 강도가 높을 뿐.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성벽이라고 해도 계속해서 충격을 받으면 언젠가는 금이 가고 결국은 무너지는 법이다.
‘예전에는 내가 당신을 만난 게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당신이 나를 만난 것도 다행이었을지 모르겠네.
강진호의 등을 쓸어내리며 최연하가 가만히 콧노래를 불렀다.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아니, 그게 당연한 거지.’
최연하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결국 혼자 살아가지는 못하니까.
홀로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는 바보와 바보가 서로 등을 기대서는 것이 세상이다. 최연하는 자신이 강진호가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오래 쉬지는 못해도 잠시 정도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곳.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니까.
“대신…….”
최연하가 완전히 잠에 빠진 강진호의 볼을 쓰다듬었다.
“오래는 못 기다려요.”
그래. 언젠가는…….
둘이 아닌 가족을 이루고 지금과는 다른 걱정을 하면서 살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입 밖으로는 낼 수 없는 바람을 생각하며 최연하의 손이 강진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