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29
#1728.
거침없다 (3)
앞에 놓인 술잔을 잡는 고한봉의 손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제정신인가?’
그의 시선이 이현수를 쫓았다.
하지만 긴장과 당혹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그와는 다르게 이현수는 담담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흠.”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알아챈 고한봉이 낮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정치인이란 마주 앉은 이에게 감정의 요동은 보이지 않아야 하는 법 아니던가.
고한봉이 술병을 들어 이현수의 잔에 술을 따랐다.
빈 잔이 채워지자 고한봉이 가만히 술병을 내려놓았다. 살짝 떨리는 손끝은 감출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성공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셨을 텐데요.”
“그렇긴 하지만.”
고한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중국과…… 정확하게는 창왕계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충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최악의 상황으로는 저들이 병력을 이끌고 한국으로 쳐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찰나였는데…….
‘차라리 그게 백배는 낫겠군.’
침략을 받는 입장이라면 피해자 행세라도 할 수 있다. 물론 무인계의 일은 공론화할 수 없겠지만, 나름 국가 간에는 암묵적으로 그쪽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쪽에서 공격을 한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선공을 하다 패한 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 아니던가.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머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너무 크니까.
그럼에도 고한봉이 격하게 반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현수는 총회라는 거대 단체를 제 손안에 놓고 굴리는 사람이다. 그런 이가 고한봉도 생각한 부분을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고한봉은 말을 빙빙 돌리는 대신 직접적으로 묻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이 사람 앞에서 말을 돌리는 건 의미가 없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라 그렇습니다.”
“실패의 리스크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니요.”
“……예?”
너무도 간단히 돌아온 대답에 고한봉이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너무 안일하신 것 아닙니까?”
“총리님.”
이현수가 고한봉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말 기분 나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고한봉이 살짝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원래라면 이럴 때쯤 너스레를 한 번 떨어줘야 하지만, 지금 분위기에서는 도무지 농담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 안일한 건 제가 아니라 총리님이십니다.”
“……예?”
고한봉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이현수를 바라봤다.
“리스크요?”
이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을 조금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이 일은 리스크를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하든 패하는 순간 결과는 같습니다. 그런데 왜 리스크를 생각해야 합니까?”
이현수가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개념은 우리의 대응에 따라 저들이 다른 선택을 할 때나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창왕은 그런 놈이 아닙니다. 우리가 중국으로 쳐들어가 박살이 나든, 한국에서 기다리다 박살이 나든…… 저들을 막지 못하는 순간, 한국을 기다리고 있는 결과는 동일할 겁니다.”
“하, 하지만 정부가 있잖습니까. 저들이야 동일하더라도 당 차원에서의 대응은…….”
“다를 게 없습니다.”
“…….”
고한봉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끝까지 가버리면 더는 없습니다. 바닥 밑에 지하가 있다지만, 그건 지하까지 처박히도록 버틸 수 있는 이들에게나 의미가 있는 말이죠. 그전에 끝날 겁니다.”
고한봉이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총리님, 이건 전쟁입니다. 심지어 이 전쟁에는 중재자도 없고, 여론도 없습니다. 한번 시작한 이상 누구 하나가 끝장날 때까지 치고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고한봉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걸 이현수의 입으로 듣는 건 확연히 그 느낌이 달랐다.
“물론…… 말려들게 만든 건 죄송합니다만.”
“아닙니다.”
고한봉이 손을 내저었다.
상대의 사과를 받는다는 건 그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잘한 부분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총회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미 한국의 무인계는 중국에 점령당했겠죠.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고한봉의 입에서 어쩔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평범한 인간은 무인을 어찌할 수가 없다.
특히나 총기가 허용되지 않는 한국 같은 곳에서는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건물을 뛰어넘는 무인들을 구속할 방법 자체가 전무하다.
아무리 은밀히 그들을 배제하고, 심지어 군대까지 동원한다고 해도 사람들 사이에 스며든 무인들은 평범한 방식으로는 대처할 수가 없다.
중국에서 넘어온 범죄자 몇몇 때문에 나라가 뒤집히는 일도 종종 벌어지는 게 현실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들이 대량으로 유입된다면?
‘불지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지.’
최근 무인계에 대한 조사를 늘린 한국 정부도 비슷한 사례를 몇이나 확인했다.
단순히 마약이나 경제 때문에 몰락했다는 평을 받는 몇몇 나라들이 심각하게 무너진 원인이 무인계의 통제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얼마나 등골이 서늘했던가.
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만든 원인은 총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한봉이 이 상황이 이제야 오게 된 이유도 총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한봉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결행하실 생각입니까?”
“예.”
“회주님께서는…….”
“같은 생각이십니다.”
그렇겠지.
이현수는 강진호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은 사안을 밖으로 돌릴 이가 아니니까.
짐작하던 일을 선고받은 고한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알겠습니다.”
구질구질한 설명은 듣지 않아도 된다. 수많은 정치적 사안에 단련된 그는 몇 마디 말만으로 저간의 사정을 모두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장님, 이 일은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중국 정부가 이 전쟁 자체를 총회와 창왕계의 전쟁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전쟁으로 받아들일 위험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째서 그리 확신을…….”
“그쪽도 그렇게 여력이 없잖습니까?”
“…….”
고한봉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설사 그렇게 판단한다고 해도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그놈들을 끌고 온 겁니다. 부지 조성하느라 하신 고생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거죠.”
“……미국이 참전합니까?”
“하게 해야죠.”
고한봉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말이 다르지.’
미국 쪽 무인들이 참전한다면 중국도 어떻게든 이 일을 실제 전쟁으로 끌고 가지 않아야 한다. 미국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는 건 그 어떤 나라에도 지옥이 펼쳐진다는 걸 의미하니까.
“후우.”
고한봉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너무 깊이 들어갔어.’
최악의 상황만을 상정하다 보니 상황을 너무 과격하게 잡았다. 전쟁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벌어지는 게 아니다. 특히나 서로가 서로를 완전하게 제압할 자신이 없는 국가끼리의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외부적 문제는 서로가 필사적으로 억제할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고한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예.”
“그럼 한 가지 질문이 남는군요. 그럼 대체 저희가 뭘 해드려야 하는 겁니까?”
고한봉이 이현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게 정말 이현수의 말대로 무인계끼리의 일이라면 자신을 불러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로 원하는 게 있으니 이런 자리를 만들었겠지.
“우선은…….”
이현수가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빙그레 웃으며 고한봉을 바라봤다.
“총리님을 뵙자고 한 첫 번째 이유는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 사실을 알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예?”
고한봉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멍청하게 자꾸 되묻는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고한봉이었다.
“뭘 해주셔야 하느냐고 물으셨죠?”
“그렇습니다.”
“질문이 틀렸습니다.”
“…….”
이번에는 되묻는 걸 참아낸 고한봉이지만, 표정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얼굴에 강한 의혹이 어렸다.
“그건 저희가 물어야 합니다. 총리님, 저희에게 뭘 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현수의 물음에 고한봉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한 배를 탄 몸입니다. 총회가 추락하면 정권도 추락합니다.”
“아니…….”
고한봉이 고개를 저었다.
“정권이 아니라 국가겠지요.”
“예. 딱히 국가에 해준 것도 없는 마당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하지만, 이미 판은 깔렸습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몰살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들은 이 무주공산을 절대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잘 아시겠죠.”
“…….”
“그러니 이건 그렇게 뒷짐을 지고 앉아서 주판알을 튕길 일이 아닙니다. 정부는 총력을 다해 총회를 지원해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도에서 받아낼 수 있는 걸 받아내는 걸로는 못 이깁니다.”
“……실장님.”
“생각하십시오.”
이현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고한봉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 사실을 알아도 되는 이들은 모두 소집하십시오. 그리고 정부 차원에서 뭘 도울 수 있는지 그쪽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하…… 하하하하…….”
고한봉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그러니까 지금…….”
사람 좋게 웃어 대던 고한봉의 눈에 싸늘한 한기가 어렸다.
“총회가 제멋대로 저지르는 전쟁에 우리가 살점을 떼어내서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예.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고한봉이 이를 악물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말은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몇 번이고 듣지 않았는가.
고한봉을 엿같이 만드는 건 이 개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총회가 승리해야 한다. 최소한 무승부라도 이뤄야 한다.
그 정해진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될 게 분명했다.
“미국이 내버려 두지 않을 텐데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멕시코의 카르텔도 정리 못하는 미국이 한국의 무인계를요?”
“…….”
“현실을 보십시오, 총리님.”
이현수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솔직히 이럴 시간도 아깝습니다. 가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알아오십시오. 이야기는 그 뒤에 마저 하죠.”
이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의가 아닌 행동이지만, 지금 고한봉의 머리에는 그걸 생각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시!”
고한봉이 방을 나서려는 이현수를 붙잡았다.
“……이길 자신은 있는 겁니까?”
이현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부가 얼마나 해주느냐에 달려 있겠죠.”
“……이 실장님.”
고한봉이 이현수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개 같은 인간이로군.”
“칭찬 감사드리죠. 그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이현수를 보며 고한봉이 손을 뻗어 테이블을 움켜잡았다.
“빌어먹을.”
머리가 너무 복잡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 같은 건 없다. 이미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으니까.
‘그분을 뵈어야 한다.’
고한봉이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