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30
#1729.
거침없다 (4)
“과한 것 아닌가?”
“사실만 전했을 뿐입니다.”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실장, 너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라면 국민들이 뽑은 정부를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 해.”
“충분히 존중하고 있습니다.”
“……이 실장.”
“면피 삼아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존중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쪽을 존중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회주님께 말씀드려 정신을 녹여 버리고 꼭두각시로 만들었겠죠. 전쟁이 끝난 뒤에 폐인이 되든 말든.”
“…….”
위긴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굉장히 존중하고 있는 겁니다.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을 거쳐서 결론에 도달한다는 건 굉장한 낭비를 동반하는 일이죠. 지금 저는 그걸 기다릴 만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참아냈다?”
“예.”
위긴스가 이마를 짚었다.
뭐, 존중은 존중이다. 저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가 생각하는 존중과 이현수가 생각하는 ‘존중’의 개념이 미묘하게 다를 뿐이다.
‘설득은 어렵겠지.’
저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이현수와 마찬가지로 위긴스 역시 지금은 그런데 들일 시간이 없었다.
당장 그가 맡은 이들을 재무장시키고 전쟁에 대비한 물품들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혼이 나갈 지경이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크게 없었다.
그저…….
“이 전쟁은 미래를 손에 넣기 위한 게 아니었나?”
“……그렇죠.”
“전쟁을 통해 새로운 적을 만들어 버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잖느냐. 그런 식으로는 매번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언젠가는 한계가 와 쓰러지겠지.”
“…….”
“인간은 합리성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아. 인간은 누구보다 감정적이다. 네 논리와 네 계획이 완벽하게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그걸 이해시키는 건 별개의 문제야.”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이번 일만은 지금까지처럼 느슨하게 나갈 수 없었을 뿐이다.
“관계는 조율하겠습니다.”
“네가?”
“…….”
“네 인간관계는 솔직히 파탄 수준 아닌가? 친구도 없는 놈이.”
“인신공격하기 있습니까?”
“회사 상사가 유일한 술 상대인 인생 같은 건 지속해 봐야 크게 의미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 아득바득 이기려고.”
“……그렇게까지 비난하기 있습니까?”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 된 이현수가 핏발 선 눈으로 위긴스를 노려보았다.
“여하튼.”
“여하튼은 무슨 여하튼입니까! 사람을 칼로 쑤셔놓고!”
“너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더 배워야 해.”
위긴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의 너는 더없이 쓸모 있는 인재다. 그건 모두가 인정해. 너 없이는 이곳이 제대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할 거다. 하지만 그건 거꾸로 말해서…….”
위긴스가 가만히 이현수를 응시했다.
“지금이 전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이현수가 위긴스의 시선을 받으며 침음을 흘렸다. 지금 위긴스가 무얼 말하려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전시에는 급박함도, 다소의 무리한 요구도 받아들여진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이해하니까. 하지만 거꾸로 말해 전시가 끝나면, 더는 그런 방식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
“더 이상 누군가와 싸울 필요가 없는 총회에 네 자리가 남아 있겠느냐?”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그럼 그만두면 되죠.”
“놈!”
“그냥 한 말입니다. 저도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할 생각은 없어요. 무엇보다 저는 총회가 아니면 그냥 인간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총회가 아니면 친구도, 애인도 없지.”
“……제가 뭘 크게 잘못한 게 있습니까?”
위긴스가 피식 웃으며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너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괜히 늙은이가 와서 딴지를 걸어 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보이겠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다.”
이현수가 멍한 눈으로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위긴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니 딴지 걸 구석이 없도록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도록 해.”
“상당히 어려운 요구를 하시네요.”
“너는 할 수 있으니까.”
위긴스가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때맞춰 차이커창이 사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위긴스를 대면한 차이커창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다행스럽긴 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질이 나쁜 친구라 걱정이로군.”
이현수가 더는 대꾸할 힘도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위긴스가 그를 보며 한 번 웃어주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친구끼리 노는 데 어른이 껴 있기는 뭐하군. 나중에 다시 말하지.”
“……얼른 가십쇼.”
문이 닫히자 이현수가 소파에 늘어졌다.
차이커창이 그런 이현수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영국인은 한국어를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하는 것 같은데?”
“원어민은 개뿔이! 한국인보다 말을 더 잘해!”
이현수가 짜증 난다는 듯 몸을 과격하게 일으켜 세웠다.
“준비는?”
“대충 끝냈다.”
차이커창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어차피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준비는 중국에 들어가서 해야겠지.”
“그렇지.”
차이커창은 당장 내일 중국으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지.”
차이커창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현수를 바라봤다.
“중국에서 우리가 날뛰는 와중에 너희가 약속을 어기고 보조를 맞춰주지 않는다면 우리만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너라는 놈을 믿고 중국으로 가는군.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놈을 믿어야 한다니, 이건 진짜 끔찍한 아이러니야.”
차이커창이 이현수를 노려보았다.
얼마 전이라면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고 해도 차이커창은 절대로 이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창왕을 상대하는 것보다 이현수에 대한 경계심이 훨씬 더 컸을 테니까.
하지만 우습게도 그는 이 계획에 있어서 이현수의 가장 절대적인 동조자가 되어 있었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때려치우든가.”
“자라 새끼 같은 놈.”
차이커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홍왕과 강진호가 세운 계획대로라면 이제 그가 이현수와 적대할 일은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창왕에게 패한다면 둘 다 죽을 테니 적대할 일이 없을 것이고, 창왕에게 승리한다면 항구적인 동맹으로 동료가 될 테니까.
하지만…….
‘이놈과 동료라니.’
차라리 굶주린 늑대를 품에 안고 자는 게 속이 더 편할 것이다.
이건 독사를 몸에 친친 감고 자는 느낌에 가깝지 않을까?
그 독사와 어떻게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차이커창의 딜레마였다.
‘귀염성도 하나 없는 뱀 새끼라는 게 더 문제지.’
차이커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짜증 어린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이현수.”
“왜?”
“나는 네놈이 싫다.”
“새삼스럽게.”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증오스럽다. 세상이 두 쪽 나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너에게 호의를 갖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이현수가 묘한 눈으로 차이커창을 바라봤다.
“하지만…… 빌어 처먹을 일이지만, 나는 너를 신뢰한다. 네놈이 아니면 이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반드시 내 기대에 부응해라.”
차이커창이 한기 어린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만약 이 일이 잘못된다면, 내가 어떻게든 네놈만은 죽이고 죽겠다.”
“……그게 신뢰하는 사람에게 할 말이냐, 이 미친 새끼야?”
“내 나름의 신뢰라고 해두지.”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개소리하지 말고, 네가 할 일이나 잘해. 네놈이 잘못 움직여도 다 죽는 거야.”
“내가 실수할 일은 없다.”
“지랄을 하세요. 그래서 그렇게 얻어 터지셨나 보지?”
차이커창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현수를 노려봤지만, 이현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차이커창이 손만 뻗어도 이현수는 목이 달아난다. 하지만 죽일 수는 있지만, 이현수를 겁먹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강진호의 살기를 버텨내면서도 입을 놀리던 이현수를 차이커창이 무슨 수로 위협하겠는가.
결국 차이커창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내 역할은 해낼 테니까.”
“그래 주면 고맙지.”
차이커창의 얼굴에 미묘한 굴욕감이 어렸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다른 이의 계획대로 움직이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차이커창이다.
‘인정하자.’
지금 이 순간, 차이커창은 이현수의 광기가 자신의 머리를 능가했음을 받아들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이 생길 테니까.
“나는 철저하게 네 명에 따르겠다.”
“흐음?”
“창왕 놈의 목에 칼을 박아 넣을 수만 있으면, 네 개라도 되어주지. 그러니 나를 철저하게 이용해라, 이현수.”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차이커창이 이현수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이현수도 자세를 바로 했다.
차이커창이 손을 내밀자, 이현수가 그 손을 맞잡았다.
‘묘하군.’
이건 우정 같은 게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동질감. 혹은 같은 길을 걷는 이에 대한 경의에 가까울 것이다.
“출발은?”
“오늘 저녁이라도 당장 출발하고 싶지만…… 일단은 내일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문제라도 있나?”
“문제라기보다는…….”
이현수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 뺀 차이커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윗분들도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모양이더군.”
“……기어코?”
“그러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제 같이 싸울 사인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몸은 회복이 다 된 건가?”
“어제쯤 만전으로 돌아왔다고 하시더군.”
“그럼 몸이 완전히 회복되자마자 너 죽고 나 살자고 한판 붙는다고? 이제 곧 중국으로 돌아가서 창왕계와 싸워야 하는 사람이?”
“……자꾸 이쪽이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걸 받아들인 사람도 문제는 있으니까.”
“탓하는 게 아니라…….”
이현수가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차이커창도 답답하다는 듯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 물었다.
“무인이란 족속들은 진짜 이해를 못 하겠어.”
“무인의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이건 무인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분야든 저기까지 가버린 사람들은 평범한 이들과는 사고 자체가 다른 법이니까.”
“하…….”
이현수와 차이커창이 서로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랫놈들은 공동의 적을 두고 의기투합을 하려 묵은 감정을 억지로 지우고 있는데,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던 윗놈(?)들은 딱히 별 이유도 없이 서로 죽이겠다고 싸움박질을 한다.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아랫놈들의 입에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서로가 서로를 동정하던 와중 이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주님도 생각이 있으실 테니 부상을 입히지는 않으시겠지.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건 뭔 소리냐?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지. 홍왕께서는 자비로우시니 죽이지는 않을 거다.”
“……이 새끼가 돌았나? 홍왕이 무슨 수로 회주님을 이겨? 처 맞고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근데 이 자라 새끼가?”
기껏 쌓아놓은 우정이 급속도로 붕괴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