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31
#1730.
거침없다 (5)
강진호가 가만히 자신과 마주 선 이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불과 10여 미터.
멀다면 먼 거리다.
하지만 그 불과 10여 미터 앞에 있는 존재가 홍왕이라 불리는 자라면 그 거리를 멀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화려한 금색의 복색이 아니라 수수한 한푸[漢服]를 입은 홍왕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뭐라 해야 할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태산 같은 진중함이 느껴진다.
바토르처럼 거대한 육체는 아니지만, 충분히 크다고 느낄 만한 몸은 바위로 만들어진 것처럼 단단하고 무거워 보였다.
그 몸 하나하나에 거력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다.
강진호의 시선을 느낀 홍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울려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약속한 일이니까.”
“적당히 거절했다면 나 역시도 강요할 방법을 찾지 못했겠지. 지금 상황이 그러하니까. 내 억지에 어울려 준 것에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착각하지 마라, 홍왕.”
강진호가 홍왕을 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딱히 억지로 싸우는 건 아니다. 슬슬 한 번 정리를 해둘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흐음.”
홍왕이 살짝 주먹을 말아 쥔다.
강진호의 말끝에 묻어나는 여유가 조금 전부터 홍왕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반면에 홍왕은 조금 전부터 미묘한 긴장감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홍왕의 눈이 가라앉는다.
처음 그가 강진호와 조우했을 때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때의 강진호는 홍왕의 손에서 겨우 살아 돌아갔다.
비무였다면 홍왕의 승리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운 전투에서 서로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그건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무승부라 칭한 것뿐.
그 승부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는 홍왕도 알고, 강진호도 알고 있었다.
하나.
‘그 짧은 시간 만에 입장이 여기까지 뒤바뀌었다는 건가?’
홍왕은 이미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하게 구축한 무인. 과거로 치자면 대종사의 반열에 든 이다.
그런 이가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가늠하지 못할 리는 없다. 지금의 강진호는 과거 그가 쉬이 상대한 이가 아니다.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홍왕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생사결이 아님이 아쉽군.”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평소의 강진호라면 ‘그래서 목숨을 구한 거지’라는 말로 적당히 이죽여 줬겠지만, 지금의 홍왕에게는 그런 조롱이 온당치 않다.
지금 홍왕의 발언은 생사결이었다면 강진호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다는 도발이 아니라, 서로가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할 수 없으니 아쉽다는 의미니까.
“아쉬울 것 없어.”
“……음?”
강진호의 미소가 짙어진다.
“사정 봐줄 필요 없다는 소리지. 죽일 각오로 덤벼봐. 어차피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홍왕의 눈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아는 강진호는 기본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이다.
과거, 그와 강진호가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왕의 우위가 더없이 확실하던 그 순간에도 강진호는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건 허세 같은 게 아니다.
실력이 차이 난다고 해서 승부의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건 아니다. 더 약한 이가 더 강한 이를 꺾는 상황 따위는 세상에 수도 없이 벌어지는 흔한 일 아니던가.
그때의 홍왕은 강진호의 그 자신감을 그저 웃으며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자신감이 거슬린다.
강진호가 달라진 게 없다면 달라진 건 당연히 홍왕일 것이다.
‘나는 잃었구나.’
과거의 홍왕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과 신앙에 가까운 믿음으로 뭉쳐진 사내였다. 하지만 이번 창왕과의 승부에서 패배하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옅어져 버렸다.
그렇기에 저 강진호의 태도가 그의 신경을 자꾸 자극하는 것이겠지. 저 자신감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의심하고 있으니까.
홍왕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이 상황을 부정했을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더없이 강인하다며 위안했겠지.
하지만 홍왕은 스스로를 속이기에는 너무도 완전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외면하지 마라.’
자신을 속이는 짓따위는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마왕이여.”
“음?”
“대답하라. 나는 약해졌는가?”
강진호가 이채를 띠고 홍왕을 바라보았다.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물어오는 홍왕에게는 어떠한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단하군.’
극복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약함을 직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스로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면 상처는 곪아들어가 결국은 흉터처럼 남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직면한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다. 특히나 홍왕처럼 스스로를 확고히 믿는 이에게는 평범한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이 동반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홍왕은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쪽을 택했다.
“기준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지.”
“처음 대면했을 때보다는 강해졌지만,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는 못하다는 의미인가?”
“……잘 아는군.”
홍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약해진 원인은 결국 정신의 문제겠군.”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홍왕은 일가를 이룬 무인이다.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대면할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굳이 강진호의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패배라…….”
홍왕이 웃어버렸다.
“나는 내 스스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긍심 삼아 살아왔다. 하지만 패배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게 오히려 나의 발목을 잡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군. 적당한 시기에 패했더라면 이런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텐데.”
“패하지 않았기에 거기까지 갈 수 있던 걸지도 모르지.”
“……그 말도 틀리지는 않군.”
홍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여, 아는가. 나는 지금 매우 분노하고 있다.”
“…….”
홍왕이 정광 어린 눈으로 강진호를 노려본다.
“패배가 나를 무디게 만들었다는 것은 나는 창왕이나 창왕이 내게 준 패배에 겁을 먹었다는 의미겠지. 나는 그걸 참아낼 수가 없다.”
우드드득.
홍왕이 주먹을 틀어 쥐었다.
“패배는 승리로 지울 수 있는가?”
“무리지.”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더 강한 이를 이긴다 해도?”
“설사 네가 나를 이긴다고 해도 네 손으로 창왕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은 달라질 게 없다. 아니면 네가 절대로 다시는 창왕에게 지지 않는다는 완벽한 확신을 얻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강진호의 말이 맞다는 듯 홍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로군.”
홍왕이 웅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이기면 될 일이다.”
“말귀를 못 알아먹나?”
“아니. 충분히 이해했다. 네게 이길 수 있으면 창왕에게 지지 않을 것 같거든.”
“……알아먹긴 했네.”
강진호가 피식 웃고는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우우우웅!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의 손이 허공 안으로 밀려 들어간다. 다시 뽑아낸 그의 양손에는 적루와 홍루가 들려 있었다. 두 자루의 긴 장검을 늘어뜨린 강진호가 가라앉은 눈으로 홍왕을 응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못 알아 처먹었어. 만전의 상태도 아닌 네가 내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렵겠지.”
홍왕의 양 주먹에 황금빛 서기가 어렸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너도 무인이라면 알겠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가, 포기하는가의 기로에 선다면 선택할 것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맞는 말이지.”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가 홍왕의 입장이라 해도 손을 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아갈 길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무인은 그 자리에 안주하는 순간 끝난다.
아무리 멀고 지난해 보이는 길이라 할지라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걸어야 생기는 법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강진호가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창왕 정도는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지. 대신 더 큰 벽을 만나게 될 거야.”
“건방진 놈. 감히 누구에게.”
홍왕의 두 눈이 불타오르는 듯한 안광을 토해내었다.
“네가 네 입으로 전력을 다하라 했으니, 소원대로 해주지!”
홍왕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강진호가 비웃듯 말했다.
“그만 지껄이고 덤벼.”
“오오오오오!”
홍왕의 몸이 한 줄기 금빛 섬광이 되어 강진호를 향해 쏘아졌다.
강진호의 육체에서 검은 마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황금의 섬광과 검은 불꽃.
인간을 초월한 두 초인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아우!”
방진훈이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괴물과 괴물의 충돌.
그 여파는 먼 곳에서 그 전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까지 미쳤다.
“……뭐가 이리 날아와?”
잘 보이지도 않는 거리다.
어설프게 휩쓸리면 방진훈 따위는 뼈도 추리지 못한다.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이 정도 거리면 폭격이 떨어져도 괜찮다 싶은 곳까지 멀어졌건만.
“읏차.”
위긴스가 양손을 내뻗자 그들의 앞에 투명한 막이 쳐졌다.
“아! 감사합니다, 이사님.”
“괜찮네. 나도 좀 집중해서 보고 싶으니까.”
위긴스가 더없이 흥미롭다는 듯 두 사람의 격돌을 지켜보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군.”
“그러게요.”
방진훈이 한 말의 의미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뜻이고, 위긴스의 발언은 저들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걸 의미했다.
아무리 안력을 돋워도 저들이 충돌하는 속도를 눈으로 따라갈 수가 없다. 뭐가 번쩍번쩍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라기보다는 특수 효과의 향연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눈으로 제대로 볼 수는 없다 해도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힘의 여파는 확연히 전해져 온다.
그 힘을 느끼는 것만으로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 증거로…….
“흐…….”
바토르가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두 사람의 충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바토르를 본 위긴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장민을 바라봤다.
장민 역시 바토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꽉 쥔 주먹이 새하얗게 질려 있고, 전신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킨다.
“…….”
위긴스는 새삼 이 두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그 무위가 높을수록, 그 경지가 높을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긴스는 이 두 사람의 눈에는 과연 어떤 것이 보이고 있을지 궁금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으윽!”
방어막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위긴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확실히 저 둘은 차원이 다르군.’
그 충돌의 여파만으로 총회 최고의 무인들을 완전히 짓밟아 버리고 있었다.
위긴스가 굳은 얼굴로 황금빛의 섬광과 검은 불꽃의 충돌을 바라봤다.
“눈을 떼지 마라.”
그 순간, 바토르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평생 다시는 못 볼 광경일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모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