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36
#1735.
승부하다 (5)
“어서 오십시오.”
“다시 뵙습니다, 총리님.”
이현수가 고한봉을 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런 이현수를 맞이하는 고한봉이지만, 그 표정은 전과는 달리 조금은 경색되어 있었다.
“굳이 이곳까지 오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공무에 바쁘실 텐데, 저희 때문에 시간을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순간, 고한봉의 눈가가 살짝 꿈틀댔다.
‘뭐지?’
이현수의 자세가 오늘따라 낮아 보인다.
물론 그가 처음 만났을 당시의 이현수는 분명 예의가 바른 이였지만, 만남이 잦아지면서 조금씩 고압적으로 변해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현수는 그를 처음 만날 때의 모습처럼 낮은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일전에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말이다.
“앉으십시오.”
슬쩍 이현수의 눈치를 살핀 고한봉이 앞자리를 가리켰다.
“예.”
이현수가 고한봉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식사라도?”
“괜찮습니다, 총리님. 바쁘신 분을 오래 잡아둘 수는 없으니까요.”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커피나 한잔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어렵지 않지요.”
고한봉이 벨을 눌러 사람을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이가 주문을 받고는 허리를 구십 도로 접어 인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고한봉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총리님.”
“예?”
이현수가 고한봉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일전에 제가 저지른 실례에 대해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실례라니요.”
“죄송합니다. 저도 워낙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현수가 저자세로 사과를 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고한봉이었다.
‘뭘 잘못 먹었나?’
이현수가 꽉 막힌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리 쉽게 남에게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시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뭘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
“죄송합니다, 총리님.”
“거참, 이러지 마시라니까.”
고한봉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알겠습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제가 사과를 받은 걸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그제 이현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낮게 헛기침을 했다. 살짝 어색한 공기가 둘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보다…….”
침묵이 더 이어지면 이현수가 더 곤란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고한봉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윗분과 전에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논의를 좀 했습니다.”
“아!”
“여기.”
고한봉이 가져온 서류 가방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더니, 그 안에 든 서류 뭉치를 꺼내 이현수에게 내밀었다.
“이쪽에서 지원 가능한 일들의 리스트입니다.”
이현수가 두 눈을 빛내며 고한봉이 내민 서류 뭉치를 받아 들었다.
“지금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아, 잠시만. 확실한 게 좋죠.”
고한봉이 이현수를 만류하고는 문 쪽을 바라봤다. 주문한 커피가 들어오기까지 기다린 고한봉이 음료가 세팅되자 종업원을 내보냈다.
“이젠 괜찮습니다.”
“예.”
이현수가 서류를 넘겨 확인하기 시작했다.
“물론 서명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확정된 사안이라고 말씀드리지도 못합니다. 우선은 가능성이 있는 일에 대한 리스트 정도라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참 동안 한 장씩 넘겨 모든 사안을 확인한 이현수가 가만히 서류를 덮었다.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유출은 피해주십시오.”
이현수가 가볍게 웃었다.
이건 유출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문건이다. 정부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될 만한 부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제대로 된 서명이나 날인도 없다.
누가 본다 해도 웬 설정 덕후가 아무 사안이나 지껄여 놓은 문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현수와 고한봉에게 있어서만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서류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니라 윗 분의 의지입니다.”
고한봉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사실 실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예.”
“하지만 윗분께서는 실장님께서 말씀하신 한 배라는 말에 동의하셨습니다. 결국 상황이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우리 쪽에서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다는 것도요.”
이현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금 대통령은 호인으로 알려져 있고, 사안에 대한 민감도는 그리 높지 않은 타입이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고한봉의 말에 따르면 의외로 현실 인식이 빠르고, 결단도 단호했다.
물론 고한봉이 말하는 ‘윗분의 결정’이라는 걸 완전히 신뢰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쉽게 믿을 일은 아니지.’
이현수는 한 국가의 대소사에 대한 결정이 대통령의 의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한 국가의 대통령이 가진 권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력이 회주에게 집중되어 있는 총회에서도 중요한 결정은 회주와 이사들의 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지금의 대통령에게 군사정권 독재자급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 이상, 그만한 일을 홀로 결정하고 지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만한 권력이 있어도 못할 일이지.’
까딱했다가는 국가를 박살 낼 수도 있는 결정을 홀로 내리고 책임을 진다는 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일일 테니까. 심지어 이현수가 그 입장에 처했어도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한다. 그게 이쪽의 결정입니다.”
고한봉이 단호한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지금이야 한 점 흔들림 없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 표정을 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을까?
“감사합니다, 총리님.”
“아닙니다.”
고한봉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쪽에서도 갈피를 잡기 힘든 차였습니다. 압박은 강해지고, 꼭 무인계의 영역뿐 아니더라도 간섭이 심해지는 차였으니까요. 그렇기에 실장님이 말씀하신, 무인계가 무너졌을 시에 벌어질 일들이 더욱 와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저들의 방식이 그렇다.
저들은 내부로 파고들어 어둠부터 장악한다. 그 뒤에는 상권을 틀어쥐고, 상권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한다. 수많은 나라들이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저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전까지는 여러 국제적 상황 때문에 한국까지는 손을 뻗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있다.
“물론 저들이 절대악인 건 아닙니다. 저희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야죠.”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냉혹한 국제 관계에는 선도 악도 없다.
더 강한 이, 그리고 더 가까운 이만 있을 뿐이다.
선의를 논하는 이는 정권을 잡을 자격이 없다. 한 국가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철저하게 국가의 이득만을 봐야 한다.
“실장님.”
고한봉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아시겠지만, 이건 정부…… 아니, 국가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도박입니다. 지금 저희가 총회를 손절하고 숨을 죽이면, 적어도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는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큰 고심이 있었는지를 반드시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이현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기에, 이현수가 그토록 고한봉을 압박한 것이다.
“여기까지 해드리는 이상, 뒤는 없습니다. 이 실장님, 반드시 성과를 내주십시오. 이기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저들에게 피해를 주고 전력을 보존한 채 돌아오는 정도는 해주셔야 합니다.”
이현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게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입니다만…….”
“해주셔야 합니다.”
고한봉이 단호한 얼굴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현수도 더는 너스레를 떨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고한봉이 안색을 풀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
이현수가 적당히 답할 말을 찾는 와중 고한봉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여하튼 그 리스트의 항목 중에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빨리 요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추가적으로 요구할 사항이 있으시면, 그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요청해 주셔야 합니다.”
“예.”
이현수가 슬쩍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 뭉치를 바라보았다.
‘별 쓸모는 없는 물건이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적었다지만, 자잘하고 쓸모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서류에는 저들이 지원을 각오한 분야와 규모가 들어 있으니까.
말하자면 이건 가이드라인이다.
이만한 인원과 액수, 그리고 정부적 지원이 가능하다. 그러니 그쪽에서 다시 필요한 부분이 이야기해라.
다짜고짜 들이댄 이현수의 요구에 대한 합리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부가 괜히 정부가 아니고, 관료가 괜히 관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이현수가 서류를 챙겨 넣었다.
“그럼 오늘은?”
“아, 잠시만요.”
이현수가 슬쩍 고한봉의 말을 막았다. 슬슬 자리를 파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쪽은 아직 용건이 남아 있다.
“잠시 전화 한 통만 하겠습니다.”
“예?”
이현수가 고한봉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간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고한봉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만나는 자리에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이현수가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예. 어디십니까, 자리 다 끝나가는데.”
“…….”
고한봉이 뚱한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예? 입구요. 아…… 네, 알겠습니다.”
이현수가 전화를 끊고는 곧장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어색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대체…….”
고한봉이 입을 다물었다.
의문이 금세 풀렸기 때문이다. 어색한 얼굴로 들어오는 이현수의 뒤로 익숙한 사람이 태연하게 걸어 들어왔다.
“회, 회주님?”
고한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를 어떻게 맞이하는가가 그 사람과 자신의 격차를 말해준다고 하던가.
머리로는 대한민국의 총리라는 자리가 총회의 회주에 비해 결코 낮지 않은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고한봉이지만, 강진호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아,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주님. 이, 이쪽…… 어…….”
다급하게 한쪽 자리를 가리키던 고한봉의 손이 멈췄다.
종업원을 불러 자리를 세팅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와중에 강진호가 태연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
“앉으시죠.”
“예? 아…… 예! 예!”
고한봉이 자리에 앉았다.
강진호를 마주 보게 된 고한봉이 마른침을 삼켰다.
강진호가 갑자기 여기에서 왜 나온단 말인가.
강진호가 빤히 고한봉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찾아뵙게 된 건 다름이 아니라…….”
“예, 회주님.”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고한봉이 강진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 직원이 입을 함부로 놀렸다고 하던데…….”
“…….”
강진호가 손을 뻗어서 이현수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체념한 듯 눈을 감는 이현수를 보고 나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한 고한봉이었다.
“……파묻을까요?”
“…….”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