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50
#1749.
시작하다 (4)
어둠이 내려앉은 활주로에 불빛이 점등되기 시작한다.
둘씩 쌍을 지어 켜지던 불빛이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이내 어둠 속에서 완연한 두 개의 선을 그어냈다.
“조심해!”
거친 욕설과 고함 소리가 드넓은 활주로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고함 소리는 이내 맹렬하게 진동하는 엔진음에 묻혀 버렸다.
‘난리도 아니로군.’
레이놀드가 활주로 뒤편에 모여 있는 전투기들을 보며 흥분된 기색을 내보였다. 그도 나름 잔뼈가 굵은 이지만, 이런 광경을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중구난방이다.
이 어둠을 뚫고 전투기들을 출격시킨다는 건 생각보다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차관님, 준비됐습니다!”
“다른 기지들은?”
“다른 기지들에서도 준비가 완료됐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제 지시만 떨어지면 바로 출격할 수 있습니다!”
“대기하라고 해!”
“예!”
레이놀드가 조금 초조한 눈으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굳이 그까지 현장에 나올 필요는 없는 일이지만, 상황의 엄중함이 그를 편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곳에서 지휘를 해야 할 이가 마침 공석이기도 하고 말이다.
레이놀드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새하얗게 질린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난다.
‘일이 조금만 잘못 풀려도 끝장난다.’
미국이라는 국가는 별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레이놀드는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최소 해임되어 연금되는 수준이고, 상황이 더 심각해진다면 깔끔하게 제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레이놀드는 발을 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이건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왕 겪게 된 이상 어중간한 대처는 있을 수 없다.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퍼부어서 반드시 총회를 이기게 만든다.
“한 배를 탔다는 게 이런 의미였군.”
이미 타버린 이상 내릴 수도 없다. 끝까지 항해하여 목적지에 도착하거나, 아니면 도중에 난파되어 같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수밖에.
레이놀드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빼 든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레이놀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레이놀드입니다.”
[상황은?]“준비를 모두 마치고 출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리고 싶군.]“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죠.”
[그 말에는 공감하지. 하지만 그 위험을 자네만 감수하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물론입니다.”
[행운을 빌지. 국가는 최대한 자네를 지원할 걸세. 물론 그 지원이 효용이 있다는 판단이 유효할 때까지는 말이야.]“감사합니다.”
대답도 없이 전화가 끊긴다.
레이놀드가 식은땀을 닦으며 전화를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었다.
“효용이 있을 때까지라…….”
물론 그러시겠지.
국가란 원래 그렇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으려 한다. 적당히 면피를 하는 수준까지 지원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빼버릴 것이다.
레이놀드를 희생시킨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물론 그건 아주 합리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한 가지를 간과했다.
‘이쪽도 합리적으로 생각한단 말이지.’
국가에 매인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국가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국가’라는 곳이 이리 노골적으로 나온다면 레이놀드 역시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레이놀드의 입장에서는 그의 국가가 이 일에 조금 더 관여할수록 생존율이 극단적으로 올라간다는 의미다. 그런데 왜 저들이 지정한 수준에서 멈춰야 하는가.
레이놀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건 더 미친놈이 이기는 전쟁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에 동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현수.”
그때, 그의 가슴에 찬 무전기에서 비프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전을 받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 무전기에 연결된 채널은 하나뿐이니까.
“출격시켜!”
“예!”
활주로 좌우로 늘어선 이들이 경광봉을 힘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전투기들이 활주로로 진입한다.
지금 한국 내에서 몇 군데 더, 그리고 일본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활주로로 진입한 전투기가 강렬한 제트엔진 소리를 내뿜으며 허공으로 비상했다.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전투기가 쉴 새 없이 활주로를 질주한다.
운영 수칙을 반쯤 무시한, 과격한 이륙이다.
하지만 때로는 규칙보다 효율이 중요할 때도 있는 법.
레이놀드가 날아오르는 전투기들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이제 퇴로는 없어.’
전부 아니면 전무.
그 둘 중 하나가 있을 뿐이다.
* * *
“출격 시작했습니다.”
“상황판!”
“예!”
전면을 가득 채운 화면에 지도가 표시되고, 작은 점들이 일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하튼 미국 놈들은 재주도 좋단 말이야. 이걸 이렇게 실시간으로 다 보게 되고.”
뭐, 반쯤은 강제로 협박해 받아온 정보창이지만.
“근데 정말 빠르네.”
이전에는 중국과의 충돌을 우려해 러시아의 전투기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어차피 이 전쟁에서 지면 미래는 없다.
총회가 괴멸하면 한국과 일본은 모두 삼왕계의 손에 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몽골은 물론이고, 러시아까지 모두 삼왕계가 지배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벽하게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기듯, 그림자가 장악당하면 빛 역시 힘을 쓸 수 없다. 동아시아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총회를 지원해야 한다.
주한미군 소속, 그리고 주일미군 소속에다가 미리 한국으로 옮겨둔 다른 전투기들까지 일제히 날아올라 중국으로 가고 있다.
아마 한국전쟁 이후로 가장 많은 수의 군용기들이 동아시아의 하늘을 뒤덮는 날일 것이다.
“수송기도 출발했습니다.”
“좋군.”
이현수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화면에 보이는 작은 점들 뒤로 커다란 붉은 점이 합류하기 시작한다.
“자, 이제 이 느려 터진 놈을 어떻게 호위해서 중국으로 데려가느냐의 싸움이로군.”
평소라면 딱히 어려울 게 없겠지만, 중국도 이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두 가지는 이미 확인했어. 첫 번째는 저 새끼들이 상대가 우리라면 러시아 국적기든 미군 국적기든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해 댈 만큼 생각이 없다는 것.”
그러니 이번에도 당연히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리고 둘 다 그런 일을 벌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을 만큼 뻔뻔하다는 것도.”
창왕을 상대할 때, 러시아 공군과 미국 공군을 모두 동원했다. 그리고 그 둘 모두 중국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도, 중국도, 러시아도 애초에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공중전 역시 모두가 없던 일로 치게 된다는 의미였다.
직접 전투에 들어간 나라도, 그 상황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 한국과 일본, 러시아도.
“재미있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어쩌면 한국전쟁 이후로 가장 큰 공중전이 여기서 벌어지는 건데, 아무도 그걸 모른다는 게.”
“그걸 재밌다고 느끼는 시점에서 벌써 많이 가버린 것 같습니다만?”
이현수가 빙글빙글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상황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 대응해 봐, 창왕. 이 정도까지는 예상했겠지?”
* * *
“다수의 항공 편대가 영공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출발 위치는?”
“너무 많습니다! 우선은 한국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참 놀랍네. 무려 한국이란 말이지? 아틀란티스나 화성도 아니고 말이야.”
가오쉰이 이를 빠득 갈았다.
물론 비행기의 이륙 위치까지 알아내라는 게 과한 요구라는 걸 알고 있다. 평소의 가오쉰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초조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뭔가 계속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전투기를 뭘 어쩌자고?’
이게 바깥세상의 전쟁이라면 의미가 있겠지. 제공권을 장악하고 폭격기를 투입할 수 있다면 전쟁의 반은 끝나는 거니까. 하지만 저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전쟁에 폭격기를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설사 무인들만 정확하게 노려서 타격을 한다고 해도 타국의 영토를 폭격한다는 건 그 자체로 선전포고다. 그건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렇다면 결과야 빤하지.
“전투기 편대 뒤쪽에 수송기가 따라붙는지 확인해!”
“예? 그럼 그 안에?”
“아마도 그럴 거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총회의 인원은 이만이 넘습니다!”
“한국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미군이라면 이만 명 정도는 별 무리 없이 강습시킬 수 있어.”
“…….”
“게다가 낙하산 하나만 주면 별다른 훈련도 필요없는 인원들이다. 그냥 포탄 투하하듯이 떨궈 버리면 그만이야!”
“하지만 그러면 저들도 분산될 텐데.”
“……그게 더 골치 아프지.”
전시로 치자면 영토 곳곳에 이만 명의 게릴라 부대가 쏟아지는 것과 다름없다. 그 자체로 제대로 된 화력이 될 수는 없겠지만, 처리하는 데 어마어마한 시간과 인력이 소모될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마! 저들의 주력은 총회가 아니야! 혼란이 생기면 홍왕계가 노리고 들어온다!”
“아!”
“최대한 빨리 확인해! 저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예!”
가오쉰이 초조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침착해라, 침착해.’
그는 그저 상식 차원에서 대응하면 그만이다. 저들의 계략을 분쇄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창왕이니까. 지금 창왕에게는 창왕계의 정보 단체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얻어낸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감히 뒤질 엄두도 나지 않는 방대한 양의 정보지만, 창왕은 그 정보 속에서 저들의 목적을 파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가오쉰 님!”
그때,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가오쉰의 귀를 꿰뚫었다.
“중국으로 오지 않습니다! 남중국해와 러시아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뭐?”
“영공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영공에서 거리를 두고 위아래로 나뉘어 이동 중입니다!”
“……오지 않는다고?”
“예!”
“대, 대응 편대는?”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디를 막아야 하는지…….”
가오쉰의 눈이 뒤흔들렸다.
‘안 온다고?’
“당장 공군과 통신 열어! 지금 당장!”
“예!”
가오쉰의 눈이 지도를 더듬었다.
‘러시아와 남중국해?’
의도는 명확하다. 중국을 포위하듯 전투기로 두르겠다는 의미겠지. 지금이야 위아래지만, 곧 중국 주위를 모조리 둘러싸 버릴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땅도 아닌 하늘을 포위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이 개 같은 새끼!”
노기를 참지 못한 가오쉰이 책상을 걷어찼다. 쇠로 만든 책상이 종이처럼 구겨지며 벽에 처박혔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토해낸 가오쉰의 핏발 선 눈이 반사적으로 동쪽으로 돌아간다.
만난 적도 없는 이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에 자꾸만 울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