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81
#1780.
대면하다 (5)
턱이 사라진 것 같다.
무학을 익히는 이는 결국 고통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적에게 공격을 받을 때는 물론이고, 때때로는 자신이 공격을 할 때조차 고통을 감내해야 하니까.
창왕 역시 고통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이자가 주는 고통은 지금껏 그가 이해한 고통과는 뭔가 결이 다르다.
욱씬.
턱을 통해 파고든 마기가 신경을 긁어 대는 듯 끔찍한 고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창왕은 그 고통에 눈을 돌릴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쫓아온다.
마기를 줄줄이 뿜어내는 강진호가 그 마기를 날개처럼 펼치며 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두 눈에서 뿜어진 혈광(血光)이 뒤로 늘어지며 기괴한 섬뜩함을 만들어낸다.
그 광경을 보며 창왕이 희게 웃었다.
보라.
마치 사신이 그를 쫓아오는 것 같지 않은가.
‘죽음이라…….’
살면서 단 한순간도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은 없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으로 비롯될 그의 부재다.
아직 해야 할 것이 남아 있는 이는 죽을 수 없는 법.
콰드드득.
창왕의 손이 바닥을 파고든다. 날아가던 몸을 멈추는 데 성공한 창왕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강진호를 노려본다.
“즐거워 보이는군.”
콰아아아아앙!
강진호가 휘두른 적루가 창왕을 내리 가른다.
양손을 교차해 검을 막아낸 창왕의 무릎이 휘청이며 꺾였다.
연이어 이어지는 연격!
더없이 강대한 힘을 실은 검이 일시에 수도 없이 휘둘러진다. 검의 잔영이 창왕의 전신을 뒤덮으며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이 집어 삼켜오는 듯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창왕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뒤로 내민 디딤발을 바닥에 발목까지 박아 넣은 창왕이 미친 듯이 양손을 휘두르며 새하얀 장력을 폭풍처럼 뿜어낸다.
검은 검기와 새하얀 장력.
너무도 확연히 대비되는 두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이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내 눈에도 안 보인다.”
위긴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바토르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보아하니 바토르 역시 저 공격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단 일검, 단 일장만으로 산을 가르고 대지를 부술 공격들이 눈 한 번 깜빡할 새에도 수십 번 왕복한다.
화려함과 유려함을 배제한, 그저 기본에 충실한 공방.
그렇기에 더욱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위긴스를 더욱 놀라게 만드는 것은 저 공방에서 창왕이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강진호와 맞붙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리 터프한 이가 아니었을 텐데?’
강진호와 힘 대 힘으로 맞붙는 것은 천하제일의 내력을 자랑하는 홍왕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일이다. 그런데 홍왕도 아닌 창왕이 설마 정면 승부를 택할 줄이야.
그리고 심지어 밀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군.’
이건 창왕의 스타일이 아니다.
대체 창왕은 왜 저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건가.
콰아아앙!
그리고 그 순간, 창왕은 그 무모한 짓의 대가를 치렀다.
강진호가 날린 강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창왕이 물수제비처럼 바닥을 튕기며 날아간다.
쿠웅!
바닥에 처박히고도 누군가 질질 끌어가는 것처럼 한참을 밀려난 창왕이 드러누워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그 몸을 일으켰다.
흙투성이가 된 그의 눈에는 흥분한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엿보이지 않았다.
“……이봐, 마왕.”
창왕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강진호의 검이 바닥으로 향한다.
“부조리?”
“그래, 부조리.”
창왕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완전히 짓이겨져 버린 담배를 꺼내 들고는 눈을 찌푸렸다.
“재수도 없지.”
담배를 바닥에 던져 버린 창왕이 강진호를 빤히 보며 말했다.
“내가 이 중원을 집어삼키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다고 생각하나?”
“…….”
“십 년? 이십 년?”
창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무인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오로지 지금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다른 왕들을 쓰러뜨리고 오롯이 이 중원을, 이 무인계를 손에 넣기 위해서 말이야.”
강진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그러고는 남은 담배를 창왕에게 던졌다.
“…….”
“흡연자의 도리지.”
담배를 받아 든 창왕이 피식 웃고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는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였다.
그의 입에서 새하얀 연기가 아주 천천히 흘러나온다.
“모든 것은 완벽했지.”
“…….”
“느리지만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갔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참아내고 또 참아냈지. 그래서 수십 년 만에 마침내 이 순간이 왔다.”
강진호가 가만히 창왕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냐는 듯이.
“그런데 네가 나타났지.”
“…….”
“그리고 너는 불과 몇 년 만에 내가 만들어놓은 모든 상황을 짓밟고, 뒤집고, 파괴했지.”
창왕이 낮게 웃었다.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강진호가 대답 없이 바라보자, 창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내가 평등주의자는 아니지. 평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고, 그런 뜬구름을 잡을 생각은 없어. 세상은 애초에 불공평하지. 하지만…….”
창왕의 눈이 시리게 빛났다.
“그 불공평이라는 건 최소한 이 세상의 법칙 안에 있지. 하지만 너희는 대체 뭐지? 회귀자라는 것들은 대체 뭐냔 말이다.”
창왕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너희 회귀자라는 놈들이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줄 아는 거냐?”
강진호가 피식 웃어버렸다.
끝까지 몰린 이의 발악으로 듣고 흘려 넘겨도 될 말이지만…… 강진호는 그 말이 그리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창왕이나 다른 삼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들이 다투던 세상에 갑자기 강진호가 뚝 떨어져 세상의 균형을 짓뭉개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현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온갖 비겁한 짓은 다 해놓고 잘도 처 지껄여 대는군!”
“비겁?”
창왕이 고개를 돌려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뭐가 비겁하지?”
“몰라서 묻나?”
“당연히 모르니 묻는 것 아닌가.”
“…….”
창왕이 낮게 웃었다.
“네가 말하는 비겁은 그런 거겠지. 룰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렀다. 무인과 무인이 싸우는데 화기를 동원했다. 군대를 부르고, 민간인을 통제하고…….”
이현수가 아무런 말 없이 창왕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게 정말 비겁한 건가?”
“…….”
“진짜 비겁이라는 건 말이다.”
창왕이 강진호를 보며 낮게 웃었다.
“원래는 쓰레기로 죽어갔어야 할 인간이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오는 것 같은 거다.”
“이…….”
“룰에서 어긋난 것을 서로 제외해 볼까? 나는 창왕계만으로 싸우지. 아니, 창왕계도 필요 없어. 나 홀로 싸우지. 그럼 너희는 마왕 없이 나를 감당할 수 있나?”
이현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내가 아니야. 저 망할 놈이지. 저놈만 없었다면 이 많은 피가 흐를 일은 없었어. 마왕이 등장하기 전, 수십 년 동안 죽어 나간 무인의 수보다 저 빌어먹을 놈이 나타난 이후 죽은 무인이 수십 배는 더 많을 거다.”
“…….”
창왕이 이현수에게서 시선을 떼고 강진호를 바라봤다.
“네가 세상을 뒤틀고 있다.”
“…….”
“네가, 그 빌어먹을 회귀자라는 놈들이 세상을 뒤틀고 지옥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냐고!”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더없이 섬뜩했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런 눈빛을 받으면서도 딱히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모르는 모양인데…….”
“…….”
“나라고 이렇게 되고 싶어서 이리된 게 아냐.”
강진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강진호가 감정 없는 눈으로 창왕을 바라본다.
“말했을 텐데. 네가 나를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이리될 일은 없었다고.”
“…….”
“중국이니, 무인계니.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어. 이 상황을 만든 건 너의 욕심이지. 나를 그냥 내버려 뒀다면 나는 네가 중국을 먹든, 세상을 먹든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툭.
바닥에 담배를 던진 강진호가 담배를 짓밟았다.
“그러니 우는소리는 그쯤하지.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창왕이 입가를 비틀었다.
“무인이 어쩌고를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이 스스로의 부조리에는 눈을 감는군.”
“착각하지 마, 창왕.”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니라서 네가 지껄이는 말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부조리한 놈이든, 내가 비겁자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
“그러니 이제 그만 지껄이고 덤벼. 길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지긋지긋하니 이제 끝내자.”
“흐…….”
창왕이 희게 웃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착각하지 마. 네가 무서워서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니까.”
“안다.”
“나는 네게 지지 않아.”
창왕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 중원이니 무인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너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어. 아무리 노력하고, 인생을 바쳐 갈구해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 그 존재가 부조리로 똘똘 뭉친 너 같은 놈이라는 것 역시 인정할 수 없어!”
홍왕에게 패해 죽는다면 창왕은 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쉽다고 한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진호는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강진호는 존재할 리 없는 운명이 그를 막기 위해 뜬금없이 세상에 던져 버린 것 같은 존재였다.
그 방식이야 어쨌든 스스로의 삶을 끝없이 개척해 온 창왕에게 있어서 강진호는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다.
“버그는 지워야 하는 법이지. 너를 죽여 이 부조리를 끝낼 거다, 마왕.”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로는 무리야.”
“창왕으로는 무리일지도 모르지.”
창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나는 너를 죽인다. 창왕이 아닌 인간으로서.”
대답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창왕이 강진호를 향해 빛살로 화해 날아들었다. 산발한 머리가 휘날리며 광풍이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창왕의 양손이 눈부신 백광(白光)을 뿜어내었다. 극성으로 끌어 올린 내력이 뭉치고, 또 뭉쳐 든다.
강진호 역시 적루와 청루를 움켜잡고 그런 창왕을 맞받아갔다.
본능이 말한다.
이 싸움이 끝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한 사람은 오랜 세월 중국을 지배해 온 삼왕 중 하나.
다른 한 이는 중원으로부터 돌아온 과거의 마왕.
하지만 지금 그런 겉치레는 의미가 없다.
평생을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던져 온 인간과 평생 동안 찾지 못한 것을 이제야 찾아낸 인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과 인간이 맞붙었다.
콰아아아앙!
상처 입은 육체가 피를 뿜어내고, 뒤틀린 근육이 찢겨 나갔지만, 두 사람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마와아아아앙!”
“오오오오!”
강진호의 검과 창왕의 수도가 서로의 육체를 찢고, 베고, 짓뭉갠다.
두 사람이 흘린 피가 바닥을 타고 천천히,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