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85
#1784.
격돌하다 (4)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을 앞으로 뻗었다.
홀린 듯 발을 뻗는 그의 어깨를 홍왕이 움켜잡았다.
“멈춰라, 이현수.”
“…….”
홍왕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음에도 이현수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걸어갔다. 홍왕이 살짝 입술을 깨물며 그런 이현수를 확 잡아당겼다.
“움직이지 마!”
휘청이며 쓰러질 뻔한 이현수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홍왕을 바라본다.
“……무슨 수를 써도 저곳에서 마왕을 빼 올 수 없다.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지 않냐고?
그래, 알고 있다.
이곳에 있는 모두의 이목을 속이고 단숨에 저곳에 나타난 이다. 그런 이를 상대로 이만한 거리를 좁혀 강진호를 구해낸다는 건 천하의 홍왕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흑왕?’
창왕의 말이 맞다면, 저자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자 중 하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빠져나올 길이 없다.
하지만 그래서다.
그렇기에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다.
“자극하면 마왕이 위험하다.”
홍왕의 말에 이현수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럼…….
이렇게 손을 놓고 보고 있으라고?
강진호가 죽는 모습을?
이현수의 눈에 서서히 핏발이 서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홍왕 역시 입술을 질끈 깨물 수밖에 없었다.
‘내 탓이다.’
그가 이 승부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면 다른 이 역시 이 승부에 개입할 수 없도록 했어야 한다. 그게 이 승부를 지켜보는 그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저 승부에 정신이 팔려 흑왕의 접근을 막아내지 못했다.
설사 정신이 다른 데 팔리지 않았다고 한들 막아낼 수 있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홍왕이 은밀히 기운을 끌어 올리며 전방의 상황을 주시했다.
숨도 쉬지 못할 긴장감이 장내를 짓눌렀다.
“흑왕?”
강진호의 시선이 검은 붕대를 두른 이에게로 향했다.
대충 동여맨 듯한 붕대가 중간 중간 끊어져 휘날리는 모습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강진호의 시선이 천천히 창왕에게로 돌아갔다.
“이게 네 선택인가?”
“……말……했지?”
창왕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비겁자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주겠다고…….”
그 뒤틀린 미소가 섬뜩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육체의 힘은 다했을지언정, 그의 눈에는 확연히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흑왕이 손을 뻗어 창왕의 어깨를 짚었다.
우우우웅.
창왕의 몸 안으로 흑왕의 기운이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가쁘기만 하던 창왕의 호흡이 안정된다.
강진호가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은 다시 봤는데 말이야.”
“……그거 영광이로군.”
창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건 내 프라이드가 아니야. 내 프라이드는 반드시 승리하는 거다. 비겁하든 비열하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지.”
“…….”
“봐라. 나는 결국 네 목숨을 내 손에 넣었다. 결국은 내가 옳았다, 강진호.”
창왕의 눈빛이 광기를 머금었다.
이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과제.
강진호를 죽일 것.
의미가 없다.
총회고 홍왕이고,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는다. 강진호가 없는 총회는 언제든 쓸어버릴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강진호에게서 총회가 없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강진호는 강진호다.
총회를 이끌든 그 홀로 살아가든 그가 창왕에게 주는 위협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그가 이루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의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강진호를 제거 하는 것.
그리고 그 목표가 지금 그의 목전에 와 있다.
“내가 무인이라도 된 줄 알았나?”
창왕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너의 방식으로 너를 이겨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 말했을 텐데, 나는 나의 방식으로 너를 죽인다고. 그게 네게 있어서 가장 큰 굴욕이 될 테니까.”
창왕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잡았다.
마침내 그가 마왕을 잡아냈다. 그의 모든 것을 걸어서 말이다.
처음부터 흑왕과 함께 강진호를 공격했다면, 홍왕 역시 당연히 강진호를 도왔을 터. 그렇게 된다면 강진호를 반드시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완벽한 결과를 위해서 희생해야 할 것은 희생해야 한다. 그게 설사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말하자면 도박.
일생일대의 도박에 성공한 창왕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네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창왕이 낮게 웃었다.
“너는 강했다.”
“…….”
“요행히 너를 몰아붙였지만, 결국 나는 패했지. 수십 번 다시 싸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결과에 도달하겠지.”
“…….”
“하지만 강진호, 승부라는 건 반드시 강한 이가 이기는 게 아니다. 그걸 몰랐던 게 너의 패착이지.”
강진호가 말없이 창왕을 바라본다.
“이제 알았으니 죽더라도 미련은 없을 것이다. 죽어라. 네 죽음으로 모든 부조리가 끝나겠지.”
그 순간.
강진호가 낮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본 창왕이 얼굴을 굳혔다.
“왜 웃지?”
강진호가 창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걸 묻는군. 우스우니까.”
“……뭐가 우습지?”
“네가 지껄여 대는 말이.”
“…….”
창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가 우습다는 거지?
자신이 한 말 대체 어디에 웃을 부분이 있다는 건가.
“독 안에 든 쥐라도 내려다보는 것 같군.”
“……너.”
그 순간, 강진호가 한 손을 뒤로 뻗었다.
우우우웅.
그리고 그 손짓에 공명하듯 뒤로 튕겨 날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청루가 제자리에서 붕 떠오르더니, 가공할 속도로 강진호의 손으로 날아온다.
덥석.
강진호가 청루를 움켜잡고는 창왕과 흑왕을 바라보더니, 굶주린 늑대처럼 이를 드러냈다.
“계속하자고.”
창왕의 눈이 순간적으로 떨려온다.
‘계속하자?’
더 싸우자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
창왕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허세?
아니다.
허세라는 건 누군가를 속여 이득을 볼 수 있을 때나 떠는 것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허세를 떠느니, 차라리 살려 달라고 머리를 처박고 비는 쪽이 백배는 더 낫다.
강진호는 정말 싸울 셈이다.
저 몰골이 되어서도.
“…….”
지금까지 강진호라는 존재로 인해 수 없는 압박을 받아온 창왕이다. 하지만 이 한마디는 창왕으로 하여금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죽여!”
창왕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그건 고함이라기보다는 겁에 질린 비명에 가까웠다.
“죽여, 흑왕! 이자를 당장!”
창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흑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본다.
도무지 사람의 꼴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하다 못해 오싹하다.
검은 붕대로 칭칭 감긴 흑왕의 입가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달라지지 않았군.”
그 겉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명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강진호가 자신도 모르게 흑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고개를 돌린 강진호조차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일까?
왜 그가 순간적으로 흑왕에게 정신을 빼앗긴 걸까?
흑왕과 강진호의 눈이 서로 마주친다. 하지만 창왕은 두 사람이 왜 서로를 바라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장 죽이라…… 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창왕이 그야말로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흑왕이 움켜잡은 어깨에서부터 검붉은 핏줄이 마구 꿈틀대며 피부를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부릅뜬 눈이 찢어져 말라 버린 피가 방울져 흘러내리고, 더 이상 벌릴 수 없이 벌어진 입이 절규를 내뿜지만, 그 절규는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못했다.
“끄…… 끄으…….”
신음이라 하기에도 미약한, 간헐적인 숨소리만이 그 목을 겨우 벗어날 뿐이다.
“끄윽…….”
창왕의 고개가 부들부들 떨리며 흑왕에게로 돌아간다. 흑왕이 그런 창왕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자신의 내부를 모조리 파괴해 버린 흑왕의 기운이 회수되는 걸 느낀 창왕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왜?”
“궁금한가?”
창왕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덜덜 떨리는 그 턱이 그가 느끼는 감정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제안은 나쁘지 않았어.”
“…….”
“누구라도 네가 내민 제안은 받을 수밖에 없겠지. 마왕, 그리고 약해 빠진 홍왕을 모조리 정리할 수 있으니까.”
흑왕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흘러나온다.
“네놈과 세상을 나눠 가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너 따위야 언제든 죽일 수 있으니까. 너 역시 그렇게 생각했겠지. 기회를 봐 나를 정리하면 된다고.”
낮은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흘러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말이야…….”
흑왕이 창왕의 귓가에 자신의 얼굴을 대고 작게 속삭인다.
“나는 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죽는 걸 원하지 않아.”
“…….”
“너는 스스로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결국은 실패하기 마련이지. 그래…….”
흑왕이 더없이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바로 나처럼.”
강진호의 눈이 흑왕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왜.
왜 그가 이런 느낌을 받는가. 어째서.
“네가 죽는 이유는 하나야.”
흑왕이 키득대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순식간에 그 두 눈에 휘몰아치는 광기와 함께 씻은 듯 사라졌다.
“네까짓 게 감히 누구를!”
콰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흑왕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처럼 검은 기운이 창왕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창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절한 비명 소리가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창왕이 바닥을 구르고 발버둥을 친다. 마치 불에 타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끄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얼마나 힘을 줬는지, 힘줄이 모조리 피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몇 남지 않은 손톱이 바닥을 긁어 대며 뿌리째 뽑히고, 전신의 근육은 연신 경련을 일으킨다.
“끄…… 끄으…….”
그리고 이내 발버둥을 치던 창왕이 더 이상 발버둥 칠 힘조차 남지 않았다는 듯 눈을 까뒤집은 채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하지만 강진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에도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저건 고통이 잦아드는 이의 반응이 아니라 고통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이의 반응이다.
이윽고…….
“버러지 놈이.”
그 꼴조차 보고 싶지 않다는 듯 흑왕이 발로 창왕의 머리를 짓밟았다.
퍼석!
섬뜩한 소음과 함께 창왕의 머리 위가 깔끔하게 사라진다. 가만히 머리 없는 창왕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흑왕이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본다.
“할 말은 무척 많지만…….”
그의 낮은 웃음이 강진호의 귀를 파고든다.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
강진호의 눈은 오로지 흑왕의 손끝에 피어난 검은 기운밖에 보지 못했다.
마기(魔氣).
저건…….
저건 틀림없는 마기다.
흑왕이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공수를 취한다. 그러고는 천천히 강진호를 향해 내밀었다.
포권.
옛 중원에서 상대에게 예의를 표하는 인사법.
“우선은 그 몸부터 추스르시길, 나약해진 마존이여.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검이시여.”
“너…….”
흑왕이 손을 뻗는다.
쿠웅!
강진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충격에 의식을 잃어가는 그의 눈에 허공에 떠오른 청루를 움켜잡는 흑왕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흐려지는 의식의 끝으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제 것이니 가져가지요. 다시 만날 때까지 강녕하시길.”
암전되는 세상을 느끼며 강진호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청……마…….”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더없이 검게.
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