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86
#1785.
격돌하다 (5)
세상이 흐릿하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 모호한 세계 속에서 강진호는 그저 부유하듯 자신을 내려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강진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간다.
청마(靑魔).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교주님?”
강진호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강진호가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앞을 바라본다.
뭔가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꿈.
그래, 꿈이다.
이뤄질 리 없는 꿈.
그걸 알면서도 이런 꿈을 꾼다는 건 아직 그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여전히…….”
청마가 살짝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 눈빛을 본 강진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청마.”
“예, 교주님.”
“너는 어째서 나를 돕는가.”
청마가 그 자리에 부복하며 외쳤다.
“교주님이야말로 마도가 오랫동안 꿈꿔온 마도천하를 이룰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강진호의 가라앉은 눈이 부복한 청마의 등에 꽂혔다.
그가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청마는 항상 같은 답을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저 대답이 공허하게만 들린다.
“마도천하라…….”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왜 몰랐을까?”
“……예?”
강진호가 가만히 청마에게 시선을 준 채 입을 열었다.
“마도천하, 마도천하. 누구나 입에 달고 지껄이는 말이라 흘려듣기만 했지.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이상하지.”
그의 눈이 좀 더 날카로워진다.
“네가 그런 허황된 말을 진심으로 믿을 리가 없는 것을.”
“…….”
세상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은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떠한 압제도, 어떠한 힘도 세상을 원하는 대로 이끌어갈 수는 없다.
강진호도 아는 것을 청마가 모를 리 있겠는가.
“청마.”
“……예, 교주님.”
“너는 무얼 하려는 거지?”
청마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는…….”
“어설픈 변명은 집어치워라, 청마.”
강진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넌 뭘 하려 했지?”
청마가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조아렸다.
침묵.
더없이 묵직한 침묵이 흐른다. 이윽고 청마의 낮은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깨트렸다.
“교주님.”
그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어찌하여 제게 그것을 물으시나이까?”
“……무슨 의미지?”
청마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익숙한 얼굴.
하지만 낯선 얼굴이다.
“저는 그저 교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모두 이루려 했을 뿐입니다.”
“…….”
“교주의 직을 원하시기에 그 직을 가져다 바쳤고, 싸우기를 원하시기에 이기는 길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저들을 정복하기를 원하시기에 그들의 목에 가시 밧줄을 걸어 교주님의 앞에 무릎 꿇렸고, 세상을 발아래 두기를 원하시기에 그 길을 닦아드렸습니다.”
청마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된다.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모든 것은 마존의 뜻대로. 교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는 그저 따르고 모든 것을 바쳤을 뿐입니다.”
“…….”
“제가 뭘 하려 했는지 물으셨습니까?”
청마의 눈이 강진호를 직시한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교주님. 그건 제게 물으실 말이 아닙니다. 그건 교주님께 물어야 할 말입니다.”
“…….”
“무얼 하고 싶으셨습니까?”
청마의 눈이 불타오른다.
언제나 냉정하게 그를 바라보던 시선이 기이한 열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무얼 하고 싶으셨습니까? 무얼 위해 싸우고, 무얼 위해 저들을 짓밟으셨나이까? 대체 무얼 위해?”
“나는…….”
“그토록 싸우고 또 싸워 쟁취한 것을 어째서 모조리 내려놓으려 하셨나이까? 그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교도들의 희생은 당신께 무슨 의미였습니까? 마도천하…… 아니, 교주님의 천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제 삶은 당신께 무슨 의미였나이까?”
청마가 일그러진 얼굴로 강진호를 노려본다.
“이 모든 것이 당신께는 그저 유희였을 뿐입니까?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소망도, 당신을 위해 충성을 바친 이들의 절규도 당신께는 들리지 않으십니까?”
청마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그의 몸이 점점 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을 배반했나이까?”
“…….”
“아니! 배신한 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모두를 저버리셨습니다. 교의 모든 것을 걸어 천하를 도모하려는 그 목전에서 발을 빼버린 당신께서 우리를 배반한 것입니다!”
강진호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피로 물든 청마의 얼굴이 점점 기괴하게 뒤틀린다.
“왜?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
“교주시여!”
“…….”
“마존이시여!”
강진호의 입술이 살짝 떨린다.
“나는…….”
그 순간.
화아아악!
청마의 몸 주위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붕대가 청마의 몸을 친친 감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을 붕대로 전신을 감싼 청마가 입가를 비틀었다.
“강녕하시옵소서, 배덕자시여.”
그의 몸에서 검은 붕대가 수도 없이 뿜어져 나온다.
검고, 검고 또 검은.
이윽고 세상이 검게 물들어간다.
그 끝없이 검은 세상에서 청마…… 아니, 흑왕의 목소리만이 끝없이 메아리친다.
“강녕하시옵소서, 배덕자시여.”
* * *
강진호가 눈을 번쩍 떴다.
“윽…….”
그와 동시에 그의 입술이 절로 일그러진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이 천하의 강진호조차 움찔하게 만든다.
이마에서 배어 나온 식은땀이 턱 끝을 타고 떨어진다. 강진호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하얀 붕대로 친친 감겨 있는 꼴이, 미라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살긴 살았군.”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청마.”
강진호의 얼굴이 복잡한 표정을 머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감회를 느낄 여력도 없이 머릿속은 순식간에 흑왕의 존재로 가득 찼다.
“이건 제 것이니 가져가지요. 다시 만날 때까지 강녕하시길.”
“내 것이라…….”
청루.
그건 강진호가 청마에게 하사한 검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네게 준 것이다. 그러니 다시 가져가야지.”
두 번째 삶에서 그가 죽던 순간.
그는 청마의 가슴에 청루를 박아 넣으며 그 말을 남겼다. 그 말이 흑왕이 한 말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청마…… 흑왕…….”
아직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강진호가 입술을 살짝 깨무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초췌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황은?”
“……몸부터 챙기십시오. 죽다 살아나셔 놓고는.”
“안 죽었으니 됐어.”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골치가 아파 죽겠다는 얼굴이지만, 미묘한 안도감이 묻어 나온다.
“창왕은?”
“기억 안 나십니까? 흑왕에게 죽었습니다.”
“……기억난다.”
더없이 생생하게.
흑왕이 뿜어낸 마기는 창왕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아마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강진호를 상대한 한 사람의 무인답지 않은, 더없이 처참한 죽음이었다.
조금의 안타까움을 느낀 강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어디지?”
“아직 중국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겠지.”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강진호는 부상을 입고 기절해 버렸고, 창왕은 죽었다. 남은 창왕계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을 것이고, 총회 역시 흑왕계의 공격이 벌어질까 전전긍긍했겠지.
강진호의 궁금함을 풀어주겠다는 듯 이현수가 입을 열었다.
“일단 수습은 어느 정도 했습니다. 창왕의 죽음이 확인된 순간, 군대도 뒤를 보지 않고 빠져 버렸고, 창왕계 역시 저항을 멈췄습니다. 반쯤은 도주했고, 남은 반은 순순히 투항했습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그만큼이나 창왕 하나가 저들에게서 차지하고 있던 비중이 거대했다는 의미겠죠.”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천하를 거의 지배하기 직전까지 갔던 마교도, 강진호의 죽음과 동시에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해 버렸으니까.
당시 마교에 대한 강진호의 지배력도 대단했지만, 청마와 그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창왕의 지배력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잃은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지.’
창왕이 존재할 때의 창왕계는 강대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지만, 창왕이 사라지는 순간 생각하기를 그만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현수 역시 그걸 노리고 어떻게든 창왕을 찾아 죽이려 한 것이니까.
“목적은 달성했군.”
“더럽고, 찝찝하고, 뒷맛이 너무 써서 사탕이라도 물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우리가 이겼습니다.”
“……그거, 축하지?”
“그렇다고 해두죠.”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원하던 결말을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뭐였을까요, 그놈은?”
“…….”
“왜 창왕을 공격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회주님은 짐작 가시는 바가 있습니까?”
강진호가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짐작 가시는 바는 있구요?”
“아직은 확실치 않아.”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호가 굳이 그에게 숨기는 게 있을 리는 없으니, 이건 기다리다 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홍왕이 전 방위로 움직여 중국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음…….”
“차이커창은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쥐기 위해 북경으로 떠났습니다. 짜증 나는 놈이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으니 곧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
“중국은 곧 안정됩니다.”
안정이라…….
왜일까?
그 안정이라는 말이 이리도 뜬구름 잡는 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마스터는?”
“도주했습니다.”
강진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이건 저희 쪽 실수이기는 합니다만…….”
이현수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 상황에서 마스터를 추적할 정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지.”
얻어맞아 기절한 놈에게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알 것 같다.
“정리가 끝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예. 승리했으니까요.”
강진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현수가 후다닥 강진호에게 다가가 그를 꾹 누른다.
“……왜?”
“쉬십시오.”
“이제 괜찮아.”
“차라리 얼른 회복하고 전면에 나서주십시오. 회주님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사기가 떨어집니다.”
그 말을 들은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
“하루 내에 회복하지.”
“쉽지 않을 겁니다. 사부님 말로는 몸에 성한 곳을 찾는 쪽이 더 빠르다더군요.”
“그렇긴 한데…….”
이현수가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렸다.
“쉬십시오. 저도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문을 향해 걸어간 이현수가 문고리를 움켜잡고는 멈칫했다.
그러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회주님.”
“음?”
“전쟁이 끝난 겁니까?”
그 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일단은.”
강진호의 대답에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간다.
탁.
홀로 남은 강진호가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끝이라…….”
“다시 만날 때까지 강녕하시길.”
“……그럴 리가 없지.”
어둠이 그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