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87
#1786.
혼란하다 (1)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로군.”
평화로워 보이는 바깥의 광경을 바라보며 위긴스가 커피를 입가로 가져갔다.
커다란 전면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춰 오고, 커피 향은 더없이 향긋하다. 하지만 위긴스의 내심은 편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전쟁이었다.
군이 동원되고 지형이 바뀌었다. 아무리 열심히 통제를 한다고 해도 모든 눈을 피하고 모든 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거짓말 같군.’
그 기나긴 밤이 지난 뒤에도 세상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어디에도 간밤의 일을 입에 올리는 이가 없고, 심지어 인터넷마저 조용하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국가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산불에 군 훈련, 소방 병력의 출동이라…….”
이 상황이 과연 그런 말로 덮일 수 있는 상황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세상은 위긴스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개개인조차 어이없을 정도로 비합리적일 때가 있는데, 그 개인이 모인 조직이야 굳이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가 씁쓸하게 창밖을 바라볼 때, 문이 열리더니 안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위긴스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초췌해 보이는군.”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도 나는 커피 한잔할 여유 정도는 있지.”
“그리 부럽지는 않네요.”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그의 건너편에 앉은 이현수가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현수가 눈을 확 찡그렸다.
“전쟁은 할 때보다 끝나고 나서가 더 지랄 맞은 것 같습니다.”
“매번 느끼면서도 매번 언급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군.”
위긴스가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어떤가?”
“개판이죠.”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항복한 창왕계 놈들은 대충 구속해 뒀습니다.”
“제압은?”
“그 많은 놈들을 무슨 수로 제압하겠습니까? 적당히 가둬놓는 시늉을 해놓고 말을 잘 듣길 바라야죠.”
위긴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전쟁사를 돌아보면 종종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포로를 잡았다가 되레 당해 군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 총회가 딱 그런 경우였다.
“배가 터져 죽을지도 모르겠군.”
“그 경우는 없길 바라야죠.”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도주한 놈들은…… 추적을 하긴 해야 하는데, 솔직히 여력이 없습니다.”
“그건 우리의 역할이 아니지.”
승리했다고는 해도 총회가 중국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건 모양이 좋지 못하다.
자신들은 이곳을 지배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
물론 강진호의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라도 태도를 달리하겠지만, 강진호 역시 중국의 지배권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쉽긴 하지.’
물론 이 승부의 결과로 총회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물론, 중국 무인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홍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뭐든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지.”
위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셰계의 평화를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전 세계를 누비던 위긴스다. 그런 그가 승리한 땅을 집어삼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가 얼마나 변해 버렸는지를 실감하며…….
‘아니겠지.’
위긴스는 알고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과 지위에 따라 자신을 숨길 뿐이다. 위긴스는 처음부터 그런 인간이었고, 이제 그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된 것뿐이다.
“그걸 좀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예?”
“아무것도 아닐세.”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창왕계는 완전히 사분오열된 건가?”
“머리를 잃은 몸뚱아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게 다 창왕, 그 멍청한 놈이 창왕계를 과하게 주물러 댄 덕분이죠.”
창왕과 멍청함이라는 말은 딱히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극한의 이기주의자인 거죠.”
“음, 그게 무슨 소린가?”
이현수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창왕쯤 되는 놈이 자기가 없어지는 순간, 창왕계가 어떻게 될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알았겠지.”
“하지만 굳이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없던 거죠. 창왕에게 있어서 창왕계라는 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족에 불과하니까요. 그가 없는 창왕계의 사정을 헤아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강진호와 창왕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강진호는 총회를 강하게 만드는 동시에 총회를 자생시키려 한다. 그가 없어도 총회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총회를 나간 이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총회 자체적인 수익 모델을 확립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닌 것이다.
“창왕이 부족한 게 아니지.”
위긴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지독한 상황에서 거기까지 생각하는 로드께서 이상한 거네.”
“그건 공감합니다.”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여하튼 곧 정리가 될 겁니다. 달아났다고는 해도 다시 모일 구심점이 없으니까요. 놈들을 정리해 이끌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원래 독재자는 이인자를 만들지 않는 법이죠.”
“그렇지.”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창왕은 다른 이의 도움이 의미가 없는 이였으니까.
‘여하튼 지독했지.’
총회는 물론이거니와, 강진호를 저렇게까지 몰아붙인 적은 이제껏 없었다. 과거에 절대적인 벽이라 느껴지던 홍왕조차도 이토록 힘겨운 상대는 아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결과야.”
위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척이나 힘든 싸움이지만, 우리는 결국 창왕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네.”
그 창왕을 제거한 건 정확히 말하자면 흑왕이지만, 그런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창왕이 죽고, 그 공백을 지금 홍왕이 착실하게 접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 중요한 건 결과죠.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이를 놓쳤습니다.”
위긴스의 눈이 찌푸려렸다.
“마스터 말인가?”
“그렇죠.”
이건 위긴스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막았어야 하는 건데…….’
그 상황에서 마스터의 도주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위긴스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긴스는 강진호의 위기에 눈을 빼앗겨 마스터에게서 시선을 떼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실책.
“그런 표정 하지 마십시오. 그 상황에서 마스터 따위에게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위로가 안 되는군.”
“위로가 아니라 그냥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이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실수…… 글쎄요. 이걸 실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실수라고 해두죠. 여하튼 회주님의 입버릇이 있죠.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중요한 건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은 좀 다르네요. 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말을 돌려 하는 버릇을 좀 고칠 필요가 있어. 동양인들 중에서도 넌 특히 심한 편이지.”
“그렇습니까? 저는 나름 직설적인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필요할 때만 그렇겠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위긴스가 자수하듯 입을 열었다.
“결국은 내가 유럽으로 가야 한다는 거로군.”
“지금 당장은 다른 수가 없습니다.”
마스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총회에게도 강진호에게도 딱히 위협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마스터가 아니라 바로 원탁이니까.
“솔직히 나는 이번 일로 원탁의 효용에 조금 의문이 생기기는 했네. 먼 곳의 동맹은 막상 필요할 때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느낌이란 말이지.”
“저희가 휘둘린 탓이죠.”
“그건 그렇지만.”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가 원탁으로 가 그곳을 다시 장악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원탁을 다시금 정비해야 한다.
“저는 그것보다는 다른 걸 느꼈습니다.”
“……그게 뭔가?”
“결국 외인은 외인이다.”
위긴스가 미간을 좁힌다.
“믿을 수 있는 내부인이 아니고서야 언제든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약하군.”
위긴스가 혀를 찼다.
이현수는 지금 그에게 원탁을 장악하고 지배하라는 권유를 하는 중이었다.
“그 마스터를 대신해서?”
“대신하는 게 아니죠.”
“……그럼?”
“이제부터 사부님이 원탁의 마스터가 되시는 겁니다.”
위긴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
“지금이니까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정말 고약하군.”
총회를 만나 그 꿈을 접은 위긴스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평생 꿈꾸던 것을 과감히 내려놓았다.
그런데 설마 이제 와 다시 마스터의 자리를 노리게 될 줄이야.
“영국과 총회의 지원이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겁니다.”
“어렵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식은 죽 먹기겠지.”
“예, 그렇죠.”
이현수가 씨익 웃는다.
“남자는 과감할 때가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다 늙어서 남자는 무슨.”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총회의 안전과 잠재적 불안 요소의 제거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꿈을 이뤄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때리지나 마십시오.”
“그건 장담 못 하겠군. 노인을 너무 부려먹는 것 아니야?”
“이사님들 중에서는 어린 축 아니십니까?”
“끄응.”
위긴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기왕 장악하시는 김에 확실하게 해주십시오. 조금 전에 말하셨듯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일일이 동의를 구하고, 상대에게 대책을 일임하는 방식으로는 막상 필요할 때 써먹기가 어려우니까요. 시스템을 정비하고 원탁을 완전한 총회의 수족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꽤 노골적이 됐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이현수의 말에 위긴스가 침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라…….’
흑왕.
그를 말하는 것이다.
그 말에는 위긴스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정보가 너무 없어.’
나름 서로를 견제하며 충돌하던 홍왕이나 창왕과는 달리 흑왕의 존재는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그가 대체 뭘 원하는 것인지,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인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왜 거기서 그냥 물러난 것일까?”
“…….”
“모르겠군. 도통 모르겠어.”
위긴스가 슬쩍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회주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시든가?”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뭔가 짐작가는 바가 있는 것 같은 눈치시긴 한데…….”
이현수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캐물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위긴스가 알고 있는 강진호라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말을 해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믿는 수밖에 없다.
“묘하군.”
위긴스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더없이 평화로운 세상에 그의 눈에 들어온다.
“이제 겨우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발목이 늪에 잠겨드는 느낌이다.
너무도 깊어 빠져나갈 수 없는 늪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