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98
#1797.
돌아보다 (2)
“후욱…… 후욱, 후욱.”
거친 숨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콰득.
심장에 박아 넣은 검이 뒤틀리며 이미 식어버린 시체를 들썩이게 만든다.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섬뜩한 광경이겠지만, 이건 딱히 죽은 이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저 바닥에 닿은 검조차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할 만큼 지쳤을 뿐이다.
욱신.
길게 갈라진 팔뚝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진다. 조(爪)가 할퀴고 지나간 옆구리는 세 줄기의 긴 자상이 나 금방이라도 내장이 쏟아질 것 같고, 부러진 발목은 그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해 제멋대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상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부상을 입은 대가로 다섯 마두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었으니까.
더없이 고통스럽게 말이다.
“……저놈이 또 살아남았군.”
“지긋지긋한 놈.”
“중원에서 교로 귀의한 놈이 이토록 높이 올라온 건 처음이 아닌가. 보통은 다들 쥐 죽은 듯이 숨만 붙어 있기 마련인데.”
“저리 독한 놈이니 강호공적이 되어 여기까지 도망쳤겠지.”
강진호.
아니, 이곳에서는 적귀(赤鬼)라고 불리는 이가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겨우 고르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피에 젖어 붉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드러난다.
그건 사람의 눈이라기보다는 숫제 짐승의 눈에 가까웠다.
위엄 넘치는 범의 눈도 아니고, 여유로운 용의 눈도 아니다. 굶고 또 굶어 아사하기 일보 직전이 된 승냥이의 눈이 딱 저럴 것이다.
그 눈빛을 받은 이들이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적귀가 고개를 내려 자신의 검을 바라본다.
정중앙에 크게 금이 간 검은 더는 검으로서 가치가 없었다. 상대의 심장에서 뽑아낸 검을 바닥에 내팽개친 적귀가 상대의 손에 잡힌 칼을 잡아당긴다.
하나 죽어 굳어버린 시신은 손에 잡은 물건을 쉽사리 내놓지 않았다. 적귀가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고는 칼을 잡은 채 굳어버린 시신의 손을 짓밟는다.
우드드득.
섬뜩한 뼛소리와 함께 손이 으스러진다.
그 틈을 타 칼을 빼낸 적귀가 시체의 허리춤에 달린 칼집까지 뜯어내고는 칼을 밀어 넣는다.
그런 후.
절뚝.
발목이 부러진 다리로도 용케 걸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적귀가 절뚝이며 멀어지는 것을 본 이들이 눈을 찌푸리며 쓰러진 인물을 바라보았다.
“귀혼부(鬼魂斧)까지 당할 줄이야.”
“벌써 저 적귀 놈에게 당한 이가 몇이야?”
“모르긴 몰라도 백은 한참 전에 넘었지.”
노골적인 적의.
그리고 미묘한 두려움.
적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었다.
중원의 추적을 피해 교에 귀의하고도 교의 설법에는 별 관심이 없는 이방인에게 호의를 보일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거슬리는 놈.
강자가 곧 법인 마교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했다. 수많은 이들이 적귀에게 시비를 걸었다. 때로는 비슷한 실력자가 생사결을 걸었고, 때로는 적귀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대마두와의 승부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살아남은 이는 적귀였다.
“……진짜 명줄이 질긴 놈이군.”
“다른 놈 같았으면 벌써 열 번은 죽었어. 오늘만 해도 보라고, 귀혼부가 어디 적귀 따위에게 당할 이던가. 그런데 다른 이들과 같이 합공을 했는데도 적귀 하나를 못 당해서…….”
사람은 자신의 이해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면 우선은 경원시한다.
그러고는 점점 두려워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적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함과 공포심이 떠올라 있었다.
“이러다가…….”
누군가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적귀가 마(魔)의 칭호라도 받는 것 아닌가?”
“어림도 없는 소리!”
그 말에 바로 발작적인 고함 소리가 돌아왔다.
“마라니! 그럼 적귀가 적마(赤魔)가 되기라도 한다는 뜻인가? 지금까지 외부인 출신이 마의 칭호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그야 그렇지……. 하지만 외부인 출신으로 저기까지 간 이도 없지 않은가.”
“그래 봤자야, 그래 봤자!”
“…….”
마교도들이 미묘한 시선으로 적귀가 멀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를 인정하는 이든, 인정하지 않는 이든, 적귀라는 놈이 지금까지 그들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이라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시체나 치우라고.”
“쯧.”
졸졸졸졸.
독한 화주가 쩍 갈라진 상처 위로 부어진다. 술이 상처에 닿는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 올라왔지만, 강진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고통을 참아냈다.
졸졸졸졸.
으스러진 뼈를 맞추고, 부러진 뼈를 바로잡는다. 베인 상처는 술을 부어 소독하고, 깨끗한 천으로 동여맨다.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것을 하지 못해 죽어 나가는 이가 이곳에는 부지기수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에게는 너무도 간단한 상식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기이한 지식이 되어버린다.
만약 강진호가 이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아마 벌써 죽어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망령이나 다름없지.’
죽었음에도 아직 죽지 못했으니까.
그게 망령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꾸우우욱!
상처를 동여맨 붕대를 꽉 조인 강진호가 술병에 남은 화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상처를 입은 이가 술을 마신다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모르지는 않지만, 도수 높은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화끈한 감각이 살인으로 들뜬 가슴을 조금은 진정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또옥.
술병이 이내 바닥을 보인다.
“…….”
강진호가 손에 든 술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피곤하군.’
그리고 지겹다.
싸우고 또 싸운다.
죽이고 또 죽이고, 베고 또 벤다.
이 세상은 그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 이 야만의 대지에서는 상식이 아니게 된다. 아니, 오히려 지독한 무례가 될 때도 많았다.
겹겹이 쌓인 오해는 피를 부르고, 피는 원한을 쌓았다. 원한을 풀기 위해 달려드는 이들에게 맞서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 중원의 끝, 가장 지독한 이들이 모여드는 사교의 땅까지 밀려났다.
‘그리고 이곳에서조차 이방인이로군.’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하기야.
이 세상에서 그가 이방인이 아닐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가 이런 세상이 아니라, 먼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해봐야 누가 믿어줄 리도 없다. 평생 그는 이곳에서 누구와도 뒤섞이지 못한 채 이대로 싸우고 또 싸우다가 죽겠지.
다시 또 말이다.
그럼?
그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때는 정말 죽을 수 있는가? 아니면…….
‘피곤하군.’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부상이 깊기 때문인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다.
그래도 독한 술이 한 병 더 있으면 좋겠…….
휘이익.
강진호가 고개를 홱 돌리고 손을 뻗었다.
턱.
그의 손에 묵직한 술병이 잡힌다.
“필요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강진호가 반쯤 뜬 눈으로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기이한 인상의 사내였다.
아니, 기이하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선 여린 사내는 바깥세상에서는 흔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지독하기 짝이 없는 마인들만 모여 있는 이 마교에서 저런 인상은 확실히 독특했다.
마인이라기보다는 무인.
무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문사.
강진호는 순간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바깥에서는 평범할지도 모르는 이가 이 마교라는 곳에서는 독특한 인상을 가진 이가 된다. 그건 이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강진호와 꽤나 닮아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누구지?”
“청귀(靑鬼)라고 합니다.”
“청귀?”
“예. 당신과 비슷한 이름이지요. 적귀.”
스스로를 청귀라 말한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이내 그 이름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이곳에서 타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다. 아니, 이곳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무슨 일이지? 너도 내 목을 노리러 왔나?”
“저는 오늘 당신 손에 뒈져 버린 놈들처럼 멍청하지 않습니다.”
“…….”
강진호가 살짝 고개를 꺾으며 청귀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당신과 손을 잡고자 왔습니다.”
“……손을?”
“예.”
더 묻지 않았음에도 청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면 당신은 곧 죽습니다.”
“…….”
“이미 당신은 싸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 내에서도 당신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산처럼 쌓일 지경이지요. 당신이 아무리 악운이 있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석 달을 넘기기 전에 갈기갈기 찢겨 개먹이가 될 겁니다.”
술병의 뚜껑을 연 강진호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그러더니 거칠게 술병을 내려놓고는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다 지껄였으면 꺼져.”
“내가 그 술병에 독이라도 탔으면 당신은 지금 죽은 겁니다.”
“…….”
청귀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더없는 무위를 가졌지만, 홀로 설 만한 경험도, 두뇌도 없죠. 결국은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죽고 싶나?”
강진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퍼졌지만, 청귀는 그 목소리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저는 더없는 경험과 머리를 갖췄지만 홀로 설 만한 무력이 없습니다.”
“…….”
“어떻습니까?”
“뭐가?”
“혼자서는 서지도 못하는 병신들이라도 등을 맞댄다면 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당신을 교주로 만들어 드리죠. 그러니 당신은 제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주십시오.”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착각?”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어. 내가 왜 교주가 되어야 하지?”
“착각은 그쪽이 하고 있습니다.”
“……뭐?”
청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교의 교주라는 자리는 되고 싶다고 되는 자리도 아니고, 되기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싸우고 또 싸워 이윽고 더는 싸울 이가 없어지면, 그때 이미 교주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될 겁니다.”
“…….”
“어차피 싸울 것 아닙니까?”
강진호가 청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 수 없다.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지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어차피 싸울 거라면 조금 영리하게 싸우게 해드리죠. 그럼 아마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당신의 삶도 조금은 흥미롭게 바뀔 겁니다. 약속드리죠.”
말없이 청귀를 바라보던 강진호가 씹어뱉듯 말했다.
“다시 말하지.”
“…….”
“다 지껄였으면 꺼져. 목을 잘라 버리기 전에.”
청귀가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양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좋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죠.”
“…….”
“내일 다시 술 한 병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술 한 병이면 목을 건사하는 대가로는 나쁘지 않겠죠.”
청귀가 빙그레 웃는다.
“그러니 내일 다시 봅시다.”
몸을 돌려 멀어지는 청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진호가 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놈.”
하기야.
제정신인 놈이 자신에게 다가올 리가 없지.
강진호가 거칠게 술을 들이켰다.
마치 몸에 밴 짙은 피 냄새를 지워내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