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04
#1803.
평온하다 (3)
찰칵.
담배를 문 강진호가 회주실 밖으로 보이는 총회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더없이 익숙한 광경이지만, 오늘따라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 아마 강진호의 마음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뭔가 거창했네.”
“잘 아시네요.”
강진호가 삐딱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현수가 능글능글한 얼굴로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크으, 같이 고민해 다오! 크으!”
던질까?
아무리 이현수라지만 여기서 창밖으로 던진다고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강진호의 어깨가 움찔움찔하는 걸 본 이현수가 웃겨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재빨리 진정시키며 정색했다.
“멋졌습니다, 회주님.”
“이제 와?”
그런다고 네가 무사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설마 회주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이건 진심이었다.
때때로 강진호가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장 코앞에 닥친 일에 대해서였을 뿐이다. 이렇게 먼 곳을 내다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분명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죠.”
하지만 이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적절한 타이밍이기도 하고요.”
그동안은 너무 정신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그렇게 달릴 수 없다.
“달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해도 길이 끝나면 누구라도 멈춰 서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길이 끝났다라…….”
강진호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말이다.
분명 강진호는 한 번 이곳에 도달한 적이 있다. 마교를 이끌고 세상을 거의 지배했다. 청마가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투쟁은 거기서 멈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그와 지금의 자신이 느끼는 건 무척이나 많이 달랐다.
“더는 갈 곳이 없다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현수가 가만히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더는 전력으로 달리는 게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온 건지도 모르죠.”
이번 회의에서도 이미 그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이었다면 쳐들어올 적에게 어찌 대응할 것인가, 그리고 공격을 해야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한참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회원들을 어떻게 훈련시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머리를 맞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그런 부분이 주된 안건이 되지 못했다.
“아직은 아닐지 모릅니다. 아직은 우리가 상대할 이들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상황이 올 겁니다. 더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 때가 말이죠.”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분명 문제가 되는 부분이죠. 지금까지 저놈들은 그냥 열심히 수련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요. 더는 그걸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공허할지.”
“그렇겠지.”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현수가 슬쩍 강진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회주님은 어떠십니까?”
“응?”
“사실 이건 총회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보면 회주님에게 가장 많이 해당되는 내용 같은데요. 더는 무인으로서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의미가 없는 세상이라는 건 회주님에게 더없이 공허한 세상 아닙니까?”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부정은 못하겠군.”
강진호가 긴 무기력에 빠진 이유도 바로 거기에 닿아 있으니까 말이다.
“고민은 좀 했지.”
“그래서 해결되셨습니까?”
“해결이라기는 좀 그렇군. 아직도 여파는 있고.”
과거와는 결국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떤……?”
“내가 정말 무학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인간인가.”
이현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맞는 것 아닙니까?”
“이 새끼가?”
강진호가 주먹을 움켜쥐자 이현수가 양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일단 유머 감각이 없으신 건 확인된 것 같습니다만.”
“몇 대 패고 나면 유머 감각이 생길 것도 같은데…….”
“에헤이, 그러다 사람 죽습니다.”
강진호가 피식 웃고는 주먹을 내려놓았다.
“사실 무기력에 빠졌다는 것도 웃긴 일이지. 그건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강진호는 무인으로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강함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삶은 살지 않았다.
그는 무인으로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 대신 인간으로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의 강함을 원하는 사람 대신 그라는 사람 자체를 원하는 이들과 살아가고 있다.
예전엔 없던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총회의 회주인 강진호가 사라진다고 해도 성심 복지 재단의 이사장인 강진호가 있고, MK의 회장인 강진호가 여전히 남는다.
이 모든 것을 의미 없다 말할 수 있겠는가.
우선 강진호부터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그냥 조금 무서운 거겠지.”
“네? 무섭다고요? 회주님이?”
“내가 무슨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고…….”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강하니까 할 수 있던 일이야. 그런데 이제는 강하지 않아도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조금 겁도 나고 불안한 거지.”
이현수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약한 말을 하는 강진호는 처음 본다.
하지만 이상하지.
담담하게 속내를 풀어내는 강진호를 보고 있으니, 예전과는 다른 강함이 느껴진다. 예전의 강진호를 볼 때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높은 성벽을 보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의 강진호는 너른 바다 같다.
“새삼스럽지만…….”
“음?”
“회주님은 정말 많이 변하셨죠.”
“…….”
이현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 회주님을 보았을 때는 정말 사람 같지도 않았거든요. 이 사람이 나와 같은 말을 쓰고, 나와 같은 밥을 먹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칼로 조각한 사람 같았어요.”
“너무 오버하는데.”
“진짜로.”
이현수가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잖습니까. 회주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변한 거죠. 그리고 앞으로도 변해갈 겁니다.”
어깨를 으쓱한 이현수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 다른 이사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리고 총회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던 이현수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굳이 변해간다는 걸 껄끄러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건 너무 당연한 거니까요.”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빤한 말이네.”
“네. 빤한 말이죠.”
하지만 때로는 빤한 것 속에 진리가 있는 법이다.
누구나 변해간다.
그도, 그리고 총회도, 그의 사람들도 말이다.
* * *
어둠이 내린 도로를 차가 내달린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강진호가 가만히 도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달라진다라…….’
당연한 일이다.
강진호 역시 그러기를 원했다. 두 번째 삶이 끝날 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대단한 삶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강진호는 그리 생각지 않는다.
삶이란 업적이라든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로 결정 나는 게 아니다.
눈을 감는 그 순간에 스스로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는가로 결정이 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진호의 삶은 실패였다. 죽는 그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격렬한 후회조차도 남기지 못했다.
다시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이번 삶은.
적어도 이번 삶만은 눈을 감는 그 순간, 스스로 만족하고 싶다.
부우우우웅.
강진호의 차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차고에 차를 세운 강진호가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찰칵.
담배 끝이 새빨갛게 타들어간다.
가만히 담배 끝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
그에게 있어서 저 하늘은 현대의 상징과도 같다. 두 번째 삶을 사는 당시 어느 곳에서도 별이 가득한 하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던가.
‘웃긴 일이지.’
이제 저 하늘이 익숙해지니 때때로 과거 중원에서 보던, 그 별이 쏟아질 것 같던 하늘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때때로 맑은 공기를 가진 북반도로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사람이란 결국에는 제멋대로군.”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래.
이제는 정리를 해야 할 때다.
“나와.”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딱히 높을 것도 없이 담담하게.
하지만 그 목소리를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가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말이다.
“죽일 생각 없으니 나와.”
작은 정적이 흐르고…….
스스슷.
골목 한중간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인상.
길을 가다 언제라도 마주칠 것 같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다.
그가 강진호를 일별하고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됐어.”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너는 그저 명을 따른 것뿐이겠지. 집 근처에 접근하지 않은 건 칭찬해 주마.”
“당신을 거스르지 말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아주 친절도 하시군.
강진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마의 조종(祖宗)이나 다름없는 그에게서 마기를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강진호에게는 저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의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교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미 한 번 불순물이 섞여 탁해진 마교의 마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 그가 교주로 있던 시절의 마기와도 뭔가 다르다.
신기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오늘은 그 평범한 진리를 몇 번이고 다시 깨닫는 날이다.
“흑왕인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상대가 흑왕이든 청마든, 그게 아니면 귀신이라고 해도 이제는 상관이 없다. 그는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으니까.
“네 주인에게 가서 전해.”
“예.”
“나는 준비가 끝났다. 쓸데없이 애들 보내지 말고 직접 오라고 해. 뭐든 상대해 줄 테니까 말이야.”
사내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한다는 말도 추가하지.”
“그 말 역시 전하겠습니다.”
강진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직접 올 게 아니면 아무도 보내지 말라고 해.”
“예!”
“가봐.”
사내가 깊이 부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천천히 감췄다.
강진호가 빤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때?”
“글쎄요.”
스으읏.
반대편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혈마가 익살맞은 얼굴로 웃었다.
“따라붙으려면 따라붙을 수 있겠지만…… 살아 돌아올 자신은 없습니다만. 가봅니까?”
“됐어.”
강진호가 살짝 손을 내저었다.
“저놈도 네 존재를 알고 있었겠지.”
“예. 그러니 집 주변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겠지요.”
강진호가 옅게 미소 짓고는 몸을 돌렸다.
“잘 감시해.”
“노숙이 조금 길어지는데…….”
“그래서?”
“개미 새끼 한 마리 접근시키지 않겠습니다.”
강진호가 웃으며 집 안으로 향했다.
‘변해야 한다면 변해주지.’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 누구라고 해도 그의 주변을 건드리는 이는 절대 곱게 죽지 못한다는 것.
‘저들이 그걸 안다면 좋겠군.’
아니라면?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며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