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13
#1812.
짊어지다 (2)
“끄응, 혈압이…….”
“나이도 있으신데, 조심 좀 하시지.”
“끄으윽…….”
황정후가 뒷골을 움켜잡았다.
아니, 저놈은 어쩌다가 저리 뺀질뺀질해졌단 말인가. 나이도 젊은…….
아, 젊지는 않지.
“그래서…….”
황정후가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 뭐, 복지 재단인가 뭔가를 제대로 좀 굴려보겠다고?”
“예.”
황정후가 영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예?”
뭔가 호통 치는 말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건만, 의외로 나온 말은 긍정이었다.
“애초에 그거 그렇게 만들어놓고 흐지부지 굴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아, 호통이 있긴 하구나.
“복지고 뭐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한번 시작한 분야에서는 어떻게든 최고가 되어야지! 내가 최고가 되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각오로 일을 해야 하는 법이야. 여하튼 요즘 것들은 뭐든 쉽게 시작하고 쉽게 포기한다니까! 내 때는 그런 걸 상상도 못했어! 상상도!”
강진호가 빙그레 웃으며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조규민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진짜 꼰대가 있다.
천하의 강진호조차도 기겁할 만큼 꼰대스러운 반응이지만,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을 모은다고?”
“예.”
“뭐 어떤 사람들을?”
“이런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스카웃해 볼 생각입니다.”
황정후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생각은 좀 달라.”
“……예?”
“어정쩡하게 업계에 머물러 있는 이라면 굳이 데리고 올 필요가 없고, 확실히 능력이 있는 이라면 올 이유가 없지.”
“연봉을 맞춰주면…….”
“네가 원하는 직원이 돈을 준다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때려치우고 바로 와서 일을 하는 부류인가?”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그건 아니다. 자신의 일에 책임 의식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기술자들은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 그건 혼자 고민한다고 더 발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쉽게 가르치지도 못해. 그래서 어떻게든 스카웃해 올 수밖에 없지. 하지만 이건 분야가 좀 다르지 않은가.”
황정후가 나직하게 ‘내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음…….”
강진호가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정후가 그런 강진호를 보며 히죽 웃었다.
“어설프게 사람을 데려다 놓고 뒤에서 구경하는 걸로 최고가 될 수 있으면 먼저 시작한 놈들이 계속 최고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런가. 영원할 것 같던 철옹성도 언젠가는 무너지는 법이야. 기업이든 재단이든 이끄는 이가 제 발로 뛰지 않으면 썩어 문드러져.”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쯧.”
황정후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할 거면 제대로 해봐. 그게 나라에도 좋은 일이니까. 지금 그쪽으로도 자극이 좀 필요하지.”
“자극이요?”
“열정은 영원하지 않아.”
황정후가 묘한 얼굴을 했다.
“열정이란 건 뜨겁게 타오르다가 차갑게 식지. 사람의 열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가 돌아와야 해. 기업에서 열심히 해 성과를 내는 직원의 직위를 올려주고,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 역시 그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렇죠.”
“하지만 재단이라는 건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과실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 곳이야. 백 명 중에 하나 있는 훌륭한 사람이야 타인에게 돌아가는 과실을 보며 보람을 느낄 수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채 몇 년도 지나기 전에 열의를 잃어버리기 마련이지.”
강진호가 살짝 움찔했다.
뭔가 켕기는 얼굴을 한 강진호가 앞에 놓인 커피를 쭉 들이켰다. 야심차게 보육원을 시작해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적당히 남에게 밀어놓은 강진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황정후가 강진호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여기에서 제일 멍청한 놈이 하는 대처가 뭔지 알아?”
“……글쎄요?”
“왜 열의를 잃냐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사람을 다그치는 거지!”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강진호가 다시 슬쩍 고개를 돌렸다.
황정후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선의라는 건 무서운 말이야. 선의로 포장된 일은 때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지.”
“…….”
“그리고 때로는 선의라는 이름이 그 일을 해 나가는 이들의 고통을 가려 버리기도 하지.”
황정후와 강진호의 시선이 똑바로 부딪쳤다.
“법이 정하는 한도 내에서 이익만 추구하면 되는 기업과는 달라. 그건 꽤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알고 있지?”
“잘 모릅니다.”
“……에엥?”
황정후가 얼빠진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겠죠.”
“…….”
그 황당하리만큼 대책 없는 대답에 황정후가 입을 슬쩍 벌렸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런 황정후의 표정을 보면서도 그저 당당하기만 했다.
“예전에 저는…….”
“음?”
강진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러고는 시원하게 연기를 뿜어낸다.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외의 것은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물론 그전에는 다른 이의 도움조차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만 부여잡고 있다가는 그것밖에 못하게 되는 거죠.”
“호오?”
황정후가 흥미롭다는 듯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깨지며 배우면 되겠죠. 계속 배우고 할 수 있는 걸 늘려가다 보면 제 세상도 넓어질 겁니다.”
그럼 더 많은 걸 보게 되겠지.
더 많은 걸 겪게 될 것이고.
또…….
더 많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적당적당히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제 취향이 아니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제대로 몰아치고 바꿔볼 생각입니다.”
강진호의 눈을 본 황정후가 피식 웃어버렸다.
‘희한한 놈이야.’
황정후는 강진호를 대할 때마다 어려움을 느낀다.
저 젊은 몸 안에 노회한 늙은이가 들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겉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때로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렇기에 지금 저 말이 놀랍다.
한번 자신의 삶을 완성한 사람이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정후가 회춘해 젊어진다고 해도 기업가로서의 자신을 버리고 축구 선수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무리지.’
하지만 강진호는 항상 변화하려 한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가 아직 젊은이의 패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아무리 몸이 젊어 체력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말이다.
그러니 할 말은 하나밖에 없다.
“잘해봐.”
“…….”
“이 일은 잘돼야 하는 일이야. 어떤 분야든 새로운 이들이 유입되어 분위기를 환기해 주지 않으면 적당히 자기들끼리 매너리즘에 빠져 하던 것만 반복하게 되지.”
황정후가 진중한 눈으로 말한다.
“선두에 판을 바꾸는 이가 서면 업계가 바뀌는 법이야. 그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지. 그러니 잘 한번 해봐.”
“알겠습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황정후를 만나 대화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이 노회한 기업가는 강진호가 보지 못하는 방향을 보고 항상 생각지 못하던 이야기를 해준다. 싸움박질이나 하며 삶을 보낸 강진호는 도무지 따를 엄두가 나지 않는 통찰이다.
“다만…….”
황정후가 살짝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럼 MK는 어쩌고?”
“…….”
“그건 내팽개치는 거냐? 그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데?”
강진호가 빙긋 웃었다.
“그건 제가 아니어도 잘 운영…….”
“에라이, 이 꼴뚜기 같은 인간아! 뭐 달라졌나 했더니, 하는 짓이 똑같아! 그게 내팽개칠 분야를 바꾼 거랑 뭐가 다르냐!”
강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바빠서 이만!”
“저, 저?”
강진호가 재빨리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문을 부여잡은 강진호가 황정후를 보며 말했다.
“그럼 조 실장님은 보내주시는 겁니다.”
“나가!”
쿵!
문이 굳게 닫힌다.
황정후는 강진호가 나가 버린 문을 바라보다가 허허 웃어버렸다.
“뭔 사람이 저리 능글맞아졌어?”
조규민이 빙그레 웃었다.
“좋은 거지요.”
“좋은 거지. 좋은 거긴 한데…….”
황정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의 강진호는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어리숙한 면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차가움이 분명 존재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농담이 아니라 악마이거나 저승사자일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런 이가 저리 스스럼없이 농담을 던지는 모습을 보니,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운 기분이었다.
“거, 묘하다니까.”
황정후가 담배를 물고 웃음 짓자 조규민이 마주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응?”
“아들내미가 취직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시라.”
“아들은 얼어 죽을. 나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는데.”
한때는 그런 감정이 없던 건 아니다. 더없이 어려운 상대지만, 또한 묘한 친근감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마음이 다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남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지.’
황정후가 끌끌 웃고는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임자는 어쩔 거야?”
“……저 말씀이십니까?”
“강진호와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겠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하던 일과는 궤가 다르잖아. 복지 재단 일을 자네가 맡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진로를 바꾸는 건 부담일 텐데?”
강진호가 그런 걸 신경 써줄 수 있을 만큼 섬세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조규민이 살짝 머리를 긁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그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
“예. 하지만…….”
조규민이 고개를 들고 황정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모시기로 한 분이 방금 자기가 할 수 있은 일에만 매달리고 싶지 않다고 하시는데, 뒤따르는 입장이 되어서 저는 하던 것만 하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잖습니까?”
“…….”
“능력으로는 따를 수 없을지 모르지만, 패기로는 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젊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황정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못 당하겠군.’
젊음이란 나이에 달려 있지 않다. 스스로 안정을 추구하는 순간부터 젊음은 흐려지는 법이다. 자신의 기반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 용기가 있는 이라면, 그 나이가 몇이라 해도 젊다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열심히 해.”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뭘 작별 인사를 하고 그래?”
“……예?”
“니들이 이사장 자리 주겠다고 사람 꼬셔서 부려먹고는 마지막에 이사장 자리는 강탈해 갔지만, 그래도 명예 이사장인가 뭔가 하는 자리 하나는 줬잖아?”
“…….”
“여기 뭐 너도 없고, 강진호도 안 오면 내가 여기서 할 게 뭐 있나. 새로 사옥 올리면 거기 내 사무실부터 하나 만들어.”
“…….”
“알겠어?”
“…….”
“알겠냐고!”
“……눼.”
무슨 수를 써도 황정후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조규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