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15
#1814.
짊어지다 (4)
“그러니까…….”
강진호의 눈썹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이사들이 다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강진호의 시선을 외면했다. 심지어 언제나 강진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던 장민조차도 민망한 듯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게 없으시다?”
“…….”
“편히 쉬셨다?”
“크흠.”
위긴스가 대표로 헛기침을 했다.
“……로드, 딱히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한 게 없이 놀았다는 말은 조금…….”
“그럼 뭘 했는데?”
“하하…… 커피 한 잔 뽑아 드릴까요?”
약간 기대를 품은 이사들이 다들 이를 갈며 위긴스를 노려보았다.
본전도 못 찾을 거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지.
강진호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뿌득.
손가락 끝이 비벼지며 뼛소리가 울려 퍼진다. 평소에도 자주 보던 광경이지만, 오늘따라 저 모습이 이상하게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이현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회주님, 그게…….”
뭔가 말을 하려던 이현수가 강진호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보고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지퍼 채우고 있자.’
아무리 봐도 지금은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니다.
손끝에서 타오른 불꽃이 담배에 불을 붙인다. 강진호의 입에서 뿜어진 새하얀 연기가 지옥 굴에서 흘러나오는 흑연처럼 천천히 퍼져 올랐다.
“그러니까…….”
오늘따라 유난히 강렬한 강진호의 눈빛이 이사들에게 틀어박혔다.
“회의 이사랍시고 비싼 월급 받아먹고 계신 분들이 그동안 아주 편안하게 잘 노셨다?”
“…….”
“하라고 한 건 한 게 없고, 하겠다고 한 건 아직 안 했고, 해야 할 건 내팽개쳐 두시고?”
“…….”
강진호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아주 믿음직해. 응?”
이현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그러게 내가 진즉에 좀 하라니까!’
사람 말을 안 들어먹어도 유분수지!
회주님이 신경 안 쓴다고 대충대충 할 때부터 알아봤다!
강진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좀 자리를 비워도 알아서 뭐가 돌아가야 안심하고 살지. 잠깐 눈 좀 떼고 있다고 같이 놀아?”
“……아니, 그게 논 건 아니고요.”
“그럼?”
방진훈이 재빨리 입을 다시 닫았다.
나름 뭔가 하기는 했는데, 강진호가 눈 시퍼렇게 뜨고 돌아다닐 때에 비하면 반의반도 한 게 없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거, 그러니까…….”
“다물어, 새끼야! 이 새끼가 어디서 추임새를 넣어?! 시누이도 아니고!”
방진훈이 눈을 부라리며 이현수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현수가 찔끔하여 고개를 슬쩍 돌렸다.
“지도 놀아놓고는…….”
“그건 무슨 모함이십니까! 제가 언제요? 저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이현수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심지어…….
“이현수.”
“넵?”
“너는 뭐 했어?”
“…….”
“뭐가 제대로 안 돌아간다 싶으면 네가 관리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제가요?”
이현수가 고개를 슬쩍 돌려 이사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을요?”
“그럼?”
“…….”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대던 이현수가 이내 빙그레 웃고 말았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회주님.”
차라리 강아지보고 호랑이를 관리하라고 하지. 아무리 이현수가 날고 긴다지만 이 양반들을 무슨 수로 관리하는가.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손 놔버렸을 줄은 나도 몰랐지.’
상황을 파악하면서 이현수도 입이 벌어졌다. 예전이라면 삼 일이면 끝났을 일이 아직도 제대로 해결이 안 되어 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하고 믿은 게 실수였다.
새삼 깨닫는 것.
‘이 양반들, 그동안 발바닥에 땀나도록 일한 게 회주님이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였구나.’
한 분야에 최정점을 찍은 인간이라면 별다른 압박이 없어도 자신의 일쯤은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설마 이 양반들이 이렇게까지 대책이 없었을 줄이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일을 안 했다고?’
강진호 역시 이현수와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대체 그동안 뭐 했는지라도 들어보자.”
강진호의 시선이 바토르에게로 향했다.
“넌 대체 뭘 했냐?”
“음…….”
바토르가 답지 않게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인, 이번 전쟁에서 말이다…….”
“음?”
“그 위쪽에서 백린을 비롯한 몇 가지 화학 불꽃이 몸에 튀었는데…….”
“……그런데?”
“내가 화상을 입었다.”
강진호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꺾였다.
설마하니 바토르가 화상 때문에 앓아누운 것도 아닐 텐데, 말이 왜 이렇게 나오는가.
“그게 뭔 소린데?”
“내가 화상을 입었단 말이다, 주인! 그까짓 화학약품에!”
“…….”
그제야 바토르의 말을 이해한 강진호의 입이 슬 벌어진다.
“이건 참을 수 없는 수치다! 내 육체는 검기에도! 검강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딴 약품 따위에! 이 굴욕을 갚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다!”
사자처럼…… 아니, 성난 곰처럼 포효하는 바토르를 보며 강진호가 얼굴을 감쌌다.
“……일단 진정 좀 해라.”
“주인, 나는 수련이 더 필요하다! 이리된 이상 한동안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시간을…….”
“제발 좀 닥치라고…….”
강진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위긴스는 뭘 했지?”
“로드, 이런 말은 조금 건방질지 모르겠지만, 저를 바토르 님과 같이 취급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조금 건설적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건설?”
“예.”
위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동안 저는 마법의 파괴력적인 측면과 유용성에 대한 부분에 집중해 왔습니다만, 이번 전쟁을 통해 그보다 상대의 마법을 막는 쪽이 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
“그래서 생각난 김에 마력 간섭에 대한 연구를 조금 시작해 봤는데, 이게 생각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하지만 성공할 수만 있으면 지금까지 이어진 마법의 체계에 크나큰 변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일단은 마력 자체를 파동의 영역으로 해석하여 거기에 간섭을 들어가는 건데, 우선은 마나를…….”
“……제발 좀 다물라고.”
신이 나서 설명하는 위긴스를 보며 강진호가 관자놀이를 더욱 꾹 눌렀다.
그가 흐린 눈으로 방진훈을 바라본다.
“저 두 멍청이는 그렇다 치고, 방 이사는 왜?”
“오햅니다, 회주님.”
방진훈이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애들도 나름 고생했는데, 전쟁 끝나자마자 훈련하라 수행해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서 그냥 푹 쉬라고 한 것뿐입니다. 사람이 쉴 만큼 쉬어야 다시 일을 하죠.”
“……그럼 방 이사는?”
“그거 보셨습니까, 그것?”
“뭘?”
“그 창왕 새끼 무공 쓰는 게…… 야, 이게 좀 색다릅니다. 이제까지 봐온 거랑은 좀 궤를 달리한다고 해야 하나? 실전성이 말도 못합니다.”
“…….”
“창왕계 새끼들도 좀 그런 면이 있는데, 이게 마공이랑은 또 다른 맛이 있더라고요. 요걸 좀 접목하면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은데…… 영 뭐라고 해야 하나, 잘 잡히지가 않는다고 할까?”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 새끼 무공 좀 재현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한 번 받아보면 새로 뭐 하나 나올 것 같은…….”
“그래. 목을 분질러 드리면 되나?”
“헤헤, 거기까진 아니고.”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빼는 방진훈을 보니, 땅이 꺼져라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하튼 무인이라는 것들은…….’
산을 모두 올라 버린 강진호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지만, 아직 올라야 할 산이 남아 있는 이들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는데…….
‘아니,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이 무공에 미친 놈들이 전쟁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무학에 매달려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가.
강진호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기야.
전쟁이라는 것은 각자가 갈고닦은 무학을 실전에서 최선을 다해 펼쳐 내는 공간이다. 목숨이 달려 있다는 점을 배제하고 나면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타인의 무학을 두 눈으로 견식할 수 있는 축제나 다름없다.
아마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것을 자신의 실력으로 체화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한창 벌어질 때, 병력의 손실은 벌어지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전투의 경험으로 더 강해지고 정예화되어 간다.
그 경험이라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건 승부를 겪어본다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타인의 무학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아들이냐도 분명히 중요한 요소다.
평소에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강진호가 시킨 일들을 하느라 조금 뒤에 벌어지던 일들이 강진호가 없으니 바로 터져 버린 것이다.
“끄응, 장민은?”
“마존께서 명하신 것은 다 완료했습니다.”
“응?”
강진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장민을 바라보았다.
“교도들의 처리와 새로운 수련 과정에 대한 초안을 잡았습니다. 목숨을 잃은 교도들에 대한 보상은 물론이고, 수거한 그들의 유해도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
“말씀하신 총회의 미래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교의 미래에 대해서는 장로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았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무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이들을 굳이 이곳에 묶어두지 않고 중국으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중국으로?”
“예. 홍왕계가 중국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국으로 돌아간 이들은 홍왕계를 경계하는 동시에 그들의 지역에서 홍왕계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강진호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장민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제일 사고를 쳐 대는 장민이 이럴 때는 이렇게 믿음직할 줄이야.
“……고생했다.”
“저는 그저 마존의 명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일생 다시없을 영광이옵니다!”
아…….
이 양반은 원래부터 무학에 별 관심이 없었지.
다른 이들은 무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이들이지만, 장민에게 있어서 무학이란 그저 교를 융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돌려보내도 괜찮은가? 세력이 줄어들 텐데?”
“문제없습니다, 마존이시여. 어차피 복귀하고 싶어 하는 이는 교에 대한 충심이 깊지 않은 이입니다. 그런 이들을 굳이 본단에 남겨둘 필요는 없습니다. 무의미하게 교도의 수를 늘리고, 과한 전파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로지 신실한 자들만을 이끌어갈 것입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교도의 수를 늘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정말 마음에 든다. 장민이 이제 상황이 안정됐으니 마교도들을 더 받아들이고 세력을 확장하겠다고 나서면 어찌할 것인가 때문에 머리가 아프지 않았던가.
그런데 제 스스로 나서서 저렇게 말을 해주다니.
강진호가 흐뭇하게 웃었다.
‘반면에 저것들은…….’
강진호가 눈을 부라리자, 이사들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니, 저 영감은 왜 갑자기 저래?’
‘자기 혼자 살겠다고!’
‘치사하게!’
강진호가 이사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무학 좋지. 아주 좋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
“그런데 그럴 거면 혼자서 산에 처박혀서 수련이나 하지, 뭐 하러 여기서 돈 받으면서 일하고 있나? 회가 만만해?”
“……아닙니다.”
“내일 다시 회의한다. 그때까지 제대로 된 결과 못 가져오면 그놈의 수련 내가 직접 지긋지긋할 정도로 시켜주지.”
“…….”
“알겠어?”
“……예.”
강진호의 눈에 시뻘건 기운이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을 본 이사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총회가 깔끔하게 정상화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