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16
#1815.
짊어지다 (5)
“그…….”
이현수가 슬쩍 강진호의 눈치를 살폈다.
‘이상하네.’
조금 전 회의에서 사자후를 토해낸 것치고는 강진호의 표정이 그리 무겁지 않다. 되레 평소보다 조금 더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기…….”
“음?”
직접 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강진호가 무슨 일이냐는 듯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화나신 것 아니었습니까?”
“화?”
“예.”
“내가 왜?”
“…….”
심드렁한 얼굴을 한 강진호가 손가락을 까딱댔다.
“아니, 뭐, 말하자면 화는 좀 났지. 그런데 그건 거기까지고, 굳이 계속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저기요, 회주님?
예전에는 안 그러셨거든요?
예전에는 한 번 빡치시면 뒤끝이 사흘은 갔는데, 어쩌다가 그리 담백해지셨습니까?
이상하다. 이 양반이 이런 양반이 아닌데…….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고.”
강진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자, 이현수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했다.
“……솔직히 말씀해 보시죠.”
“응?”
“회주님도 풀어져 노셨는데, 괜히 이사님들만 닦달하려니 민망해서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
강진호의 눈이 이현수를 짓밟았다. 그러자 이현수가 슬그머니 강진호의 시선을 피했다.
“크흠.”
강진호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저 인간은 한 번씩 아픈 데를 쿡쿡 찌른다니까.’
강진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그가 느낀 허무함을 다른 이사들이라고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심지어는 이사들이 아닌 평범한 총회의 회원들도 갑작스레 적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 탈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상심을 유지하는 이현수가 이상한 거지.
“이해하는 건 이해하는 거고, 다잡을 건 다잡아야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강진호가 이현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생각한 게 전혀 없어?”
“끄응, 그게…….”
이현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생각보다 단순한 일이 아니더라고요. 총회 자체를 사업체로 변화시킨다든가 다들 다른 일을 하게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다른 일을 하게 만드는 거죠.”
“그렇지.”
“그런데 이게 또 여기서 둘로 나뉘는데…….”
이현수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무인으로서 수련을 하면서 다른 일을 가질지, 그러니까 투잡을 할지, 그게 아니면 무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지.”
“…….”
“이게 영 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걸 정해도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첫 산부터 난관입니다.”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은 참 옳은 말이다. 하지만 막상 시행하려다 보니 왜 이중걸 같은 인간이나 삼왕계의 괴물들까지 이런 일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않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솔직히 이건 답이 없는 문젭니다.”
“답이 없다고?”
“예.”
이현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냐면 이건 총회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무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양반들이 큰돈 벌어 성공하고 싶었으면 사업을 하고,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으면 공무원 시험을 쳤겠죠. 무인으로 사는 목표가 미래의 안정적인 삶은 아니었을 것 아닙니까?”
“…….”
“심지어는 군인이라는 가장 완벽한 대체 선택지가 있는 상황인데도 산골에 처박혀서 수련하는 양반들입니다. 그런 양반들한테 이제부터 다른 일도 하면서 돈 좀 벌어보자고 하면 이게…… 하∼ 이게 그러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먹히지 않는다?”
“그거죠! 예! 그거죠!”
이현수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물론 회주님이 강제로 시키면 어디 오지에 가서 희귀 동물 잡아오는 일이더라도 군말 없이 하겠죠. 하지만 그게 정말 승복하고 이해해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거죠.”
“음…….”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 이현수가 이렇게 울분을 토하며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답답한 문제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다만…….
“어차피 단번에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
“네 말대로 앞으로도 그저 무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이들도 있을 거고, 다른 삶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
“그렇기는 하겠죠.”
“그럼 거기에서 시작하면 돼. 이제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이들이 뭘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부터 알아봐.”
강진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네 가장 큰 문제가 그거야.”
“예? 제 문제요?”
“그래.”
“제 문제라뇨? 뭐가…….”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살다 보니 알게 되더라고. 대부분의 문제는 노력하면 반드시 답을 찾아낼 수 있지만, 어떤 문제는 뭘 해도 답이 없어.”
“회주님 같네요.”
“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이현수를 노려보던 강진호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그럼에도 반드시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이들이 있지.”
“회주님처럼요?”
“……부정은 못하겠는데.”
사실 강진호에게도 그런 성향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완벽한 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답이 없는 문제를 발견하면 보통 같은 선택을 하더군.”
“……손을 놓는군요.”
“그래.”
이현수는 강진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다. 그가 지금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략을 짜내고 또 짜낼 수 있던 이유는 반드시 답이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답이 없는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면, 이현수가 그토록 머리를 짜낼 수 있었을까?
‘무리지.’
이현수는 자신을 잘 안다.
지금 강진호가 말한 것처럼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을지언정, 안 되는 일을 해내려고 악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걸로 충분했지.”
“…….”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정답을 찾아내지 못해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지.”
이현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이번 일은 지금까지처럼 명쾌한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닐 거야. 하지만 답이 있든 없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지.”
“예, 회주님.”
“노력해. 나도 노력할 테니까.”
이현수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여유가 생기고 달라졌다. 예전처럼 급하지 않고, 조금 더 논리적이 됐다.
이걸 성장이라 불러야 할까?
글쎄, 잘 모르겠다. 비슷한 느낌이지만, 강진호에게 성장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좀 이상하다.
다만, 확실한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람으로서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한 강진호조차 조금씩 더 나아간다.
그러니 이현수도 총회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잘하겠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더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래.”
강진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부우우웅.
담배를 입에 문 강진호가 액셀을 조금 더 세게 밟았다.
‘답이 없는 문제라…….’
이제는 강진호도 안다.
사람은 저마다 저 나름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사소하기 짝이 없고,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한없이 커다랗고 중요한, 그런 문제들을 말이다.
그런 문제들을 짊어지고 조금씩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하루하루 삶을 버텨내며 꿋꿋하게 걷는 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삶, 지금보다 나아진 자신.
‘다를 게 없지.’
더 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무인들이나,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이들이나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다를 게 없다.
강진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그러니 집착하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더는 싸우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는 또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테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람이란 그렇게 평생 동안 드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이다.
“굴러 떨어지지는 말아야 할 텐데.”
강진호가 액셀을 살짝 밟았다.
그의 앞에는 수많은 문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잡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다고 해도, 노력하고 또 대화하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설사 그 길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 헤매는 동안 지금과는 또 다른 것을 보게 될 테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눈앞의 도로가 조금 더 넓어진 느낌이다.
분명 그의 손은 핸들을 잡고 있고, 몸은 운전을 하고 있지만, 그의 의식은 차를 넘어 조금 더, 조금 더 퍼져 나간다.
마치 세상과 동화되듯.
강진호의 입에서 낮은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부우우웅.
길가에 차를 댄 강진호가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의 눈에 불이 켜져 있는 그의 집이 들어온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저 안에 그의 가족들이 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광경을 손에 넣기 위해서 참 먼 길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는 너무도 쉽게 주어지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힘겨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쉽지는 않다.
힘겹게 손에 넣었기에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이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강진호가 깊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이제 말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적천마존이 아니며, 이 세상을 힘겨워하던 강진호도 아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되찾았으며, 또한 과거와는 다른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현세에 강림한 마인은 이제야 현대인 강진호로 완전히 거듭난 것이다.
그러니…….
“딱 적절한 타이밍이야.”
“그렇습니까?”
그의 집 대문 앞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적당하지.”
강진호가 희게 웃었다.
“예전부터 너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으니까.”
사내의 표정이 묘해진다.
미묘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많이 변하셨군요.”
“…….”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경험과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모양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던 당신조차 변하는 걸 보면 말이죠.”
강진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맞군.”
“네. 맞습니다.”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제가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해도 당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겠죠.”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벗어난 사내가 달빛 아래서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강진호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존이시여. 이제야 당신께 문안을 드리는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진호가 사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른 세상인데, 굳이 과거처럼 굴 필요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사내가 환희 웃었다.
강진호가 그 미소를 보며 입꼬리를 뒤틀었다.
저 웃음.
입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눈은 조금도 웃지 않는 저 웃음이 너무도 익숙하다.
“오랜만이다.”
강진호의 목소리가 작게 퍼져 나갔다.
“청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