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17
#1816.
재회하다 (1)
진한 커피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강진호는 말없이 커피 잔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조금 신 듯, 쓴맛이 혀끝을 감돈다. 천천히 커피를 넘긴 강진호가 건너편의 청마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는 좋아하십니까?”
“음료 중에서는.”
“콜라가 아니라요?”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집에서는 콜라를 먹는 편이지. 이런 데서 콜라를 먹는 건 좀 이상하니까.”
청마가 빙그레 웃었다.
“새롭습니다.”
“뭐가?”
“당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게 말입니다. 제가 아는 당신은 타인의 눈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분이셨는데.”
“음…….”
강진호가 살짝 어색하다는 듯 커피를 마셨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니까.”
청마가 흥미롭다는 듯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면 딱히 이상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는 말이지만, 그 말들이 다름 아닌 강진호의 입에서 나온다는 게 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여러 가지로…….”
청마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상황이군요.”
“어떤 점에서?”
“당신과 제가 다시 만난 것도 재미있고, 그곳이 하필 한국에 있는 카페라는 것도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죠.”
강진호가 피식 웃어 버렸다.
사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삶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일이라지만, 이런 경험은 다른 이들은 해보기 힘든 경험일 게 분명하다.
“좋아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예전과는 달리 말이야.”
청마가 빙긋 웃었다.
“글쎄요. 그리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보다 당신과 중원을 횡행하던 그 시절이 조금 더 즐거웠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말이죠.”
“그럴지도.”
강진호가 가볍게 머리를 긁었다.
“흡연실에 좀 다녀오지.”
“여기서 피우십시오.”
“남의 가게에서…….”
“이 가게의 영업은 이미 끝났습니다. 다른 손님이 없는 이유죠.”
강진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준비성이 철저하군.”
“어떤 분 덕분에 몸에 익은 일이죠.”
몸이라는 말은 조금 이상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강진호가 살짝 머뭇대자 청마가 테이블 아래에서 재떨이를 꺼내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한 모양이군.”
“언제나 그랬죠, 언제나.”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그 말투가 강진호를 찔러 들어오는 것 같다.
강진호가 입을 열기 전에 청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결국 사람이란 환경에 적응해 사는 법이죠. 투쟁이 없는 이 세계에서 당신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제게 있어서 무척이나 궁금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
“없는 투쟁을 만들어내 다시 피를 흘리는 나날을 살아갈지, 그게 아니면 굳이 싸우지 않는 삶을 선택해 과거와 결별할지.”
청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감상은?”
“글쎄요.”
청마가 가볍게 자신의 입가를 주물렀다.
과거와는 다른 얼굴임에도 저 유난히 긴 손가락에서 과거 청마와 같은 느낌이 난다.
“그저 과거의 당신과는 너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입니다.”
“다르다?”
“예, 다르죠. 단순히 사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걸 떠나 가치관 자체가 변했다는 느낌.”
청마가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과거의 당신이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할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의 당신이었다면 무엇이든 확실하게 했겠죠. 다시 싸움밖에 없는 세상에 뛰어들어 세상 모든 것을 전화로 뒤덮어 버리든가, 그게 아니면 정말 투쟁과는 관련 없는 삶을 살아가든가.”
“…….”
“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었죠. 어정쩡하게 양쪽 모두에 발을 걸치고…… 설마 당신이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인 줄을 몰랐는데 말입니다.”
청마가 비릿하게 웃었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저 웃음.
충분히 기분이 나쁠 만한 웃음인데도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청마의 웃음은 항상 저런 식이었으니까. 되레 뭔가 그리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이야기가 겉도는군.”
“그것도 좋지요.”
청마가 낮게 웃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정말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 든다면 며칠 밤을 지샌다고 해도 부족하죠.”
“…….”
“그러니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을 기다려 왔습니다.”
청마의 눈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원망, 반가움, 기쁨과 슬픔.
그리고 강진호가 알아볼 수 없는 더 깊은 감정들까지도.
“……그런가.”
강진호가 가만히 청마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그전에 하나만 묻지.”
“예.”
“너는 귀환자인가?”
“…….”
청마가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교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귀환자라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청마가 조금 말끝을 흐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또 하나의 삶을 살아간 이라는 걸 의미한다면 맞습니다.”
“……이해를 못하겠군.”
강진호가 눈을 찌푸렸다.
“과거에 나는 네게 몇 번이고 현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죠.”
“하지만 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그럼 그때부터 나를 속였던 건가?”
“하하하핫!”
청마가 입을 벌리고 쾌활하게 웃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어쩔 수가 없다는 듯 말이다.
“뭐가 우습지?”
“많이 변했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무척이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역시 교주님이시네요.”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강진호는 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청마의 말이기에 강진호는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저 망할 놈은 원래 말투가 저랬다.
딱히 악의도 없다는 게 더 문제였다.
“알아듣게 말해봐.”
“제가 당신처럼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여기시는 게 재미있다는 겁니다.”
청마가 웃었다.
“제가 돌아온 세상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입니다.”
“뭐?”
강진호가 눈을 크게 떴다.
“왜 놀라십니까, 짐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강진호가 벌린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무학의 정점에 오른 이들은 백 년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죽음의 직전에 이르기 전까지는 노화마저 멈춘다.
강진호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고는 하나, 청마 역시 교의 이인자의 자리에 오른 이. 지금의 강진호가 과거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강해져 과거의 무위를 되찾은 것처럼 청마 역시 이른 시간에 극마의 경지에 다시 올랐을 것이다.
아니.
이전에 그가 보여주던 마공을 감안한다면, 그 경지조차 넘어 스스로 마공을 창안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백여 년이라는 시간도, 젊디젊어 보이는 외양도 모두 이해가 간다.
다만…….
강진호는 청마가 그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당연히 강진호와 비슷한 시간대에 다시 태어났을 것이라 생각했다.
새삼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변명도 못하겠군.’
어색한 얼굴을 한 강진호를 보며 청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군요.”
그가 턱을 괴고 강진호를 바라본다.
과거, 교에서 그의 얼굴을 이리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청마뿐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
“여하튼.”
청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살던 곳은 중국. 그것에서도 오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의 오지는 몇 백 년 전과 다름없는 삶을 유지하는 곳투성이인데, 백 년 전이라면 말할 것도 없죠.”
“……그렇지.”
“그렇기에 저는 교주님께서 저와 같은 것을 겪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번씩 헛소리를 해 댄다고 생각했지만, 뭐, 그거야 미친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 아니겠습니까?”
강진호가 눈을 찌푸렸다.
“아아…….”
막 강진호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청마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하도, 비꼼도 아닙니다. 당시의 교주님이나 저나 머리에 마기가 들어차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잖습니까.”
한숨을 내쉰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기에는 그리 즐거운 말이 아니지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으로 돌아와 살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청마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서늘하다.
청마의 말투가 어느 순간 달라져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때, 제가 느낀 그 희열을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교주, 그건 정말 기나긴 기다림이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으니까요.”
거대한 뱀과 같은 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섬뜩하게 만드는 눈빛이 강진호를 향한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 눈빛을 보면서 되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제야…….”
강진호가 이를 드러냈다.
“청마 같군.”
“하하하!”
강진호가 다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고는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찰칵.
강진호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청마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정도는 굳이 도구가 필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게 강진호가 얼마나 이 세상에 적응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담배에 불을 붙인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나를 다시 보고 싶어 한 이유는 뭐지?”
청마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저도 정확하게 설명을 못하겠군요.”
청마가 가슴 한가운데를 움켜잡았다.
“환통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환통?”
“예. 신체가 잘려 없어진 이가 이미 없어진 부위에서 고통을 느끼는 증상이죠.”
청마의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때때로 가슴이 아프더군요, 당신에게 찔린 가슴이.”
살기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
그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청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 간단한 게 아닙니다, 교주. 제가 당신께 가지고 있는 감정은 꽤 복잡미묘합니다.”
청마가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그러하듯.”
“…….”
강진호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강진호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고는 조금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준비해 왔던 만남.
하지만 그 만남의 형태는 그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럼…….”
강진호가 청마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제 와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뭐지?”
“…….”
“되도 않는 소리는 지껄이지 마. 너는 그런 놈이니까. 목적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지.”
청마의 얼굴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러니 지껄여 봐.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말이야.”
강진호의 가라앉은 눈빛과 청마의 차갑기 짝이 없는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된다.
비릿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은 청마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약해진 당신이…….”
“…….”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강진호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나 보군.”
“…….”
“내가 누군지 잊은 걸 보니 말이야.”
강진호의 두 눈에서 광포한 살기가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