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18
#1817.
재회하다 (2)
청마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살기가 금방이라도 살을 갈라내고 뼈를 끊어버릴 것만 같다.
‘이런 부분은 달라지지 않았군.’
우스운 일이다.
그는 자꾸만 과거의 강진호와 지금의 강진호를 비교하려 든다.
달라진 모습을 확인하면 낯설어하고, 과거와 같은 모습을 보면 미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성장하고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다시 만날 의미가 없다는 말을 그 스스로 했음에도 말이다.
‘나 역시 사람이라는 건가.’
멀리서 지켜볼 때는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강진호를 마주하는 순간,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들끓어 오른다.
스스로도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억누르며 청마가 커피 잔을 움켜잡았다.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청마가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청마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잊었다면 제가 지금 당신 앞에 있겠습니까?”
“…….”
“너무 그리 화내지 마십시오, 교주. 전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 안에 여전히 과거의 당신이 남아 있는지.”
“그래서 확인은 했나?”
“글쎄요.”
청마가 미소 지었다.
“하나는 확실합니다. 과거의 당신이 지금과 같은 말을 들었다면 결코 말로 끝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신은 과거보다 어른이 되었지만, 그만큼 얌전해졌군요.”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강진호가 원하던 변화니까.
“목적이나 이야기하라니까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 대는군.”
“저는 맛있는 부분은 가장 나중에 먹는 타입이라 말이죠.”
느물대는 청마를 보며 강진호가 눈을 찌푸렸다.
‘다르군.’
변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건 분명히 청마다. 그건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말투 하나, 동작 하나, 그리고 생각에서까지 과거 청마의 향이 짙게 풍겨온다.
하지만 분명 뭔가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 명확하게 짚어내기는 힘들지만, 분명 뭔가가 달라졌다.
“재회라는 건…….”
“…….”
“재미있는 일이로군.”
“조금 씁쓸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래.”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인 강진호가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본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청마의 얼굴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조금 불공평하군.”
“뭐가 말입니까?”
“너는 나의 삶을 지켜보았지만,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몰라. 심지어 너는 과거에도 네 삶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지.”
“말은 바로 하셔야죠.”
청마가 손을 내저었다.
“제가 숨긴 게 아니라, 교주께서 제게 조금도 관심이 없던 겁니다. 묻지도 않는 일을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한 번도 안 물어봤다고?”
“본인이 본인을 모르시는군요. 과거의 당신은 타인에 대해서는 정말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자신에 대한 관심도 없었죠.”
“…….”
“그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청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눈치를 못 챈 것도 당연하죠. 보통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생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바로 그랬죠. 그런데 당신은 죽음을 겪었음에도 삶에 그리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청마의 시선이 강진호에게 꽂혔다.
“당신이 두 번째 삶을 사는 이였을 거라고는.”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당황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렇겠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청마가 아이처럼 웃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제 말해봐.”
“…….”
“나를 지켜보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말이야.”
청마가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교주.”
청마가 강진호의 담뱃갑을 들고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였다.
“교주께서는 뭔가 착각하고 있습니다.”
“착각?”
“예. 그건 교주니까 할 수 있는 착각이지요. 그런 면에서 교주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의미지?”
“끝도 없이 자기중심적이라는 거죠.”
청마기 짧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는 빙그레 웃었다.
“지금 교주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그런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본인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청마가 아직 길게 남은 장초를 재떨이에 문질렀다. 그에 담배의 중간이 뚜둑, 부러졌다.
“제가 반드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할 거라는 생각? 제가 계획하는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당신과 무언가를 해야 할 거라는 생각?”
“…….”
“그게 협력이든 적대든.”
청마가 어깨를 으쓱하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어린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강진호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교주, 저는 정말 그저 당신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그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나친 관심이로군.”
“인정합니다.”
청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있어 당신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니까요. 당신만큼 제게 강렬한 호의를 끌어낼 수 있는 이도 없고, 당신만큼 저를 증오에 빠뜨리는 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저도 인정하는 일이죠. 다만…….”
뱀과 같은 청마의 눈빛이 강진호를 꿰뚫듯 꽂혔다.
“그뿐입니다.”
“…….”
“그걸로 됐습니다. 혹여 당신이 내게 방해가 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당신은 내게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강진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잘도 지껄…….”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지요. 예전에도 몇 번이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여전히 다른 사람의 말을 안 들으시는군요.”
“…….”
아이를 타이르듯 말한 청마가 재미있다는 듯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약해서 저를 방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과 제가 굳이 적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무슨 의미지?”
“과거의 당신은 뭐랄까…….”
청마의 눈이 조금 아련해진다.
마치 과거의 강진호를 쫓는 듯 말이다. 하지만 막상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굳이 관계가 없더라도 자신 위에 누군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이었죠. 제가 없었다면 당신은 더 강한 이와 끝없이 싸우다가 결국에는 힘에 부쳐 죽었을 겁니다.”
“…….”
강진호는 그 말에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다르죠.”
청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 추구하는 가치는 이미 달라졌습니다. 더는 강함에 집착하지 않고, 더는 무력만을 추구하지 않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또 다른 것과 지키는 것. 그렇지 않습니까?”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건가?”
“반쯤은요.”
청마가 키득대며 웃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죠. 천하의 적천마존이 지키는 것에 집착을 하다니. 목숨을 걸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전쟁 중에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고마움조차 느끼지 못하던 철혈과도 같은 인간이…….”
청마의 차가운 눈빛이 강진호에게 꽂혔다.
“이 작은 나라에서 소꿉장난이나 해 대고 있다니.”
“…….”
청마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 살기는 대상이 없었다. 강진호를 향한 듯하지만, 강진호에게 닿아 있지 않다.
그저 허무하기만 한 살기였다.
“뭐, 좋습니다. 그게 당신이 택한 삶이라면.”
청마가 커피잔을 들어 남은 커피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덕분에 이리 마주해 커피라도 마실 수 있으니 말입니다. 종종 들를 테니, 너무 박대하진 말아주십시오. 제게도 친구라는 게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요.”
“친구?”
“아닙니까?”
“…….”
청마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면 예전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주군으로 모셔야 할까요? 이제 그건 좀 껄끄러운데.”
“내 쪽에서 사양하지. 너 같은 놈은 밑에 둬서 좋을 게 없어.”
“하핫, 진짜 적반하장이시군요. 교주 같은 사람을 모셔서 좋을 게 없는 거겠죠.”
청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이봐.”
강진호가 청마를 보며 말했다.
“뭘 하려는 거지?”
“아실 필요 없습니다.”
“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더 말씀드려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럴 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알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
“제가 하려는 것은 당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당신의 구역에는 발끝도 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럼 우리는 아무런 트러블 없이 추억이나 늘어놓으며 즐겁게 잘 지낼 수 있겠죠.”
청마가 양손을 살짝 벌렸다가 가운데로 작게 모았다.
“과거의 당신은 세상을 넓히는 인간이었죠. 개척자였고, 정복자였고, 또 지배자였습니다. 그런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죽이려 들었겠지만…….”
청마가 빙긋 웃었다.
“지금의 당신은 겨우 이것만 지키면 만족하는 경비견입니다.”
“…….”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죠. 경비견과 좋은 관계가 되는 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개가 지켜야 할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는 거죠.”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믿지 않을 이유도 없죠. 제가 뭘 해도 당신이 결국 알게 될 테니까.”
“…….”
“그러니 이곳에서 그저 지켜보십시오. 당신의 그 작은 세상은 지켜 드리죠. 그러니…….”
청마가 이를 드러냈다.
“거기에서 한 발도 나오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부숴 그 안으로 다시 던져 넣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강진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청마!”
“아, 하나 더.”
강진호가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청마가 선수를 쳤다.
“아까 처음 말한 건 솔직히 거짓말입니다.”
“음?”
“당신이 나와 적대할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순간, 청마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싹.
강진호가 자신도 모르게 소파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우드드득!
소파의 손잡이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으스러진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것도 느끼지 못한 채 부릅뜬 눈으로 청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이 제게 방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청마가 검지를 들어 가볍게 까딱였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이전에 흑왕의 모습으로 보여준 힘조차 전력이 아니었다는 듯, 청마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이 강진호의 전신을 짓누르고 으스러뜨린다.
강진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아, 좀 과했군요.”
청마가 가볍게 손을 저어 기운들을 날려 버렸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기운의 압박에서 벗어난 강진호가 몸을 들썩였다.
“교주, 나의 옛 친구여.”
청마가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한다. 중원에서 예를 표하듯.
“당신을 위해 내가 마련해 둔 새장 안에서 당신의 세상을 지켜내십시오.”
청마가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제 말 명심하시길. 당신과는 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 남은 친구를 제 손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문을 열고 나가던 청마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 그리고 그 소파는 교주께서 변상하십시오. 예전이랑은 다르니 말이죠.”
빙글 웃은 청마가 손을 흔든다.
“그럼.”
그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
멍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던 강진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콰아아아앙!
내려친 테이블이 산산조각이 나 내려앉는다.
“이…….”
이를 갈아붙인 강진호의 손이 분노를 참아내지 못하고 미미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