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23
#1822.
인정하다 (2)
“청마라…….”
위긴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대충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도무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이게 뭔 판타지 영화도 아니고.”
그 말에 바토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그게 마법 쓰는 사람이 할 소리야?”
“말이 안 되는 걸로 따지면 바토르 님 몸이 더하지 않습니까.”
위긴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평범한 이들의 눈으로 본다면 자신들 역시 괴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그들은 평범하지 않기에 바깥세상과 어울려 살지 못하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내력이나 마나 같은 요소는 환상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건 엄밀히 이 세상에 실존하는 구성 요소다.
하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과거에 만난 인연이 현대에도 이어진다라…….”
물론 귀환자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던 이상,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얽힌 귀환자가 중국의 삼왕 중 하나인 흑왕이고, 다른 한 사람이 그 삼왕 중 하나를 잡아 죽인 강진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애도를 표하고 싶군.”
“누구에게 말입니까?”
“창왕에게.”
“…….”
위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창왕이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리 머리가 좋은 이라고 할지라도 흑왕과 강진호의 관계를 미리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강진호와 꽤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그들조차 강진호와 흑왕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창왕의 실수가 아니다. 순전히 어찌할 수 없는 불운이었다.
“지옥에 떨어져 땅을 치고 있겠군. 만약 흑왕과 회주님이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면 마지막에 쓰러지는 건 회주님 쪽이었을 테니까.”
“천벌 받은 거지 뭐.”
방진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이보쇼, 이사님.”
“음?”
“전쟁에 만약은 없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습니까? ‘이것만 했다면’, ‘이것만 했다면’을 일일이 다 따지다 보면 실패할 사람은 없는 겁니다.”
위긴스가 이채를 띤 눈으로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그렇게 나온 거죠. 따지고 보면 위긴스 이사님은 지금 그 자리에 오를 때까지 운이 좋은 적이 없었습니까?”
“……당연히 있었지.”
일단 당장 한국으로 파견되어 강진호의 존재를 눈앞에서 확인한 것부터가 어마어마한 행운이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위긴스는 마스터의 편에 서서 강진호에게 대항하다가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강진호가 원탁에 강림하여 엘더 나이트들을 쳐 죽인 바로 그때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건 아주 작은 우연에 불과하고, 아주 작은 행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작은 행운이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기도 하는 법이다.
“창왕이라고 그 위치까지 올라가는 데 운이 없었겠습니까. 실력이라는 건 그런 거죠. 불운이 쏟아질 때 이겨낼 수 있는가, 행운이 떨어졌을 때 그걸 잡아챌 수 있는가.”
방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창왕은 그게 안 돼서 뒈진 거죠.”
공감이 가는 말이다.
사람들은 불운에 민감하고 행운을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공이라는 것은 반쯤은 행운의 영역에 걸쳐 있기 마련이다.
이 말은 방진훈의 입에서 나온 것답지 않게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안타깝긴 하잖은가.”
“안타깝기는 개뿔이. 생각 같아서는 그 새끼 시체 가져다가 박제를 해버리고 싶은 심정인데.”
“…….”
“그 씨발 놈 때문에 애새끼들이 얼마나 다쳤는지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내가 제대로 싸우다가 다쳤으면 말도 안 해. 불에 타죽고, 약품에 중독돼서 내장 거덜 나고. 아오, 씨, 생각하니 또 열 받네.”
괜한 주제를 꺼냈다고 생각한 위긴스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래서 회주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일단은 상황을 보기로 했습니다.”
이현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흑왕인지 청마인지 하는 놈이 뭘 노리는 건지 모르는 판에 대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도 그렇군.”
위긴스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강적이로군.’
강진호의 평가가 마음에 걸린다.
창왕 이상의 두뇌에 강진호에 버금가는 무력이라…….
“창왕 이상의 두뇌라는 부분이 영 마음에 걸리는군. 내 머리로는 창왕보다 똑똑한 자를 상상할 수가 없어.”
“부류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창왕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타입이지만, 그 청마라는 작자는 희생이나 방식은 완전히 무시한 채 결과만을 얻어내는 타입이라고 하더군요.”
“미학이 없다는 말이로군.”
“예.”
위긴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다시 말해 제일 골치 아픈 타입이지.’
기본적으로 머리를 쓴다는 자들은 자신만의 미학이 있기 마련이다. 창왕 역시 상대의 수를 잃고 그 수를 되받아친다는 것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그게 잘 풀릴 때는 완전히 상대의 손안에서 놀아난다는 느낌에 압도적인 절망감을 선사해 주지만, 때때로는 그 상황 자체에 집착해서 효율을 놓칠 수도 있는 법 아니던가.
하지만 강진호의 말대로라면 청마는 그런 타입도 아니었다.
“신기하군.”
“뭐가 말입니까?”
“그 말대로라면 흑왕은 다소의 희생 따위는 무시하고 결과만을 추구하는 이라는 건데……. 그런 이가 회주님의 존재만으로 지금껏 숨죽이고 있었다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이현수가 고개를 들어 위긴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부님이면 안 그러시겠습니까?”
“응? 그게 뭔 소린가?”
“예를 들어서…….”
이현수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이러다가 죽어서 미래에 다시 태어났다고 칩시다.”
“……뭔 가정이 그래?”
“여하튼 그래서 뭔가를 계획하고 이제 거의 실행 단계에 왔는데, 알고 보니 이 세계에 회주님이 이미 태어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자고요.”
“…….”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
위긴스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강진호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모조리 성공시키며 여기까지 왔으니까.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과 실력을 갖춘 상태라고는 해도 그 불안감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거, 듣고 보니 이상하네.”
방진훈이 그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왜 비교를 해도 그렇게 하나. 우리가 회주님을 배신이라도 할 것처럼.”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 새끼랑 우리는 다르지.”
방진훈이 씩씩대며 말하자 위긴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비슷한 면이 있군.’
과거에 강진호를 모시던 자, 그리고 지금 강진호을 모시고 있는 자신들.
‘이거…….’
위긴스의 시선이 슬며시 이현수에게로 향했다.
‘비슷하군.’
이현수가 강진호에게 원한을 품은 채 죽는다면?
그런데 다음 생에 무학을 익힐 수 있는 몸이 되어 강진호와 또 한 번 조우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로군.’
어떤 사람에게도 한 가지 단점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무인으로서 이현수가 가진 가장 큰 단점은 무학에 대한 재능이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현수에게 강진호의 반 정도의 재능만 있었더라도 한국의 무인계는 애초에 이현수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다.
김석일? 이중걸?
그따위 잡배들이 이현수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력을 손에 넣은 이현수라…….’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적이다. 더구나 강진호의 평대로라면 청마라는 자는 이현수보다 능력이 더 뛰어나 보이지 않는가.
“그런 이에게 백 년이 넘는 시간이 주어졌다라…….”
“예?”
“대체 흑왕계는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다들 나름의 상념을 하는 와중, 바토르의 눈에 소파 한쪽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장민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이, 영감.”
장민이 대답 없이 고개만을 슬쩍 바토르 쪽으로 돌렸다.
“복잡하겠어?”
“……또 무슨 잡소리더냐?”
바토르가 씨익 웃었다.
“듣자하니 그 흑왕인가 하는 놈의 정체가 왕년 마교의 이인자라는데, 그럼 영감의 선조쯤 되는 인물이잖아. 집안싸움이 벌어지는데 한쪽 편을 들기 애매하지 않나?”
“나는 때로 궁금할 때가 있다.”
“음? 뭐가?”
장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충 다른 사람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 머리통에 들어 있는 뇌가 얼마나 작으면 그런 헛소리나 지껄이게 되는지 말이다.”
“이 영감이!”
바로트가 눈에 불을 켰지만, 장민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교의 지존은 오로지 마존뿐이시다. 청마께서…… 아니, 그 더러운 배교자 놈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겼든, 감히 교의 이름으로 마존께 대항할 수는 없다.”
“…….”
“마존께서 명만 내리시면 내가 직접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배교자를 잡아 살을 발라내 죽일 것이다.”
살기까지 뿜어내는 장민을 보며 바토르가 살짝 움찔해 말을 돌렸다.
“뭐, 그리 심각하게 굴어? 그냥 농담인데.”
“농담이 아니지.”
장민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다.
“나도 사람이지. 예언을 믿고 마존을 끝없이 기다렸지만…… 그건 마존께 마지막 희망을 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응?”
“사람 새끼라면 마존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은혜를 잊을 수 없는 법이다. 마존께서는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고 살던 우리를 구원하고, 광명을 내리셨다. 그 은혜를 어찌 잊는단 말이냐.”
“…….”
“교의 이인자가 아니라, 그 이전의 교주들이 부활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마존께서 명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의 목을 베고 그 피를 마실 것이다.”
“……알았다고.”
거, 살벌하게.
바토르가 막 말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응?”
창밖을 바라본 바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기.”
“왜 그러십니까?”
“못 보던 차가 들어오고 있는데?”
“네?”
그 말에 이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지하 주차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은 차가 가장 위의 대연무장까지 들어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 총회에서 연무장에 차를 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강진호뿐이다. 다시 말해 못 보던 차가 들어온다는 건 침입자가 생겼다는 의미.
창을 통해 유유히 건물 쪽으로 향하는 차를 확인한 이사들이 안색을 굳혔다.
“내려가 보십시다.”
“음.”
아래로 내려온 이사들이 건물 현관에 대어진 검은 세단을 바라본다.
따로 말을 나누기도 전에 차의 운전석이 덜컥 열리더니, 그 안에서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가 내려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 새끼가…….”
방진훈이 막 발작을 하려 하자, 위긴스가 그의 어깨를 잡아 만류했다.
“너는 누구지? 무슨 일로 왔는가?”
위긴스의 질문에 사내가 빙긋 웃었다.
“선물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선물?”
“예. 귀 회의 회주님께 흑왕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흑왕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사내가 말없이 차의 트렁크를 연 순간, 그들의 표정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마스터.
창왕과의 전쟁 와중에 도주한 마스터가 더없이 처참한 몰골이 되어 트렁크 안에 묶여 있었다.
“……마, 마스…….”
위긴스가 경악에 말을 잇지 못할 때, 사내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잘 전달해 주십시오.”
순간, 이사들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