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25
#1824.
인정하다 (4)
“그…….”
마스터가 초점 없는 눈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 모습을 보며 위긴스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험하게 다뤘으면…….’
그가 아는 마스터는 더없이 현명한 노인이었다. 세월을 비껴내지는 못했지만, 겹겹이 쌓인 세월은 그에게 현명함이라는 무기를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마스터에게서는 그 현명함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정신 나간 노인처럼 여기저기를 쉴 새 없이 훑는 모습이 위긴스를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개 같은 놈들.”
알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마스터는 배신자이고, 반드시 처단해야 할 죄인이다.
하지만 그건 총회의 권리이자 위긴스의 권리였다. 복수라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 아니던가. 더는 복수해야 할 가치조차 지니지 못한 마스터의 모습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질러 댔다.
“엉망이군.”
강진호 역시 마스터의 상태를 보고는 헛웃음을 흘려 댔다.
다른 이들은 마스터가 이리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지만, 강진호가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악취미군.”
이건 강진호가 자주 쓰는 방식이다.
섭혼술을 이용해 상대의 정신을 붕괴시키고, 마기를 밀어 넣어 회복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식으로 처리한 이들이 지금까지도 꽤 되지 않던가.
아마 마스터가 강진호의 손에 잡혔다면 목숨을 끊어버리거나 이런 식으로 정신을 붕괴시켰을 것이다. 마치 그가 해야 할 것을 미리 해주었다고 주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거 뭐, 대화나 되겠습니까?”
방진훈의 말에 바토르가 볼을 실룩였다.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저자는 나름 일가를 이룬 무인이다. 이런 식으로 험한 꼴을 보게 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군. 차라리 고문해 죽이는 것만 못하다.”
물론 고문도 당했지만 말이다.
바토르의 말에 딱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스터에게 다가갔다.
“혹시…….”
“가능할 것 같군.”
고개를 끄덕여 위긴스의 말을 받아준 강진호가 손을 뻗어 마스터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장민도 뽑아내지 못할 정도의 마기라…….’
마스터의 머릿속을 채운 마기가 느껴진다. 워낙 은밀하게 파고들어 있다 보니 저 장민조차도 미처 모든 마기를 제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강진호가 천천히 마공을 운용해 마스터의 내부에 있는 마기를 흡수했다.
서늘한 감각.
비슷한 마기라도 쓰는 이에 따라서 그 성질이 조금은 다른 법이다. 강진호의 마기가 마기치고는 불타는 듯한 폭력성을 지녔다면, 이 마기는 더없이 서늘하고 또 음울했다.
남김없이 마기를 모두 뽑아낸 강진호가 가만히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초점을 잃은 그 두 눈이 점점 빛을 되찾기 시작한다.
“…….”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빛이 된 마스터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가닿은 곳은 당연히 강진호였다.
“……회주님이시군요.”
“인사를 다시 해야 하나.”
빙긋 웃는 강진호를 본 마스터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뵙지는 못할 줄 알았습니다. 아니…… 다시 뵙지 않기를 바랐죠.”
“원하는 걸 다 할 수는 없는 게 세상이지.”
“……그렇지요.”
체념한 얼굴의 마스터가 고개를 돌려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자네를 볼 면목이 없군.”
그 말에 위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일을 벌였으면, 도망이라도 잘 칠 것이지.”
위긴스의 목소리에 울분이 묻어난다.
마스터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사실 위긴스 그 자신이다.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것 역시 마스터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서는 참아낼 수가 없다. 위긴스 역시 제 속을 뒤집는 이 불편함을 정확히 설명해 낼 수 없으니까.
제자리로 돌아간 강진호가 내려놓았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이제 말해보지.”
“…….”
“무슨 일이 있었지?”
마스터가 고개를 슬쩍 들어 위긴스를 바라본다. 그러자 위긴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챙겨 마스터에게 내밀었다.
“드십시오.”
“……고맙군.”
받아 든 물을 한 모금 마신 마스터가 강진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강진호가 대답 없이 마스터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날…… 회주님께서 창왕과 승부를 결하던 그날, 저는 그 자리에서 몸을 뺐습니다. 마지막 창왕의 노림수가 무너진 순간, 제 운명은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마스터가 낮게 웃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창왕이 패하게 된다면 저는 그곳에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니, 그 말은 면피에 불과하지요. 저는…… 저는 더는 당당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아니게 된 겁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르고 지켜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추락은 너무도 빠른 법이지요.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조금씩 타협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는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회주님.”
“그래서…….”
강진호가 조금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다음은?”
“……몸을 숨겼습니다.”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원탁을 등에 업고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원탁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해지고, 더는 원탁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니…… 총회라는 곳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실감이 나더군요. 지나는 이들의 눈 하나,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 하나까지 모두가 저를 감시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위긴스의 입술이 실룩였다.
마스터가 어떤 압박을 받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역시 조금 전 마스터가 말한 방식을 모두 동원하여 마스터를 추적했으니까.
“그렇기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거기서도 안주할 수 없었죠.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몸을 옮겼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야 한다고.”
위긴스가 눈을 찌푸렸다.
“유럽에 있는 수하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그랬다면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자네가 그걸 발견 못했겠나?”
“…….”
“그럴 수도 있지. 어쩌면 나는 조금 편해질 수 있었을지 모르네. 하지만 그 대가는 그들의 목숨이 되겠지. 회주님은 배신자를 살려두지 않으니까.”
위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
강진호와 척을 진 순간부터 그는 어디에서도 편히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총회는 원탁이 처음 상대한 총회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세상에 홀로 떨어진 것 같더군. 잠을 잘 수도 없고, 눈을 감을 수도 없었네. 조금만 긴장을 풀면 어디선가 검은 손이 날아들어 내 목을 움켜잡을 것만 같았지.”
마스터가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우스운 일이다.
그토록 강진호와 조우하는 것을 두려워했건만, 막상 강진호를 앞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더는 그와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던 와중에…….”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네. 내가 왜 잡혔는지 나도 모르겠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주변을 처음 보는 이들을 둘러싸고 있더군.”
“왜 텔레포트를…….”
“실패했네.”
위긴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법이 발동되지 않더군. 그리고 나를 제압한 그들은 내 몸 안에 마기를 박아 넣더군. 그때부터는 저항할 수 없었지.”
“…….”
위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지어 흑왕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이건 꽤 심각한 문제다.
마스터 정도 되는 이를 제압하는 데 흑왕이 움직일 필요도 없다는 의미니까. 그만큼 흑왕계의 전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가만히 마스터의 말을 듣고 있던 이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어떻게 마법을 억제한 겁니까?”
“그게…….”
“이상한 일도 아냐.”
그 대답을 한 건 위긴스가 아니라 강진호였다.
“회주님?”
“청마가 현대로 돌아온 지 백 년이 넘었다면, 모든 준비를 끝마쳤겠지. 그의 목표가 단순히 중국에 대한 장악이 아니라면, 유럽과 마법사들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았을 리 없지.”
단 십여 년의 세월만으로도 마교를 이끌고 중원을 지배한 청마였다.
이 정도는 대단할 것도 없다.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 그저 고통스러웠지. 그저…….”
어찌어찌 침착함을 유지하던 마스터의 두 눈에 공포감이 어렸다.
“……육체의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네. 하지만…… 흑왕, 그자가 내게 준 고통은 육체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치다…… 나를 잃어버렸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영원히 방황하는 것 같았지.”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대충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로군.”
마스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앞에 내려놓은 잔을 부여잡는다. 그러고는 힘겹게 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게. 회주님, 그 이상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흠…….”
강진호가 살짝 턱을 긁어 댔다.
마스터는 결코 약한 자가 아니다. 그가 삼왕급의 절대강자는 아닐지라도, 총회의 이사들에게는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가 저리 쉽게 제압을 당했다?
“너를 제압한 이들은?”
“……여럿이었습니다.”
“합공인가?”
“아니…… 아닙니다, 회주님. 그들 여럿이 오긴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저는 그들 중 하나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강진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마스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미 당신을 배신한 제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회주님…… 이건 온전한 제 진심입니다. 그들과 대적하지 마십시오.”
위긴스가 당황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스터!”
“자네도 마찬가지네. 그들…… 그들과는 대적해서는 안 돼. 그들의 힘은…… 우리가 알던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해.”
마스터가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이들이 세상에 있는 줄 알았다면…… 나는 결코, 결코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 걸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들과 관련이 없는 세상으로 달아났겠지. 어차피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거야.”
마스터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그, 그들과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
“그들은…… 그들은 너무도 강합니다. 회주님, 아무리 당신이라고는 해도…….”
“알아.”
“…….”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
강진호가 피식 웃어버렸다.
“할 말은 그게 다인 모양이군.”
강진호가 입에 문 담배를 비벼 껐다. 그 짓뭉개지는 담배가 마스터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마스터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는 배신의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