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26
#1825.
인정하다 (5)
위긴스가 강진호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저…… 로드.”
그의 얼굴에 긴장이 역력하다.
“제가 감히 로드께 이런 말을 드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진호가 슬쩍 위긴스를 바라봤다.
딱히 뭔가가 담기지 않은 눈빛임에도 위긴스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껴야 했다.
“그…….”
“할 말 있으면 해보지.”
“…….”
“시간 끌지 말고.”
위긴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로드, 물론 마스터가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위긴스의 시선이 다른 이사들을 한 번 훑었다.
“저라고 해서 마스터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로드, 마스터의 공 역시 감안하여 주십시오.”
“공?”
“예. 마스터는 원탁을 안정화시켜 총회의 일을 쉽게 만들어준 공이 있습니다. 만약 마스터가 없었더라면 원탁을 그리 빨리 안정화시킬 수 없었을 겁니다.”
“음…….”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 당시 마스터가 원탁을 이끌고 총회를 지원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마스터는 언제나 협력적이었습니다.”
바토르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나서 뒤통수를 때렸지.”
“물론 그건 사실입니다만…….”
위긴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공을 세운 이의 과는 공으로 상쇄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비록 마스터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그가 세운 공을 감안하여 목숨만은 붙여주십시오.”
위긴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해하기 어렵군.”
강진호가 그런 위긴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스터의 배신에 가장 화가 났을 사람은 다름 아닌 위긴스 아닌가.”
“……그 말도 맞습니다.”
위긴스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처음 배신을 당했을 때는 배신감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되더군요.”
“…….”
“하지만 돌이켜 보면 마스터를 그토록 몰아간 건 다름 아닌 저입니다. 팔다리를 모두 잘라놓고 걸어보라 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그리고 걷지 못한다고 죽이는 건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다른 이사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들 생각하지?”
“뭐,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양반이 저러고 나오는데.”
방진훈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용서해 주라는 건가?”
“용서는 뭔 씨발, 얼어 뒈질 용서입니까!”
방진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과를 공으로 덮는다는 개소리가 말이나 됩니까? 애초에 그건 저지른 짓거리가 어느 정도일 때의 이야기 아닙니까! 저 인간이 배신한 덕분에 죽은 애들이 몇인 줄 아십니까?”
방진훈이 금방이라도 마스터에게 달려들 기세로 살기를 내뿜었다.
“개 같은 놈이. 우리가 죽이겠다고 칼 물고 설친 것도 아니고, 지 조금 편해 보자고 일을 벌인 건데! 용서요? 용서는 그런데다 가져다 붙이는 게 아닙니다!”
방진훈의 말에 바토르도 찬동하고 나섰다.
“맞는 말이다, 주인.”
바토르가 차가운 눈으로 마스터를 노려보았다.
“죄에는 그에 걸맞은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이건 단순히 죄지은 자를 벌하는 것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이자를 어떻게 처벌하느냐에 따라 회의 기강이 정해지는 거다.”
“음…….”
“이런 죄를 짓고도 용서받는 이가 있다면, 누가 회의 규율을 겁내겠는가. 당장이야 주인의 권위가 있으니 반발하는 이가 나오지 않겠지만, 모든 것은 그런 작은 균열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강진호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현수가 동의를 구하자, 강진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여기까지만 하지.”
“……예?”
“애초에 서로 회의를 하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니까 길어져 봐야 좋을 것 없어.”
강진호가 마스터를 보며 말했다.
“나는 용서할 생각이 조금도 없거든.”
“로, 로드.”
위긴스가 당황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물론 강진호의 성향상 깔끔한 용서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온정 정도는 줄 수 있다 여겼다.
그저 목숨을 살리는 정도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물론! 물론 저 역시 마스터가 완전히 용서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죽음이라는 벌을 받을 필요까지는…….”
강진호가 위긴스를 돌아보았다.
“재밌는 말을 하는군.”
그의 얼굴에 감정의 편린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위긴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게는 저자를 용서하고 말고 할 자격이 없어.”
“……예?”
“죽은 이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무슨 수로 용서를 한다는 거지?”
“…….”
위긴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 논리에는 반박을 할 수 없다.
“죽은 이에게 용서를 받아올 방법이 있다면, 얼마든지 용서를 해주지.”
위긴스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면…….”
“…….”
“그 유족들을 모두 찾아가서 저자를 죽이지 않고 용서하겠다는 답을 모두에게서 받아온다면 그리해 주지. 그럴 용의는 있나?”
“……로드.”
“착각하지 마, 위긴스.”
강진호의 눈이 낮게 가라앉는다.
“이건 감정의 영역이 아니야. 나라고 해서 마스터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일을 초래한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너일지도 모르지. 그래, 어쩌면 마스터도 피해자일 수 있지.”
“…….”
“하지만 그래서 마스터를 용서하면 뭐가 남지? 그저 너와 내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는 게 전부 아닌가. 그까짓 감정을 위해서 죽어간 이들의 복수를 포기하라고?”
강진호가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나는 차라리 내가 더 죄를 짊어질지언정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아. 마스터의 죽음으로 위로를 받아야 할 목숨들이 있는 이상, 내 감정 같은 건 아무런 가치도 없어.”
위긴스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떨궜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로드. 로드의 말씀이 틀린 게 없습니다. 다만, 저는…….”
“거기까지 하게, 위긴스.”
마스터가 헛헛하게 웃었다.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대충 어떤 말이 오가는지는 알 것 같군. 굳이 나를 변호할 필요는 없네.”
“마스터.”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지. 그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달아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일세.”
마스터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회주님.”
그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한다.
“배신의 대가는 받겠습니다. 그저…… 제가 저지른 일의 대가가 원탁에 돌아가지 않게만 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강진호가 말없이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만약 마스터가 총회가 아니라 강진호를 공격했다면, 강진호는 별다른 조건 없이 마스터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설사 팔이나 다리가 하나 잘려 나가는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마스터의 목숨만은 부지해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는 인간 강진호가 아니라 총회의 회주인 강진호였다. 이제는 강진호도 그 차이가 뭔지 더없이 확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마스터가 저지른 일로 죽지 않을 수 있던 이들이 죽어갔다는 점이다.
“원탁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어.”
“…….”
“네게 가담한 자들의 목숨을 끊는 정도로 끝날 거야. 이미 그러고 있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스터가 살짝 강진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나이트들은 그 죄를 씻을 수 없겠지만, 그 휘하에 있는 이들은 명을 받으면 그저 따라야 하는 이들입니다. 적극적으로 그 상황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담자가 되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요구가 조금 많아졌지만, 강진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지. 네 식솔은 물론이고, 네 수하들에게도 죄를 묻지 않겠다.”
마스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예상 이상의 대답이다.
가족에게 죄를 묻지 않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수하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을 거라 생각했다. 그라면 그리했을 테니까.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참아내는 것과 격하게 반발하는 것 사이에 또다른 제삼의 길이.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감사합니다, 회주님.”
마스터가 만족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삶의 미련을 놓아버린 그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의 목숨 하나로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으니까.
“저는 각오가 됐습니다. 그만 끝내주십시오.”
비장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아니, 어찌 보면 조금 초탈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다.
강진호 역시 그 태도가 인상적이었는지 마스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
하나 생각 이상으로 강진호의 침묵이 길어지자, 마스터가 의문 어린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강진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예?”
“나는 네 목숨을 거둔다고 했지, 쉽게 죽여준다는 말을 한 적은 없어.”
“회, 회주님?”
강진호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스터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금 전의 초탈한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그 당황 가득한 얼굴을 보며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죽어서 다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나?”
웃기지도 않는 소리.
냉정하게 말해 사람의 목숨은 저마다 다들 가치가 다르다. 하지만 마스터의 목숨값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먼 이국의 땅에서 비명횡사해야 했던 그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대체할 수는 없다.
“네가 해야 할 건 하나다.”
“…….”
“죽지 않는 것.”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 이 약속은 모두 없던 걸로 하지. 네게 가담해 총회에 피해를 입힌 이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살려두지 않아.”
무감정한 목소리.
그렇기에 오히려 더 무서운 목소리였다. 분노와 차가움이라는 감정은 언젠가 시간과 함께 무뎌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마스터의 처분에 감정을 싣지 않고 있었다.
“달아나도 마찬가지다.”
“…….”
“감옥 문을 열어두지. 네게 금제를 가하지도 않아. 너는 그저 선택하면 된다. 홀로 달아나 고통에서 벗어날 건지, 그게 아니면 그 안에서 모두를 위해 고통을 감내할 건지.”
“으…….”
“원탁을 위해 배신했다던 네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는 데 그보다 좋은 방법은 없겠지.”
“회, 회주님!”
강진호가 턱짓으로 마스터를 가리켰다.
“끌고 가. 지하에 가두고 문은 열어둬.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내게 알려.”
“……알겠습니다.”
멍한 얼굴을 한 마스터의 양팔을 바토르와 방진훈이 움켜잡았다.
“저, 저는…… 저는! 회주님! 회주니이이이임!”
끌려 나가는 마스터를 향해 강진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미리 각오해 둬. 나는 청마처럼 무르지 않으니까.”
그 말이 과연 마스터의 귀에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달라질 게 없었다.
마스터가 끌려 나간 회주실에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찰칵.
강진호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상하게도…….”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사람은 자신에게는 너무 관대하지.”
“…….”
“이상하게도 말이야.”
강진호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쓸쓸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