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33
#1832.
훈련하다 (2)
“잠시만요. 이건?”
입국 심사장.
짐을 검사하던 세관 직원이 눈을 찌푸리며 새하얀 천에 친친 감긴 긴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천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새하얀 천이 풀려 나가자 그 안에서 기다란 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의 모습을 확인한 직원이 눈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검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청바지 위에 검은 티셔츠, 그 위에 조금 짧은 느낌의 점퍼를 입은 사내. 복장은 딱히 특이할 게 없지만, 길게 자란 머리를 원블록으로 밀고, 그 바로 위를 땋은 형태의 헤어 스타일이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이건 안 됩니다.”
“예?”
직원이 중국어로 상황을 설명한다.
“15센티 이상의 도검은 반입이 금지됩니다. 죄송하지만, 이 물건은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내, 백연홍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조건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건 날이 서 있지 않은 장식용 도검이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대한민국은 장식용 도검의 반입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15센티 이상이라면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내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손을 쭉 뻗어 직원의 손에 들린 검을 빼앗아 들었다.
“무, 무슨 짓을!”
“보안! 보안!”
사내가 검을 쥐자 당황한 이들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이들의 행동에 개의치 않고 느긋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한 손을 검으로 가져가 날을 꾹꾹 눌렀다.
“어?”
꾹 누른 검날의 끝이 살짝 밀려 들어가는 것을 본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쪽에서 말하는 도검이라는 건 금속으로 만들어진 날이 있는 물건을 뜻하는 거겠죠?”
“예? 아…… 일단은 그렇습니다.”
“이건 플라스틱입니다. 설마 장난감 칼도 반입이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죠?”
“…….”
직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검을 바라보고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백연홍이 태연하게 검을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검을 받아 든 이가 날을 손으로 만져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이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검을 검집에 넣어 다시 짐 위에 올렸다. 백연홍이 그 광경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꽤 철저하군.”
입국 심사장을 빠져나온 백연홍이 내리쬐는 햇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공항도 꽤 큽니다.”
“그러게 말이야. 이 작은 나라의 공항이라기에는 과할 정도로 크군.”
로비를 걸어 나온 백연홍이 가볍게 턱가를 주물렀다.
“이제는 무기를 좀 바꾸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매번 번거로워서.”
“무기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 재질을 바꾼 것만으로도 많이 양보한 거라고.”
“예. 애들 장난감 칼 들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으시지요.”
“뭔 불만이 그렇게 많아?”
백연홍이 눈치를 주자 짐을 끌고 오던 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흑왕께서 그냥 넘어가실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검종(劍宗)이라 하실지라도 그분의 진노를 감당할 수는 없잖습니까?”
“죽이기야 하겠어?”
백연홍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도 나만큼 살아보면 알겠지만,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세상사에 흥미가 사라지는 법이다. 자극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반복 될수록 역치가 떨어져. 아무리 좋은 술도 천 번을 마시면 맹물이나 다름없고, 끝내주는 미인도 천 번을 보면 그냥 사람이지.”
“너무 오래 사셨네요.”
“그렇지.”
백연홍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에게 그 이름은 더할 수 없는 자극이야. 이건 단순한 강함의 문제도 아니고, 명성의 문제도 아니야. 적천마존의 이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너는 이해하기 힘들 거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에 쏟아진 감로수와 같지.”
백연홍이 피식 웃자,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다 검종 같은 건 아닙니다. 모두가 그럴 것 같으면 저는 검종께서 하시는 일에 일일이 놀라지 않겠지요. 이미 무뎌졌을 테니까.”
“그도 그렇군. 그럼 내가 특별하다고 해두지.”
백연홍이 피식 웃으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기본적으로 싸늘함이 있기는 하지만, 일전의 리우양을 대할 때와는 꽤 다른 태도였다.
“내게 있어 이만한 재미는 다시 찾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잔소리 적당히 해.”
“저번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그때 흑왕께서 기분이 조금만 더 나빴더라면 아마 지금쯤 검종께서는 말려놓은 오징어 꼴이 되어 있을 겁니다.”
“오징어는 자네고.”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 말이!”
타악.
주머니에서 꺼낸 솔잎향 사탕을 입안으로 던져 넣은 백연홍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물론 나도 참아보려고 애는 썼지. 하지만 적천마존이라는 이름을 듣고 참을 수는 없지. 안 그런가?”
“끄응, 그런 마두 놈 때문에…….”
“마두는 목을 베어줘야지.”
“저기, 검종께서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그놈은 이 세계에서 평범하게 그냥 잘살고 있습니다. 조사해 보니 가족에겐 좋은 아들이고, 친구에게는 좋은 친구고, 애인도 예뻐요. 무지하게 이쁩니다.”
“…그래?”
“거기에 이놈은 복지 재단을 차려서 보육원을 후원하고 있단 말입니다, 보육원을! 그것도 생색만 내는 게 아니라 제대로 돈을 퍼붓고 있단 말입니다! 검종께서 돈을 벌어 부동산 놀음이나 하시는 와중에 이놈은 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고요!”
“…….”
“이러면 대체 누가 악당입니까, 누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더 악당 같습니다!”
“……가식은 아니고?”
“가식이라도 돈을 그만큼 퍼부을 수 있으면 인정해 줘야지요.”
“마두 놈이 별짓을 다 하는군.”
백연홍이 고개를 내저었다.
과거에 죄를 지은 이가 그 죄를 숨기기 위해 호인을 자처하는 경우야 꽤 흔하지만, 이건 경우를 좀 넘었다.
“개과천선한다고 해서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아니, 그게…….”
“뭐라 말해도 나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테니, 힘 적당히 빼지.”
사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말해봐야 이 양반이 들어먹을 리가 없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대체 흑왕께서는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통제하는 거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사실 그가 모시는 백연홍이 조금 더 과한 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흑왕계의 비수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이런 인간들이다.
왜 그런 꼬인 인간들만 모여 있느냐고?
꼬인 인간들만 모인 게 아니라 자격을 갖춘 인간들은 모조리 꼬여 있다는 쪽이 맞다.
이유?
너무 간단하지.
‘살아생전 실패라고는 안 해본 인간들의 인성이 제대로 박혔을 리가 있나.’
인간이란 실패를 바탕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콧대가 높은 인간의 콧대는 실패가 꺾어주고, 자존심 높은 이의 자존심은 좌절이 뭉개준다.
어릴 적에는 하나같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살던 사람은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수많은 좌절을 겪으며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법이다.
하지만 백연홍 같은 인간은 살아생전 좌절을 겪어보지 못했다.
너무도 뛰어나 질시를 받을지언정 능력이 부족해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경험을 해본 적은 없다. 설사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결국 마지막에는 성공해 버리기에 그 실패조차 성공을 위한 자양분이라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성공을 거듭해 온 정치인이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처먹지 않게 된다거나, 모두가 만류하는 일을 어떻게든 추진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완벽한 성공으로 끝난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 자신의 방식을 바꿀 이유가 없지.’
결과적으로는 항상 옳았으니까.
그런 이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극도의 오만함과 극도의 자기 확신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사내, 곽소(郭素)가 고개를 내젓고는 입을 열었다.
“진짜 하실 거죠?”
“물론.”
“정말로요?”
“여기까지 와서 물어보기에는 너무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끄응, 그럼 나중에 흑왕께서 벌을 내리신다면, 저는 말렸다고 해주십시오.”
“얼마든지 해주지. 그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백연홍이 그리 말하고는 빙긋 웃으며 걸어 나간다.
“같이 가시지요!”
이리저리 타박을 받았지만, 백연홍은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그의 기분은 최근에 다시없을 정도로 유쾌했다.
“여기에 적천마존이 있다는 거로군.”
알고 있다.
흑왕. 그러니까 청마는 지금 그가 찾고 있는 적천마존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적천마존을 상대하는 것은 단순히 강자를 찾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적천마존이라…….’
백연홍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재미있겠지. 정말 재미있을 거야.”
백연홍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간만에 심장이 뛰는 느낌이 난다. 드높은 고층에서 개미처럼 기어 다니는 인간들을 내려다볼 때 느껴지는 감각 따위는 이 흥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거겠지.
슬쩍 백연홍의 눈치를 살핀 곽소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시겠습니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놈의 집 주변에서 기다리는 겁니다만?”
백연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출신이라는 걸 굳이 따지는 것도 우습지만 말이야.”
“예.”
“그래도 내가 나름 정파인 아닌가.”
“나름이 아니지요! 검종이시면 적통 중의 적통 아니십니까!”
“그래. 나름 적통이란 말이지. 물론 이제는 내가 도가(道家)의 가르침을 맹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 아무리 마두를 상대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지.”
“음, 그럼 적당히 접촉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게 좋아.”
백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마인이라고는 하나 가족에게는 그 시신을 보여주는 법이 아니지.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하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차를 빌려놨나?”
“차는 무슨 놈의 찹니까? 택시 타야 하니까 이리 오시라고요.”
“……그러지.”
“거, 대충 아무 데서나 자면 그만이지, 뭘 또 높은 데를 찾으셔가지고 숙소를 도시 반대편에 잡았잖습니까! 또 한참 가야겠네, 한참!”
백연홍이 눈을 질끈 감았다.
‘후손만 아니었어도 그냥.’
전생의 유일한 오점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여기까지 왔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른 쪽은 아직 움직임이 없겠지?”
“없지요. 흑왕께서 그리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설마 그 명을 어길 만큼 간 큰 분이 검종 말고 또 있겠습니까? 설사 그럴 의도가 있다고 해도 검종만큼 성격이 급한 사람은 없겠죠.”
“그럼 볼만하겠군.”
“예?”
“내가 그 적천마존의 목을 가져갔을 때, 그놈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야. 특히나 그 중대가리 놈은 피를 토하겠지.”
“……그건 저도 솔직히 좀 기대가 되는군요.”
“가지.”
“예.”
두 사람이 공항의 로비를 걸어 입구 쪽으로 향했다.
‘적천마존이라…….’
백연홍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걸렸다.
“하필이면 이 시대로 돌아온 게 불행이겠지.”
“예?”
“아무것도 아니야.”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공항을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