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48
#1847.
다그치다 (2)
곽소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의 귓가에 흑왕의 콧노래 소리가 마치 지옥의 레퀴엠처럼 들려온다. 흥겹기 짝이 없는 멜로디임에도 곽소의 귀에는 장송곡보다 더 음울하고 공포스러웠다.
부우우웅!
차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간다.
“하하하핫!”
흥겹다는 듯 액셀을 밟은 청마가 고개를 홱 돌려 곽소를 바라보았다.
움찔.
시선이 마주친 순간, 곽소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넌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 거기에 있었으면 진짜 산 채로 껍데기가 벗겨졌을 거야. 그 양반이 손을 쓸 때는 나도 겁먹을 만큼 잔인한 사람이거든.”
잔인?
흑왕보다?
그런 건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과 다르게 곽소의 고개는 금방이라도 부러져 나갈 듯 격하게 끄덕여졌다.
“흐, 흑왕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뭔.”
청마가 피식 웃었다.
“모난 놈 옆에 있으면 정 맞는 법이지. 네 고충은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한때 그 입장이어서 말 안 듣는 상급자를 모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지.”
“…….”
곽소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모시는 백연홍을 욕보이는 게 되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흑왕의 말에 반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침묵에 반응한 듯 청마가 미소를 지었다.
“처신은 나쁘지 않군. 백연홍 같은 망나니 놈에게 왜 너 같은 이가 붙었는지 모를 만큼.”
끼이이이익!
차가 거칠게 멈춰 섰다.
국도 구석, 산이 맞닿은 곳에 차를 세운 청마가 휘파람을 불며 차에서 내렸다.
“내려.”
“예!”
곽소가 기겁을 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그가 양손을 모으고 뒤로 물러나자 청마가 성큼성큼 걸어 트렁크로 다가갔다.
끼긱.
낡은 트렁크가 활짝 열리고, 그 안에 쓰러져 있는 백연홍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편안한 여행 되셨습니까?”
청마가 빙그레 웃으며 묻자, 백연홍이 반밖에 남지 않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나도 다 대책이 있으니까. 이번에 영입한 외국의 마법사가 신기하게도 웬만한 상처는 다 고칠 수 있다는군. 그러니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질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팔은…….”
“그건 무리지. 네가 상대한 놈이 의수를 끼고 있는 걸 못 봤나?”
백연홍의 얼굴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자 청마가 빙그레 웃으며 백연홍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슬쩍 들이밀었다.
“문제라도?”
“……아닙니다.”
백연홍이 고개를 숙이자 청마가 빙긋 웃었다.
“목숨 대신 팔 하나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내가 아니었으면 넌 오늘 죽었어.”
“흑왕이시라면…….”
백연홍이 지끈 이를 깨물었다.
“저 하나 거기에서 빼내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아, 그건 물론이지.”
청마가 빙그레 웃고는 되물었다.
“하지만 내가 왜?”
“…….”
“나는 분명 네게 그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너는 내 경고를 어겼다. 그런데 왜 내가 너를 위해서 그들과 척을 지면서까지 무리를 해야 하지?”
“…….”
“너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해. 네가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내가 네 얼굴을 모조리 뜯어내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로 삼았을 것이다.”
가볍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백연홍도, 곽소도 그 말이 그저 농담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깔려 있는 차가운 살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뭐, 이쯤이면 벌은 충분히 받은 것 같고.”
청마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더 사고 치지 말고 중국으로 돌아가도록. 한동안 근신하고 있어. 아니, 그 꼴로는 근신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도 없겠지만 말이야.”
백연홍이 힘겹게 트렁크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섰다.
“그래. 어땠나, 직접 저들을 상대해 본 소감은?”
“저따위…….”
백연홍이 이를 갈아붙였다.
“제가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다시 붙는다면 저들 넷을 죽이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니지.”
청마가 희게 웃었다.
“다시 붙는다면 이번에는 네가 죽을 거다.”
“…….”
“그래서 벌집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야. 세상에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나은 곳도 있는 법이지.”
그가 총회를 내버려 두라 말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저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왔다. 객관적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곳을 상대로 언제나 승리를 거두어왔다. 운과 운이 점철된 결과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이라고 해서 그 운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에 있는가.
청마는 자신을 과신하지 않는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고, 굳이 일을 키울 필요도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최강이라는 시시한 이름 아니라 더 큰 개념이니까.
청마가 가만히 백연홍을 바라보았다.
차를 타고 총회를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죽여 버릴지, 아니면 살려 돌아올지를 고민했지만, 백연홍은 백연홍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을 해주었다.
이제는 강진호도 그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 피부로 체감했을 것이다. 그런 전력의 차이에 굴복할 사람은 아니지만, 최소한 판단을 강요할 때는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게 도리니까.
“차는 가져가.”
그가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흑왕!”
그러자 백연홍이 이를 악물며 그를 불러 세웠다.
“왜 그렇게 적천마존에게 집착하는 겁니까?”
청마의 발이 멈춰 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얼음보다 더 싸늘한 청마의 눈을 마주한 순간, 백연홍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눈으로 보고도 모르는 얼간이가 설명한다고 알 리가 없지.”
“…….”
“너는 너의 세계에 살면 돼.”
그 말이 끝이었다.
느릿하게 휘적휘적 걷는 것 같은 걸음이지만,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멀어진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백연홍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콰아아아앙!
주먹이 부서져라 땅을 내려친 백연홍이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했다.
‘나의 세계라고?’
그건 그가 보는 세상과 백연홍이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말이겠지. 아무리 좁히고 좁혀도 이 간극이 좁아질 리가 없다는 뜻이다.
“검공.”
“후우…….”
곽소의 걱정스런 부름에 백연홍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못날 때가 있다. 사람의 격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못난 짓을 저지르느냐가 아니라, 그걸 얼마나 빨리 극복하느냐다.
“멍청한 꼴을 보였군.”
“아닙니다, 검공.”
항상 그를 비꼬던 곽소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났다.
“돌아가자. 우선은 몸을 회복해야지.”
“하지만 팔이…….”
“이 정도야 목숨에 비하면 싸게 먹힌 거지.”
팔이 잘린 건 끔찍한 일이지만, 검을 쓰는 팔이 무사한 이상 그의 무위는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검과 장을 동시에 쓸 수 없게 되었으니 과거만은 못하겠지만…….
‘그건 극복하기 나름이지.’
십이비도에 오른 이들은 하나같이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지닌 이들이다. 이 정도 상처로 좌절하기에는 그들이 겪어온 것이 너무도 많았다.
“대신 운전은 네가 좀 해줘야겠다.”
“다, 당연합니다, 검공!”
곽소가 부리나케 운전석에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백연홍이 안색을 굳혔다.
‘다음에는 내가 죽는다고?’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하나 남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흑왕은 사람을 비웃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없는 말로 사람의 속을 긁어 대는 이는 아니다. 그 말이 진실이기에 진정으로 듣는 이의 뱃속을 불태우는 자였다.
“그건 내가 지금 수준일 때의 이야기겠지.”
이를 갈아붙인 백연홍이 차 문을 과격하게 열어젖혔다.
우선은 중국으로 돌아간다.
‘다음에 보면 반드시 그 목을 따주겠다, 빌어먹을 총회 놈들.’
그의 적이 적천마존 하나에서 조금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 * *
“몰골이 말이 아니로군.”
“…….”
병실에 누워 있는 이사들을 보며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주 짧은 승부에 불과했지만, 이사들의 몸뚱아리는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이 정도는 한숨 자면 나아!”
“제발 바토르 님. 그 몸으로 움직이면 한숨 주무시는 게 아니라 평생 주무시게 됩니다!”
“내 몸은 그리 나약하지 않다!”
“그걸 감안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요단강 건넜어요!”
총회 내부의 의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바토르를 보며 강진호가 고개를 다시 한번 내저었다.
‘근성은 좋네.’
과도하게 좋아서 문제지, 과도하게.
반쯤은 발악을 하고 있는 바토르와는 다르게 다른 이사들은 꽤 조용했다.
방진훈은 그나마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위긴스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겨우겨우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얼굴이 굳은 이는 다름 아닌 장민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정파의 무학을 가장 증오하는 이가 장민이다. 가장 지고 싶지 않은 이에게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그가 받은 충격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회주님.”
강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방진훈이 허탈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싸웠으면…… 누가 이겼습니까?”
강진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충분한 대답이 되어준다.
“……씨발.”
웬만해서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노골적인 욕설이 방진훈에게서 흘러나온다.
바토르와 장민, 위긴스와 그까지 합세해도 백연홍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는 게 더없이 충격인 모양이었다.
“저는…….”
방진훈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닫았다. 말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방진훈이 힙겹게 눈을 떴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
“굳이…… 굳이 뭐 내가 강해지지 않아도 다른 양반들이 있고, 내가 발악을 해봐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투박한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진득한 감정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이제 슬슬 안 되는 건 포기하고, 애들이나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굳이 강해지지 않아도 총회가 강해지면 되는 거니까. 그럼 내 역할은 다 한 거다 싶었는데…….”
방진훈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입술을 질끈 깨문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손도 못 쓰고 처 발려보니,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래도 무인이고, 한때는 이중걸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죽이겠다고 설치던 놈인데!”
이를 으득으득 갈아대던 방진훈이 핏발이 선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회주님.”
“말해.”
“제가 더 강해질 수 있습니까?”
“…….”
“목숨을 걸고, 악을 쓰고, 발악을 하면 그 새끼 면상에 주먹을 처박아 넣을 수 있을 만큼 더 강해질 수 있습니까?”
강진호가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딱히 말을 보태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사들도 다들 같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원한다는 듯이.
“그건…….”
그리고 강진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너희에게 달렸지.”
방진훈이 핏발이 선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겠습니다.”
방진훈의 눈에 투기가 넘쳐 난다. 그리고 다른 이사들의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에게 이런 투기를 느껴보는 게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을 버텨낼 수 있으면…….”
“…….”
“다음에는 그놈의 목을 딸 수 있게 될 거야.”
강진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그때까지 너희가 살아남는다면.”
이사들의 두 눈에 불꽃이 타오른다.
멈춰 섰던 총회가 다시 천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