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59
#1858.
시도하다 (3)
“우선 유럽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래.”
“…….”
참으로 깔끔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위긴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원탁에 다녀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라니까.”
“…….”
“왜?”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답니까?”
“그럼?”
“……마스터가 공석이 된 원탁을 제가 방문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요? 제가 원탁을 통째로 꿀꺽 삼키고 총회와 관계를 끊기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냅 두겠지.”
“예?”
“내버려 둔다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강진호를 본 위긴스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게 내버려 둬서 될 일입니까?”
“그럼?”
위긴스의 입장에서는 나름 경각심을 가지게 하자는 의미였다. 그럴 일이 벌어질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총회는 다시 한번 전력을 잃게 된다.
“그럴 생각인가?”
“예?”
“그럴 생각이냐고?”
“……제가 그럴 생각이라고 말씀드린다면?”
“잘살아.”
“…….”
위긴스가 얼굴을 감쌌다.
이 양반은 한 번씩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로드, 저를 신뢰해 주시는 건 참 기쁘기 한량없는 일입니다.”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지?”
“하지만 로드께서는 이미 신뢰하던 이에게 한 번 배신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스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강진호는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랬지.”
“하면 이제는 좀…….”
“그런데 그렇다고 뭐 달라질 게 있나?”
“예?”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믿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건 내 문제지.”
“…….”
“나는 딱히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서 배우고 얻은 대로밖에 행동하지 못해. 내가 배운 건 믿음을 배신당할까 봐 믿지 않느니, 차라리 배신당하는 게 낫다는 것 정도지.”
위긴스가 할 말을 잃고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런 위긴스의 표정에 미소로 화답했다.
“잘 다녀와.”
“……못 말리겠습니다.”
위긴스가 낮게 웃어버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언제인가부터 총회의 사람들은 자신을 완전히 믿고 있다. 강진호는 물론이고, 회원이나 다른 이사들도 자신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인다.
총회에 투신한 지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은 자신에게 말이다.
“저는 이득을 위해 총회에 투신한 몸이고,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총회를 탈출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든지.”
“……사람이 말을 하면 제발 생각을 좀 해주십시오.”
“생각하고 말한 거야.”
안 통한다.
차라리 소귀에 경을 읽는 게 낫지. 저 똥고집하고는…….
“끙, 최대한 빨리 가서 마스터의 자격만 손에 넣고 돌아오겠습니다.”
“게이트 열어놓지 않았나? 비행기 타야 돼?”
“……게이트로 갈 겁니다.”
“그럼 며칠 걸릴 일도 아니겠구만, 뭘 일일이 보고하고 그래? 다녀와.”
위긴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왜 갑자기 유럽에 가는지는 안 물으십니까?”
“나름의 방법을 찾는 거겠지.”
“…….”
“나쁘지 않아. 방법이 뭐가 됐든 결과만 만들어내면 되는 거니까.”
위긴스가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한때 그는 마스터를 동경했다.
마스터는 그가 아는 한 가장 지혜로운 자였고, 가장 올바른 자였다. 이미 틀어진 관계이지만, 그는 여전히 마스터를 존경하고 인정한다.
그리고 한때는 강진호의 강함을 동경했다.
그는 위긴스에게 폭력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위긴스는 강진호의 폭력이 아니라 강진호라는 인간 자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스터처럼 지혜롭지도 않고, 이현수처럼 영악하지도 않다. 바토르처럼 우직하지 않고, 장민처럼 인내심이 강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위긴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겸사겸사 정리도 좀 할 셈이니, 며칠 걸릴 겁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다 드리죠.”
“기대하지.”
“대신에 로드와 총회의 이름을 적당히 팔아먹겠습니다. 이제는 저 혼자서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시간을 단축하려면 그쪽이 좋으니까요.”
“마음대로 해.”
“끄응.”
이걸 신뢰라고 해야 할지, 방치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다녀오겠습니다.”
“위긴스.”
“예?”
“너무 무리하지 마.”
“…….”
바로 대답을 하려던 위긴스가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뭔가를 고민하던 위긴스가 이내 입가에 멋진 미소를 담았다.
“무리는 아닙니다, 로드.”
위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제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강진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위긴스가 미련 없이 돌아선다.
회주실 밖으로 걸어나가는 위긴스의 얼굴이 어쩐지 조금 편안해 보였다.
* * *
“저 양반은 또 왜 갑자기…….”
방진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거, 혼자만 낙오되는 느낌인데…….’
장민과 바토르야 꼬라지만 보더라도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저 머리 좋은 양반이 갑자기 유럽을 다녀오겠다는 걸 보면 그도 나름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 분명했다.
이사들 중 그만이 뭔가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몸만 혹사시키는 중이었다.
“끄응, 애초에 이거…….”
입 밖으로 내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딱 까놓고 말해 바토르나 장민은 애초에 총회에 들어오기 전부터 절대고수였다. 그와는 시작점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위긴스도 원래는 원탁의 다음 대 마스터가 될 것이라 평가받던 인재 중의 인재였다.
애당초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권력 싸움이나 해 대던 그와는 출신이나 살아온 과정이 다른 것이다.
사실 방진훈도 알고 있다.
같은 이사로 엮이기는 하지만, 그는 애초에 총회의 대표 자격으로 이사의 자리에 올랐을 뿐, 감히 저들과 같은 급으로 엮일 만한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존심이 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자존심이라는 것도 상대가 들이댈 만할 때 내세우는 거지, 상대와의 차이가 이 정도로 벌어지면 자존심을 내세우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애초에 그가 아직 이 자리를 붙들고 있는 이유는 회원들이 보기에 총회의 이사 자리를 외부인들만 차지하는 것이 너무 보기 좋지 않기 때문이지, 만약 그런 이유가 없었다면 벌써 때려치웠을 것이다.
“때려치운다라…….”
방진훈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이사의 자리에 올라 있지 않았다면, 강진호가 그를 다른 이사들과 함께 묶어서 벽을 넘어야 한다는 말을 했을까?
강진호는 정말 자신에게 그 정도의 역할을 기대하는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강진호가 진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강진호의 입장이라면 방진훈이란 사람에게 그만한 기대를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다 내려놓는 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솔직히 인정을 하고 물러서는 게 강진호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겁한 회피일지도 모르겠지만…….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겠지.’
방진훈이 깊게 한숨을 내쉬는 바로 그때였다.
벌컥!
그의 집무실 문이 확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다.
“……뭐야, 새끼야?”
“사부님.”
죽을상을 한 천태훈의 모습에 방진훈이 눈을 찌푸렸다.
“왜 또 사내 새끼가 오만상은 다 찌푸리고 있어? 왜?”
“그 위긴스 이사님이 또 수련에 빠진다고 하시던데…….”
“이 새끼는 동네 소문은 다 주워듣고 다니나? 그 양반이 그 말 한 지가 언젠데 그 소식이 네 귀에까지 들어가? 너, 회 내에 뭔 스파이 심어놓냐?”
“스파이가 아니라…….”
천태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총회의 안살림을 맡은 이는 이현수지만, 실질적으로 회원들을 통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방진훈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방진훈이 그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나서서 할 리가 없잖은가.
귀찮은 일은 모조리 짬 때려 버렸고, 덕분에 천태훈은 총회의 구석구석을 제집처럼 누비며 온갖 험한 일을 다 처리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의도하지 않아도 총회 최고의 마당발이라는 타이틀이 자연히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총회의 일반적인 회원들이나 카발리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마교 사람들까지 천태훈과는 다들 안면이 있고, 서로 농담 정도는 오고 가는 사이다. 그러니 자연히 소식이 빠를 수밖에.
“여하튼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근데 왜?”
“……사부님.”
천태훈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저, 수련에서 빠지면 안 됩니까?”
“뭐, 이 새끼야?”
방진훈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어딜 니 맘대로 빠지고 말고야? 이명한이랑 공영길이가 거기서 구르고 있는데, 네가 빠지면 어떻게 해?”
“사실…….”
천태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니…… 말이야 바른말이지, 제가 그놈들이랑 비교가 됩니까?”
“뭐?”
방진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그놈들은 회주님과 바토르 님이 재능을 인정해서 키우는 놈들이고, 저야 뭐 그놈들보다 조금 일찍 총회에 들어와서 사부님 제자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를 것 없는 놈인데.”
“…….”
“솔직히 따라가기 버겁습니다. 저보다 어린 놈들이 옆에서 저보다 더 잘하는 걸 보면 현타도 심하고, 제가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가 싶기도 하고…….”
“…….”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잖습니까. 망신 더 당하기 전에 그만하고 싶…….”
말을 하던 천태훈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슬쩍 들었다.
뭔가 앞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 사부님?”
고개를 들어보니 방진훈이 머리끝까지 새빨개진 얼굴이 이를 뿌득뿌득 갈아붙이고 있었다. 살면서 방진훈이 이렇게까지 화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저, 저는…….”
“이 새……끼가…….”
방진훈이 주먹을 부러져라 움켜쥐었다.
“남이 더 잘하는 거랑 네가 노력하는 게 뭔 상관이 있는데, 이 새끼야! 늦든 빠르든 같은 데 도착만 하면 그만이지! 남자라는 놈이 그딴 소리를 지껄여?”
“사, 사부…….”
“끄으으으으.”
방진훈이 분노를 어찌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잡아 비틀었다.
‘빌어먹을, 이걸 옆에서 보면 이런 느낌이구나.’
누가 제자 아니랄까 봐 어떻게 하는 짓도 자신과 똑같은가.
“태훈아.”
“예…… 사부님.”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이 새끼야!”
방진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조건이 다르다느니, 시작이 다르다느니, 재능이 다르다느니! 이 빌어 처먹을!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재능 있는 놈들한테 다 내주고 너는 쭈구리처럼 살 거냐?”
“…….”
“재능이 없으면 남들 달릴 때 기어서라도 따라가야지! 그래야 더러운 꼴 안 볼 거 아냐, 이 새끼야!”
방진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빌어먹을, 포기는 얼어 죽을! 니 꼬라지 보고 있으니, 내가 뭔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겠다!”
“그, 그게 무슨…….”
“너는 오늘부터 나랑 추가로 수련한다.”
“……예?”
천태훈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잔말 말고 준비해! 네가 그 새끼들한테 뒤진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내가 굴려줄 테니까!”
“…….”
혹 떼려다 오히려 하나 더 붙여 버린 천태훈이 눈물을 짜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방진훈은 그 덕분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완전히 다잡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슬픔이 한 사람의 기쁨이 되는, 아이러니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