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70
#1869.
기다리다 (4)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교를 이토록이나 중히 여기게 된 때가.
글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는 너무도 오래 살아왔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역시 처음부터 교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뿐이다.
‘다를 게 없었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시절.
폭력이 권위를 무너뜨리고, 힘이 도덕을 짓밟던 시절.
사람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살아갔다.
어쩌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 그 시대에도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고 미래를 논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장민이 살아가던 곳에는 그 인류가 이뤄낸 찬란한 광휘가 닿지 않았다.
한 집에 아이가 다섯 태어나면 셋은 굶주려 죽던 그 시절, 마교를 택한 이유는 신앙도, 믿음도 아닌, 그저 생존이었다.
교도가 되면 굶주리지 않을 수 있다는 그 말이 장민을 마교도로 이끌었다.
그래.
시작은 그저 그것뿐이었다.
굶주림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죽음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그저 한 명의 교도가 되어 마공을 익히고, 그 대가로 굶주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이미 죽어버린 부모는 더는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고,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나라는 더는 그를 돌보지 않았으니까.
그저 살아갈 양식을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었고,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래.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말이다.
‘살아간다.’
밖에서는 손가락질을 받는 마교이지만, 그 안에도 사람은 살아간다. 거칠고 흉악한 이들뿐일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정이 있고, 나름의 삶이 있었다.
인연을 맺고, 사랑을 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래. 그게 삶이었다.
그저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의 수명이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길었다는 것뿐. 아니, 남들보다 과도하게 길었다는 것뿐이다.
그저 남들만큼만 살아온 삶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특별한 두각을 나타낸 적도 없건만 어느새 당주가 되었고, 또 어느새 장로가 되었다.
태상 장로라는 직위가 그의 이름을 대신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래. 그리고 또.
세월은 흐르고 또 흐르고, 다시 흘렀다.
그 긴 삶은…….
‘고통이었지.’
그 말 말고는 다르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인연이라는 것은 끊어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준다. 인연을 맺고 살아가던 이들이 수명이 다해, 사고로, 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은 언제나 장민에게 화인처럼 남았다.
하나의 사람에 하나의 상처.
마음이 아닌 육체에 상처를 새겨 넣었다면, 그는 이미 흉터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몸이 되었을 것이다.
우정을 나눈 친구가 떠나간다.
사랑을 나눈 연인이 떠나간다.
자식들마저 그보다 먼저 떠나고, 제자들도 그를 남겨두고 먼저 죽어갔다.
직접적으로 인연을 나눈 이들이 하나둘 떠나갈 때마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하나씩 늘어났다.
남은 것은 그저 태상 장로라는 허망한 직함과 교뿐.
‘처음부터는 아니었겠지.’
옭아매 왔을 뿐이다.
“교를 부탁한다.”
“내 제자들을 부탁하네.”
“남은 이들을 잘 이끌어주게.”
‘덧없는 소리.’
먼저 떠나간 이들이 그에게 남긴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발을 묶고, 그의 팔을 묶고, 그의 영혼마저 얽어맨다.
그는 결국 교의 귀신이 될 이.
먼저 떠나는 이들의 눈빛이, 먼저 떠난 이들의 목소리가, 먼저 떠난 이들이 그에게 남긴 바람이…….
그렇기에 노력했다.
교가 쇠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퍼부었다. 늙은 육신이 갈려 나가도록, 메마른 영혼이 바스라지도록.
하지만 교의 쇠망은 그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절규하고 또 절규해도 교는 점점 더 성세를 잃어갔고, 더 많은 이들이 핍박받게 되었다.
그리고 장민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차마 끊어지지 않는 숨을 어쩌지 못하며.
스스로 버릴 수 없는 목숨이 이어짐을 한탄하며.
생각해 보라.
반드시 이뤄야 할 일이 있다.
어떻게든 이뤄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눈을 씻고 주변을 찾아봐도 도와줄 이 하나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노력해 봤냐고?
손톱이 닳도록 악을 써봤다. 해서는 안 될 짓도 서슴없이 저질렀고, 더 큰 일을 위해 교도들을 희생시키는 일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락.
떨어지고, 추락하고, 타락한다.
늙어가는 몸뚱이를 부여잡고 그 꼴을 두 눈으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이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존이시여…….’
사람은 극한에 몰렸을 때,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곳에 처박혔을 때, 신앙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이 바로 적천마존의 신화였고, 마존재림의 예언이었다.
누군가는 헛되다 했다.
누군가는 부질없다 했다.
하지만 장민은 매달려야 했다.
그저 놓아버리기에는 이미 교는 그의 모든 것이 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잃고, 또 잃어가다 보니 남은 것은 오로지 교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손을 놓아버리기에는 먼저 간 이들의 바람이 도무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니 버틸 수밖에.
부질없는 예언을 붙들고 광인처럼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스스로도 믿지 못한 그 예언을 부여잡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그조차도 믿지 않은 예언대로 강진호는 그의 앞에 나타났고, 삶의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교도들을 정토로 이끌었다. 비록 이곳이 교도들에게 마련된 천국은 아니었을지언정, 적어도 사람답게 내일을 생각하며 살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인간은 신을 믿는다.
신이 자신이 이루지 못할 바람을 이뤄주고 스스로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현실에서 아무런 도움조차 주지 못하는 신조차 믿고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몇 백 년의 바람을 단숨에 이뤄 버린 이를 신으로 모시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적어도 장민에게 있어서 강진호의 존재는 저 하찮은 신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설령 세상에 진짜 신이 존재하고, 그가 모두를 보살피고 있다 해도 장민은 신이 아닌 강진호에게 경배를 바칠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버려야 한다는 건가.’
강진호를?
웃기는 소리.
그건 장민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스스로를 버리고 지옥의 밑바닥에 처박혀 만세토록 고통받는 일이 있다 해도 그는 강진호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없다.
하면…….
그는 이대로 죽어가는가?
영원히 벽을 넘지 못하고?
아니. 그렇지 않다.
장민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틀렸던 거지.’
무언가를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는 것도. 뛰어넘기 위해서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도 다들 부질없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그건 빤한 방법론의 영역이 아니다. 반드시 이래야만 가능하다는 말을 되뇌고 있는 순간, 이미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벽이라는 것이 사람이 더 나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그를 부여잡고 나아가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무엇에 얽매여 있었나?’
그를 진정으로 옭아맨 건 강진호의 존재가 아니다.
믿음이 사람을 얽매던가? 신앙이 사람을 부자유스럽게 하던가?
천만에.
진짜 그를 얽매고 있었던 것은 교. 아니…… 먼저 떠난 교인들이 남긴 바람들이다.
모두 이루었다. 그들이 원하던 것, 바라던 것, 소망하던 것. 그 모두는 이미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그의 몫이 아니라 교도들의 몫이다.
그럼에도 장민은 그 바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스로의 목숨은 오직 교를 위해 준비된 것이고, 교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진호에 대한 그의 신앙은 그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오히려 강진호에게 신앙을 바칠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였더라?’
교에 대한 이 깊은 책임감이 생겨난 때가.
살아갈 터전을 지켜야 할 곳으로 생각하고, 즐거움을 느껴야 할 곳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한 때가.
그리고 진정한 장민의 바람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장민이 감은 눈을 떴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의 눈이 마인답지 않은 맑은 눈빛을 흘려낸다.
“나는 나의 삶을 찾고 싶다.”
그랬지.
그는 갇혀 있는 존재.
의무에 눌렸을 때는 어두운 굴 안에 자신을 가두었고, 의무를 벗어나고도 무거운 책임감에 자신을 가둔다. 그 안에서 사라진 것은 다름 아닌 장민이다.
마교의 태상 장로.
그 이름은 그의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아교처럼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의 것이어야 할 팔과 다리도 언젠가부터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그만의 것이어야 할 마음조차도 그의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그가 지켜온 교가 그를 짓누른다.
‘벗어나야 할 것은 마존이 아니었구나.’
장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그 순간, 장민의 몸에서 검은 기운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망령처럼 부유하는 기운들이 장민의 몸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도 하지.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장민의 몸에 조금씩 활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장민이 흐릿한 눈으로 멀어지는 검은 기운들을 바라보았다.
저건 소망이다.
저건 바람이다.
그리고 저건 그를 옭아매던 사슬이다.
모든 것이 이뤄졌음에도, 그가 차마 버리지 못한 것. 어쩌면 인연이라는 이름이나,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는 것들.
‘과거가 아니야.’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어떤 세월을 버텨왔든.
뒤를 돌아보는 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리가 있는가.
그를 짓누르고 있던 것은 그의 세월. 그 세월 속에서 차마 놓지 못한 것들.
하지만 이제는…….
장민이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의 눈에 지금껏 보아온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한때 그의 친우였던 자.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자.
한때 그의 제자였던 자.
그리고 그의 교도였던 이들.
‘고맙다.’
그들 덕에 버텨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장민은 이제 안다. 과거에 머무른 자는 나아갈 수 없는 법.
잊는 게 아니다.
이제야 내려놓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게 된 장민의 몸이 검은, 너무도 검은 기운들에 휘감기기 시작한다.
칠흑보다 더 검은 어둠은 차라리 신성하게 보일 정도였다.
잡 기운 하나 섞이지 않은, 정순하기 짝이 없는 마기가 새벽의 어둠처럼 장민을 끌어안는다.
그 깊은 어둠에 감싸인 장민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나아간다.”
과거를 극복하고, 관념을 뛰어넘고, 세월조차 잊고…….
나아간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장민을 휘감은 검은 마기가 폭풍처럼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 속, 그 깊디깊은 어둠 속에서…….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어머니의 품을 떠올린 장민이…….
가만히.
그저 가만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