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89
#1888.
치하하다 (3)
“혈마.”
“예.”
“놈들은?”
혈마가 고개를 아래로 내리깔았다.
강진호 앞에서도 이죽거림을 잊지 않던 그의 반응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자세였다.
“죄송합니다, 마존이시여.”
“찾지 못했나?”
“정확하게 보고드리자면, 저희의 능력으로는 그들의 주변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
“흑왕계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이들과 접촉하는 게 아니라 추적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건 혈마에게도 난해한 과제다.
기본적으로 정보라는 것은 감시와 접촉에서부터 만들어진다. 홍왕계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홍왕계와 연관이 있는 이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종적을 쫓는 것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거기에서 단계를 밟아 점점 윗선을 찾아 들어가는 게 기본적인 정탐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흑왕계만큼은 이런 과정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흑왕계에는 말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흑왕계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이 아니라 십이비도를 직접 찾아내야 한다. 십이비도라 추정되는 이들을 찾아내는 것도 난해한 일인데, 그들의 주변으로 파고들어 누가 십이비도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 것이다.
“차라리 제가 직접 나서게 해주십시오.”
“안 돼.”
강진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당하면 눈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하나 이대로는…….”
“미리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해서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혈마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흑왕계.’
그는 혈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다.
마교의 등장 덕에 마도의 종주를 자부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혈교는 세상 어느 문파보다 괴이막측하고 은밀한 곳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저들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홍왕을 직접 감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은밀하다고는 하나 상대는 벽을 넘은 초인. 왕으로 불리는 이. 그런 이의 이목을 속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혈마가 직접 나선다면 적은 확률로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적은 확률조차 감시가 반복되면 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지게 된다.
결국은 목숨을 잃고 말 터.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홍왕이 열둘이나 있다. 애초에 직접 정보를 빼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
혈마가 아니라 누구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강진호도 그들을 상대해 이길 자신은 있어도, 그들의 이목을 피해 목적을 알아낼 자신은 없다.
“적당히 예상되는 이들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쳐.”
“……명을 따르겠습니다.”
혈마의 얼굴이 치욕이 감돌았다.
하지만 강진호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그 역시 알고 있기에 그저 명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라.”
“……예?”
강진호가 입에 문 담배를 잘근 씹으며 말했다.
“청마는 상대의 정보력이 살아 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 그놈이 가장 즐겨 쓰는 전법은 상대의 핵심을 찔러 들어가서 목을 쳐버리는 것이고, 두 번째로 즐겨 쓰는 법은 손발을 자르고 눈을 멀게 하는 거다.”
“…….”
“놈이 나를 직접 노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첫 목표는 네가 될 거라는 의미다.”
혈마의 등에 식은땀이 피어났다.
얼마 전이었다면 이 말을 듣고도 딱히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적천마존이지, 그의 보좌에 불과하던 청마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흑왕계의 힘을 겪고 난 뒤다 보니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적은 더없이 강하고, 교활하며, 또한 잔인하다.
“영광이라고 해야 할지.”
“음?”
“그만한 괴물이 저를 위험인물로 판단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공포에 떨고도 남을 일이건만, 확실히 이 배짱만은 인정해 줘야 한다.
“마존이시여.”
“말해라.”
“혈교의 힘이 마존께서 보시기에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전쟁만큼은 저희도 목숨을 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강진호가 이채를 띠고 혈마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에게 굴복한 이유는 혈교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굳이 왜 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선택을 자처하는 거지?”
혈마가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적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
“마존께서 과거의 친우…… 아니, 과거의 인연과 마지막 정리를 끝내시면 총회에 대항하는 이들은 더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길고 긴 평화가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흠.”
평화라…….
‘모르겠군.’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만, 또한 이뤄지리라 생각하지 못하는 게 평화다. 항상 이 산만 넘으면 된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이번만은 달랐다.
세상에 그가 알지 못하는 강자가 더 숨어 있을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세상에 그가 알지 못하는 강대한 세력이 숨을 죽이고 있을 확률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저 은밀하기 짝이 없는 흑왕계조차 그 실체는 둘째 치고 이름만은 세상을 호령하지 않았던가.
“전쟁이 끝나면 논공행상이 시작되는 법. 저는 한순간의 안위를 위해서 마존께서 주실 상을 놓치는 머저리는 아닙니다. 혈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간사한 놈 같으니라고.”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확실히 혈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강진호는 공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걸 그리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목숨을 걸고 싸운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으니까.
그건 목숨을 건 이에 대한 역차별이다.
“알았다.”
“감사합니다.”
혈마가 허리를 쭉 폈다. 얻을 것을 얻었으니 더는 굽힐 필요가 없다는 듯 말이다.
“마존이시여.”
“말해.”
“흑왕은 쉽게 볼 이가 아닙니다.”
“빤한 소리를.”
“그게 아닙니다.”
혈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군부에 몸을 담았던 사람입니다. 더 넓게는 정부와 닿아 있던 이지요.”
“…….”
“혈교의 보존이라는 사명을 위해 저는 정계와 군부의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했습니다. 아마 그들의 비리와 뒷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주석이 아니라 저일 것입니다.”
“흠.”
“하지만 그렇게 많은 정보를 다뤘음에도 흑왕계에 대한 것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은밀하다는 건가?”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정계나 군부에 손을 뻗었다면 이토록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애초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강진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이미 너무 오래전에 손을 써둔 일이라 뒤늦게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을 수도 있으니까.”
“……확실히 그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군요.”
청마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어마어마한 시간이 주어졌으니까. 미래를 알고 있던 그가 국가의 설립부터 개입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아니, 이미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게 청마를 상대해야 하는 이들이 짊어져야 할 가장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제 생각에는 그는 정계나 군부에는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홍왕계가 창왕이 남긴 것들을 착실하게 흡수하고 있는 것만 봐도 명확합니다.”
“흠.”
강진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혈마를 바라보았다.
“네 말이 무슨 의민지는 알겠는데…….”
“예.”
“그게 청마가 위험한 것과 무슨 관곈지 모르겠군.”
혈마가 또렷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거대한 것을 시도할 때, 군부와 정계는 필수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
“그건 힘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습의 문제죠. 이번 창왕이 저지른 폭격과 방화가 정부와 군부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수습될 수 있었겠습니까?”
“무리겠지.”
그건 강진호도 놀랄 정도였다.
창왕의 공격은 말 그대로 지형을 바꿔놓았다. 한 지역이 통째로 소멸되었다는 말이 과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 사실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퍼져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라면 그만한 넓이의 땅 정도는 별 게 아니라지만, 그 가열차던 공격 자체가 애초에 없던 것처럼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그게 가능한 이유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나라의 힘이다. 그리고 두 정부가 가진 힘이었다.
‘확실히…….’
강진호 역시 한국 정부가 정보 통제와 민간인 통제를 도와준다는 계산이 없다면 한국 내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설사 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일단은 방어하기보다는 뒤로 물러나 시선을 피하려 들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예. 그렇죠.”
혈마가 히죽하고 웃는다.
“그런데도 그쪽으로 손을 뻗지 않는다는 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일입니다. 어쩌면 흑왕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일지도 모릅니다.”
“…….”
“그게 아니라면…….”
혈마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도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어쩌면…… 흑왕이 노리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는 이미 왕이지요. 상대할 적이 없는 왕입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흑왕이든 창왕이든 이미 땅에 묻혀 잿밥이나 받아먹는 처지가 되었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흑왕은 이미 모든 걸 가지고 있었습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틀린 게 없다.
“그럼…… 모든 걸 가진 이는 대체 무엇을 더 원하게 될까요?”
혈마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저는 이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걸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또 다른 왕뿐이겠죠.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것도 아쉬울 게 없는.”
“…….”
“그럼 저는 이만.”
혈마가 과장되게 인사를 하고는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진호가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여하튼 골치 아픈 놈들이야.’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속만 썩여 댄다.
“후우.”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이가 원하는 것이라…….’
그건 참 이상한 말이었다.
모든 것을 가졌다면 더 원할 필요가 없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걸 가졌다는 말이 틀린 게 된다.
하지만 흑왕에게만은 이 말이 걸맞다.
“뭘 하고 싶은 거냐?”
이 세상에서.
여기는 더 이상 그들이 세상을 뒤흔들던 시대가 아니다. 무인으로서 그들의 혼은 그 시대에 남겨져 있다.
남은 것은 그저 껍데기뿐일 텐데.
“적마이시여.”
과거.
누구보다 존중을 담아, 더할 나위 없는 친교를 담아.
그를 부르던 청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너무 많이 바뀌었군. 너도, 나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낯섦 아닌 낯섦에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뒤틀린 운명이 흘리는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