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9
#188.
쇼핑하다 (3)
강진호는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무 재미있게 쇼핑을 하고 계시기에 내가 딱히 말을 걸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이런 식으로라도 대화를 해보겠다고 찾아온 거지. 반가워.”
강진호는 가만히 웃었다.
자꾸 참을 수 없이 웃음이 났다.
즐거워서?
아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자 절로 웃음이 났다.
“반가워?”
강진호의 반문에 등 뒤에 바짝 붙은 남자가 키득대며 웃었다.
“어때? 지금 내가 여기서 날뛰기 시작하면 막아낼 자신이 있나? 너 혼자는 무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중에 하나는 오체분시를 당할 것 같은데 말이야.”
강진호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만능인 건 아니야. 오늘 네가 이 건물로 들어온 이후로 내가 너희 중 하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수십 번도 넘게 있었어. 알고 있나?”
“…….”
“평화에 젖어버린 무인은 더 이상 무인이라고 할 수 없지. 물론 그런 놈들 때문에 내가 돈을 버는 거지만 말이야.”
백현정이 강진호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진호야, 왜 자꾸 웃니?”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실없기는.”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한 번쯤 멈춰 설 법도 하건만, 엘리베이터는 더 이상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려갈 뿐이었다.
“1층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움직일까, 움직이지 않을까?”
“쿡.”
사내의 눈에 이채가 돋았다.
‘웃어?’
지금 이 상황에서?
어쩌면 이 강진호라는 놈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때, 강진호가 천천히 등 뒤로 손을 뻗어 왔다.
덥썩.
강진호의 손이 그의 등에 대여 있는 단도의 날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이것 봐라?’
정련하고 정련하여 날을 세운 칼이다.
아무리 베어내지 않았다고 해도 면도날보다 날카로운 날을 맨손으로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진기를 손에 모아야 할 텐데, 진기를 머금은 손으로 이 좁은 공간에서 티가 나지 않게 칼을 잡아 고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칼을 잡은 강진호의 손이 길게 베이며 피가 단도를 타고 흘렀다.
‘호오?’
스스로 부상을 자처한 꼴이지만, 덕분에 그도 칼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다.
“마음에 드는 대처로군. 좋아, 강진호. 1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면 아무것도 모른 척 나가면 돼. 대면은 다음에 또 하자고. 오늘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어.”
하지만 강진호는 대답이 없었다.
사내 역시 더 이상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자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강진호는 단도를 놓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스슷.
등 뒤에서 신법을 써서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강진호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금 쫓아간다면 커다란 소란을 동반해야 한다.
가족과 친구가 보고 있는 곳에서 그런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먼 곳까지 멀어진 사내가 강진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진호는 가만히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사내가 흠칫 하고 떨더니, 이내 몸을 돌려 강진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강진호는 손을 들어 흐르는 피를 지혈하고는 쇼핑백 안으로 깊숙이 집어넣어 어머니의 눈에 상처가 띄지 않게 감추었다.
“어머! 이거 뭐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왜 저래?”
강은영이 뒤를 돌아보려 하자 강진호가 한 걸음 옆으로 서 그녀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얼른 가자.”
“응.”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강은영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현정을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머니.”
“응?”
“저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밥 먹으러 간다더니, 갑자기 어디?”
“전화가 왔는데, 재경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밥은 거기 가서 먹을게요.”
“회장님 뵈러?”
“예.”
백현정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회장님 뵙는다니 좋은 것 먹고 오겠구나. 그러면 잡지 말아야지. 그래도 그분도 그렇지, 말씀을 좀 일찍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급한 일인 모양입니다.”
“그래, 다녀와라. 나는 네 친구들 밥 먹이고 네 아빠 도와주러 가마. 아마 지금쯤 울상일 거야.”
강진호는 빙그레 웃었다.
“네 차 타고 다녀올 거니?”
“예. 영기 좀 태워주세요.”
“유민이야 처음부터 우리가 태워 왔으니까 상관없고, 영기도 보육원으로 갈 테니 같이 내려주면 되지?”
“네.”
“알겠다.”
박유민이 그런 강진호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그리 바빠서 밥도 안 먹고 가?”
“금방 다녀올게.”
“흠…….”
아무래도 강진호가 없는 자리에서 백현정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부담되는지 박유민이 영 마뜩찮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주영기는 여전히 패기가 있었다.
“어머니! 가시죠! 배고파 죽겠습니다.”
“그래그래, 얼른 가자.”
“야, 유민아! 뭐하냐! 진호 밥 안 먹는다잖아. 가자!”
“어, 지금 갈게.”
박유민과 주영기가 손을 흔들며 멀어지자 강진호는 가만히 손을 쇼핑백에서 손을 뺐다. 길게 갈라진 상처는 그새 반쯤 아물어 있었지만, 말라붙은 피가 여전히 손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강진호는 손을 입가로 가져가 가만히 핥았다.
손끝에서 피 맛이 느껴지자 강진호의 입가가 천천히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화에 젖어버린 무인은 더 이상 무인이라고 할 수 없지.”
“큭큭큭큭.”
강진호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동의하지.”
평화에 젖어버렸다면 무인이라고 할 수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어디까지 도망쳤을까?”
강진호가 천천히 사내가 사라졌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백화점의 유리문 사이로 어둠이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멀리 달아나는 게 좋을 거야.‘
이제 사냥이 시작되는 시간이니까.
* * *
진바오[金寶]는 엑셀을 꽉 밟았다.
이미 차는 시속 150을 넘긴 상황이지만, 진바오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도로 곳곳을 막고 있는 차들이 아니라면 그 이상 속도를 높였겠지만, 지금은 이게 그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도였다.
하지만 진바오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이 발작적으로 엑셀을 밟고 있었다.
‘왜 이리 초조한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인가.
‘쫓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진바오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발작적으로 엑셀을 밟았다.
‘아무래도 피로가 쌓인 모양이니, 이번에 한탕하고 좀 쉬어야겠어.’
이번 임무로 받기로 한 돈은 꽤나 컸다. 차이커창은 비슷한 일을 열 번을 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을 과감하게 지불했다.
‘무련이 하는 일이라 통이 크다고 생각했건만…….’
돌이켜 보면 그만한 위험이 함께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들이 굳이 많은 돈을 지불할 리가 없었다.
‘평범한 놈이었는데…….’
무인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인의 수가 적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진바오가 하는 일은 일반인이 아니라 무인을 대상으로 한 일이었다.
그냥 청부업자가 아니라 무인을 대상으로 한 청부업자. 그것이 진바오의 직업이었다. 그러니 그런 애송이 하나를 상대하는 데 부담을 느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진바오가 본 강진호는 애송이 중의 애송이였다.
일신의 무력으로 뭔가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기만 하는 자. 지닌바 힘도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처음에는 왜 무련이 이런 놈을 조사하라고 한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고층 빌딩에서 그가 판 함정을 유유히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바오가 겁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제기랄!”
빠아아앙!
진바오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클랙슨을 강하게 짓눌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가 말이다!
‘그 눈.’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진바오의 초조함이 시작되었다.
꽤나 먼 거리지만 진바오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주던 맹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강진호의 눈을.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강진호라는 자가 진바오가 생각한 것처럼 별것 없는 순둥이였다면 절대 그런 눈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수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끝도 없는 전장을 빠져나온 자나 보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도 거물이라고 할 만한 이들을 꽤나 만나보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강진호와 같은 눈빛을 지니지 못했다.
광기와 악랄함이 이글거리는, 그런 눈빛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진정해.”
진바오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라고.”
인정한다.
진바오는 강진호라는 자를 완전히 잘못 보고 있었다. 무련이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명할 만큼 강진호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위험한 자라고 할지라도 진바오 쪽에서 먼저 다가서지 않는 이상은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다음에는 거리를 두고 좀 더 조심해서 접근하기만 하면 된다.
진바오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서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심장은 점점 더 격하게 뛰기만 했다.
“제기랄!”
이대로라면 숙소로 돌아간다고 해도 잠을 자기는 글렀다. 오늘은 술을 진탕 마시든지, 아니면 여자라도 품어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송이 놈 하나 때문에…….”
진바오는 연신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 버리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꾸 누군가가 등 뒤에서 자신의 목을 움켜쥘 것만 같은 강박이 점점 커져 갔다.
‘안 되겠어.’
이대로는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진바오가 천천히 차의 속도를 줄였다. 어디 갓길에라도 차를 대고 잠시 쉬었다 가야 정신이 들 것 같았다.
그때였다.
번쩍.
진바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차가 하이 빔을 켜며 그의 차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씨발!”
저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안 그래도 속이 답답해 죽겠는데.
“……잠깐만.”
눈부심을 참아가며 백미러를 바라보던 진바오가 급격하게 고개를 뒤로 꺾었다.
이 어둠 속에서 하이 빔을 켜고 따라오는 차종을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낮아.’
통상적으로 라이트가 있어야 할 곳보다 낮은 곳에서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저 차의 차체가 일반적이 차보다 낮다는 뜻이었다.
“으…….”
진바오는 머리털이 쭈삣 서는 것을 느꼈다.
이미 그는 강진호에 대해 충분할 만큼 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강진호가 타고 다니는 차에 대한 것도 있었다.
낮은 차체는 속도를 내기 위한 스포츠카가 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리고 강진호의 차는…….
“서, 설마!”
당황하는 진바오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뒤차가 속도를 높이며 그의 차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