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95
#1894.
전율하다 (4)
“전력 상승이라…….”
전화기를 움켜잡은 차이커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주 팔자가 피셨군.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지껄이는 소리는 아니겠지?”
[왜? 쫄기라도 했냐?]“항상 하는 말이지만, 너는 그 주둥아리를 닫을 필요가 있어. 강제로 아가리를 벌리지 못하는 처지가 되기 전에 말이야.”
[예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충고 감사드리고요.]차이커창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 미친 이현수 놈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그에게 굉장한 인내심을 소모하게 만든다. 무인계의 특성상 수많은 미친놈들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놈은 정말 색다르고 특이하게 미친 놈이었다.
[그래서 알아낸 게 좀 있나?]“없다.”
[당당해서 더 황당하네.]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현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이커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뒤질 만큼 뒤져 봤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유령의 종적을 쫓는 쪽이 속이 편하지, 이건 뭐…….
“생각 이상으로 교묘해.”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건가?]“아니. 흔적이 너무 많은 게 문제야. 기본적으로 흔적이 없이 모습을 숨기는 이들이라면 흑왕계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했겠지.”
[그건 당연히 그렇겠지.]흑왕계가 홍왕계, 창왕계와 함께 삼대 세력을 형성할 수 있던 이유는 그 세력의 강대함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의 존재만으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데 위가 없어.”
[점조직이라는 건가?]“그냥 단순히 점조직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놈들은 다들 자기가 흑왕계의 속해 있다는 것만을 알 뿐, 각자 다른 조직이란 말이야.”
[그래서?]“파고들어 위로 올라가다 보면 같은 결과에 마주한다. 자기가 누구에게 명령을 받는지를 몰라. 특정 몇몇이 흑왕이라는 존재에 포섭되어 움직인다는 인식만 있을 뿐이야. 심지어 그 흑왕에 대한 설명도 다들 달라.”
[빤한 이야기지.]수화기 너머로 또다시 이현수의 한숨이 들려왔다.
전에 예상한 대로 십이비도들이 각자 흑왕을 자처하며 각각 세력을 키웠을 것이다. 내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국 각지에서 흑왕계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힘과 세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을 테고.
[결국은 진짜 흑왕계라고 할 수 있는 윗선과 그 본단에 대해서는 추적조차 불가능하다는 건가?]“지금으로서는.”
차이커창이 깊이 숨을 들이쉰 뒤, 말을 이었다.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솔직히 회의적이다. 나 역시 중국이라는 땅 안에서 내 눈을 피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건 애초에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참새가 아무리 많아봐야 머리 위를 나는 매를 발견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차이커창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원들도 흑왕과 십이비도의 종적을 찾아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건 차이커창이 아니라 이현수가 동일한 정보원들을 다룬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는 건가?]“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지켜보고 있으면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
차이커창이 남은 한 손으로 가볍게 얼굴을 주물렀다.
‘뭔가 달라.’
그는 창왕계와 오랫동안 전쟁을 치러왔다. 하지만 창왕계가 그가 맞아 싸운 첫 상대일 리는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수도 없는 이들과 전쟁을 치러왔다.
작은 세력들과의 전쟁은 물론이고, 때로는 그가 아닌 홍왕을 따르는 이들과도 피 터지는 세력 싸움을 벌여왔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서야 그는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달라.’
저 흑왕계는 지금까지 그가 상대해 온 어디와도 다르다. 단순히 그가 예측할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근본부터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는……
“이현수.”
[왜?]“넌 짐작 가는 게 따로 없나?”
차이커창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현수라는 놈이 짜증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 두뇌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정석적인 계략에 강하다면, 이현수는 변칙의 화신, 그 자체다.
정공법으로 밀어붙이는 데는 약하지만,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짜낸다는 점에서는 따를 이가 없다.
그러니 냉정하게 보았을 때, 흑왕계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그보다 이현수가 앞서는 부분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 모르겠다.]“음…….”
맥없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차이커창은 딱히 비난의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타인이 할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다만…….]“다만?”
짧은 침묵 끝에 확고한 무언가가 담긴 목소리가 전해져 온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놈들이 노리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목표는 아닌 것 같다.]“그건 무슨 의미냐?”
[지금까지 우리가…… 아니, 총회가 상대한 적들의 목적은 거의 대동소이 했지. 결국 그들이 원한 것은 무인계의 일통이었어.]“으음.”
홍왕계는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다. 홍왕계가 노린 것은 무인계의 일통이라기보다는 중원 일통에 가까웠으니까. 그들은 중원만 정복할 수 있다면 외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조차 이현수가 말하는 목적과 대동소이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세력의 분포라든가, 소수를 정예로 아래에도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든가, 그리고 무엇보다 지배력 자체가 굉장히 느슨하다든가.]차이커창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지금 이현수의 말에는 그가 파악한 흑왕계의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이상한 점을 모르겠어?]알 것 같다.
혼자 머릿속에서 생각할 때는 딱히 이상하지 않던 점이 이현수와 대화를 하면서는 확연히 드러난다.
[다른 곳들이 이런 방식으로 운용할 수 없어서 하지 않은 게 아니야. 다른 이들은 이런 방식을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지. 왜냐면 기본적으로 모든 문파는 상대의 영역을 빼앗는 동시에 지배하는 것에 그 중점을 두거든. 그러니 창왕계와 홍왕계의 전쟁 역시 땅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맞는 말이다.”
세력의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전쟁은 영토 싸움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창왕계와 홍왕계가 서로 전선을 긋고 밀고 당기는 전쟁을 치러왔다는 게 그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가.
심지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한국을 노린 방식은 대규모의 원정대를 파견하여 총회를 와해시키고 한국이라는 땅 자체를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이놈들의 움직임에는 결정적인 하나가 빠져 있어. 그게 뭔지 알겠어?]“지배.”
[정확하다.]차이커창의 눈이 일그러졌다.
“감이 좀 잡히는군.”
홍왕이나 강진호와 같은 초인에게는 솔직히 세력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필요하지는 않다. 그들은 홀로 세력을 뛰어넘는 존재. 하지만 그들이 주변에 세력을 쌓는 이유는 냉정하게 말해서 단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지배.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홍왕이나 강진호와 같은 존재들은 원거리에서 쏴대는 미사일과도 같다. 미군은 굳이 보병 없이 미사일의 존재만으로 상대 국가를 완전히 박살 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을 점령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떻게든 보병의 존재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점령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세력을 키웠어야 해. 전쟁이 승리로 끝난다고 해서 점령이 끝나는 게 아니니까.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결국은 패배한 경우는 수도 없어.]“음.”
[다른 놈이라면 모르지만, 그 흑왕이 이런 사실을 모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그렇다면 경우는 하나뿐이겠지.]이현수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온다.
[이놈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아.]“…….”
그 말이 이상하게도 섬뜩하게 들렸다.
[어떤 이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다. 자신들의 위치와 정체를 계속해서 속이면서 남들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파고들어 뭔가를 획책해 댄다. 이건 점령군이라기보다는 자살 폭탄 테러범들을 보는 것 같아.]“자살 테러라…….”
헛웃음이 나온다.
말도 안 되는 비유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일견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이가 없군.’
애초에 테러라는 것은 약자가 하는 일이다.
힘으로 밀어버릴 수 있는 강자는 테러 따위는 저지르지 않는다. 그저 정공법으로 박살 내버릴 수 있는데 왜 위험과 피해를 자처하겠는가.
하지만 분명 흑왕계의 움직임은 테러를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둘 중 하나겠군. 이 미친놈들이 변태스러울 정도로 무언가를 공격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광신도 집단이거나, 그게 아니면…….”
[자신들보다 더 강한 무언가와 싸우기 위해서 준비한 이들이거나.]“……빌어먹을, 생각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군.”
[차이커창.]“왜?”
[이제 쓸데없는 짓은 포기하고 퍼져 있는 놈들 다 소집해서 방어로 돌려.]“뭐?”
[느낌이 좋지 않아.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 움직임이 늦다. 저놈들이 뭔가 시작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줬다면 시간이 좀 더 있었겠지만, 이리 잠잠한 걸 보면 더는 시간이 없어.]“움직임이 없는데 시간이 없다는 건가?”
[바다가 조용해지면 폭풍이 오는 법이지.]“……폭풍전야라는 건가?”
차이커창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확실히 그도 어찌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던 차였다. 저들이 저리 조용할 리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이현수의 말처럼 전 병력을 회수하지 않은 이유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홍왕계의 모든 힘을 동원하고도 흑왕계의 종적조차 찾지 못했다는 건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쓸데없이 자존심 부리지 마. 설마 수하들의 목숨보다 네 자존심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네가 아무리 쓰레기여도 그 정도는 아닐 거라 믿는다.]“닥쳐, 자라 새끼야.”
차이커창이 욕설을 내뱉었다.
[알아서 잘해라. 이쪽에서도 지금 전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최대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공유해 주겠다. 잘 알겠지만, 이번에는 너나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알고 있다.”
[이상 있으면 연락 부탁한다.]전화가 끊기고, 차이커창이 빤히 휴대폰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부탁한다고?’
이현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건 처음이다. 말이야 태연하게 해 대지만, 이현수 역시 지금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생에 단 한 번도 상대해 본 적 없는 강적이라는 건가.”
확실히 차이커창 역시 지금보다 더 마음을 다져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은 다들 복귀부터 시켜야겠군.’
그전에 우선 홍왕께 보고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문이 박살 나듯 열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으로 사색이 되어 문 안으로 뛰쳐 들어오는 수하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무언가를 직감한 차이커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이현수.’
빌어먹을 새끼야, 좀 더 일찍 말해주지그랬냐.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