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97
#1896.
얻어맞다 (1)
“으슬한데?”
“아직 날도 안 춥구만, 무슨 소리야?”
“……기분 탓인가? 감기에 걸렸을 리는 없고.”
무인이 감기라니, 코웃음이 나올 일이다.
“쯧.”
옆에서 함께 경계를 서던 이가 혀를 찼다.
“요즘에 영 수련을 안 하더니만, 몸이 개판이 난 모양이로군. 그러게 평소에 좀 부지런했어야지.”
“빌어먹을, 수련할 시간이나 주고 말해야지!”
“왜 갑자기 성질이야?”
춥다고 말한 이가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요즘은 밥 한 끼 편히 먹을 시간이 없다니까. 뭐가 그렇게 정신이 없는지.”
“그걸 말이라고 해? 아직 저 창왕계의 잔당 놈들이 남아 있잖아. 모조리 정리를 해야 쉬든 하지.”
“그래봐야 잔당이지.”
사내가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 홍왕께서…… 아니, 홍왕이 아니지. 그분께서 이런 사소한 일까지 직접 다루지는 않으실 테니까. 홍왕이 아니라 차이커창 님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말했잖아, 잔당은 그냥 잔당일 뿐이라고. 그놈들을 지금 당장 처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나?”
“그래도 창왕계 놈들인데, 위험하지.”
“위험은 얼어 뒈질! 창왕이 죽었는데 남은 놈들이 뭘 할 수 있다고! 그래봐야 의미도 없는 저항이나 하다가 잡혀 죽는 게 남은 놈들의 운명이지.”
“하긴…….”
왕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
만약 그 전쟁에서 죽은 이가 창왕이 아니라 홍왕이었다면 그들은 감히 저항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투항하거나 숨어드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대부분의 창왕계 역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다. 하지만 반골 기질을 버리지 못한 일부가 홍왕계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줌도 안 되는 것들이…….”
중원은 너무나도 넓다.
그렇기에 소수가 숨어들어 항전하게 되면 그걸 잡아내는 게 쉽지가 않다.
“저건 독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그 수로 뭘 어떻게 하겠어? 소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생각이 좀 다른데.”
“다를 게 뭐가 있어? 아무리 발악을 해봐야 뭘 할 수 있…….”
태연하게 대답하던 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지금 대답한 이의 목소리가 낯설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평범한 이라면 금세 알아챌 일이지만, 그들은 목소리 이전에 기척을 느끼는 이들. 감각에 다른 이가 존재하지 않는데 타인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리 없다.
‘뭐…….’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지척에서 들려왔다.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분명 감각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데 목소리는 들린다. 이건 무인에게 있어서는 지척에서 귀신의 흐느낌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공포스러운 상황이었다.
움찔.
석상처럼 굳어버린 이들 중 하나가 힘겹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마침내 완전히 돌아간 시선에 들어온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표정, 심지어 그 무위조차 짐작이 불가능한…….
그래, 말 그대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사내였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유령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 누구…….”
말을 하던 사내가 자신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려 버렸다.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무인이고, 지금 그들이 맡은 임무는 경계였다. 감각을 바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음에도 그 감각을 속이며 이곳까지 온 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누구인가가 왜 중요한가.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
애초에 이곳까지 왔다는 것에서 이자의 의도는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건 아까 하던 이야기지. 소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나?”
“…….”
“아니지, 아니야. 중요한 건 그 소수가 누구인가겠지. 어중이떠중이가 수마저 적다면 네 말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만, 어설픈 다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수라면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나?”
누구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사내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기척을 잡아내려고 해보지만, 도무지 잡히지가 않는다.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눈앞에 있는 이는 절대 귀신 같은 게 아니다. 분명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숨소리가 들리고 심장 뛰는 소리마저 들릴지언정 단 한 줌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머리가 발에 달려 있고, 목이 있어야 할 부위에 커다란 혓바닥이 달려 있는 괴물을 본다고 해도 이렇게 공포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괴물은 기운이 지배하는 세상의 법칙 아래에 있는 존재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는 그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 존재였다.
“누구…….”
“의미가 없다니까 그러네.”
사내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말려 올라간다.
그걸 웃음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이들에게 절로 섬뜩함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중요한 건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지. 이제 너희가 어떻게 될 것인가지.”
“…….”
“아니, 아니야. 사실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 너희가 없어진다고 해도 세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 테니까. 안타까운 일이지. 힘을 가지지 못한 개인은 죽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없거든.”
꾸욱!
그나마 사내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을 수 있던 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적!’
상대가 적이란 것만은 명확하다. 그것도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적.
그렇다면?
으득.
주먹을 움켜쥔 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덮쳐!’
남은 이들은 어쩔 수 없다. 어차피 그 역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이들을 미끼로 던져주는 한이 있더라도 안쪽에 적이 왔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사내가 고함을 내지르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의지와 다르게 조금도 움직여 주지 않았다.
‘뭐지?’
사내의 눈에 의혹이 떠오른다.
아니, 그전에…….
내가 방금 고함을 질렀던가?
그랬다면 저들이 저리 멍하니 서 있지는 않을 텐데?
그럼 대체…….
“…….”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아닌지 이해하기 어렵던 그를 현실로 되돌린 것은 목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이었다.
‘목?’
목이 갑자기 왜…….
그러고 나서 그는 보았다.
그의 앞에 있는 그의 동료들의 목에 붉은 선이 그어지는 광경을 말이다.
처음에는 너무 가늘어서 잘 보이지도 않던 선이 점점 굵어진다. 이윽고 선명하기 짝이 없는 핏빛의 선이 만들어진 순간, 그는 동료들이 운명을 직감했다.
‘빌어먹을.’
그리고 아마 그의 목에도 똑같은 선이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개 같은…….’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빙글 회전하며 흐려진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의미는 없겠지만, 말해 주지. 나는 공령(空靈)이라 하네.”
그 말을 채 끝까지 듣지 못한 이의 숨이 끊겼다.
“흠.”
공령이 바닥에 쓰러진 세 사람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을 끌었군.’
가볍게 처리하고 지나가도 됐겠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를 해보는 느낌이라 더 시간을 끈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이건 딱히 신속을 요하는 일은 아니니까. 그저 저들이 다시는 홍왕을 중심으로 뭉쳐 대항할 수 없게만 만들면 될 일이다.
공령이 고개를 들어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저택을 바라보았다.
“묘하군.”
과거라면 커다란 장원이어야 할 곳이 현대식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건 문파라기보다는 돈이 넘쳐 나는 누군가가 산속에 지어둔 별장 같은 느낌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무인들이 살아가는 곳도 달라진 것이다.
물론 그도 딱히 다를 것은 없다.
그 역시 굳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과거의 문물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지금 그가 입고 있는 것도 현대식 트레이닝복이 아닌가.
다만…….
“그래도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이러면 조금 느와르 같지.
가볍게 손을 털어낸 공령이 사람 키 높이보다 더 크게 건물을 둘러싼 담장, 그 가운데로 보이는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우웅.
그가 접근하자 대문 위쪽에 설치된 CCTV가 회전하며 그를 포착한다.
하지만 공령은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대문으로 다가가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이어 차가운 금속의 감각을 채 느끼기도 전에…….
기이이잉!
쇠가 마찰하는 듯 커다란 소음과 함께 강철로 만들어진 문이 엿가락처럼 휘어 그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공간 안으로 들어간 공령이 안으로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건물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흠.”
살기를 뿜어내며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한 홍왕계의 무인들을 보며 공령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훈련이 잘되어 있군.’
홍왕이란 이름. 홍왕계라는 명성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 변방이나 다름없는 곳을 지키는 이들조차 이리 단련이 잘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허무하지.’
명검이란 전장에서 쓰일 때나 의미가 있는 법.
아무리 좋은 검이라고 해도 장식장 안에 들어간 순간부터 도자기나 그림과 다를 것 없는 사치품이 될 뿐이다.
그래.
그가 보는 이들의 처지가 딱 그렇다.
사치품.
아무리 아름답게 빚어낸다고 해도 결국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웬 놈이냐!”
“말할 것 뭐 있어! 그냥 죽여!”
“둘러싸!”
여기저기서 호성이 들려온다.
마치 이리 떼처럼 살기를 드러내며 자신을 조여오는 홍왕계의 무인들을 보며 공령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달아나는 이는 살려준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여기가 어딘 줄은 아는 거냐? 앞에서 감시하던 놈들은 어떻게 했지?”
하지만 공령은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는 이들은 한 가지만 명심해 두도록.”
“…….”
공령의 말을 들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저 뒷말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너희의 죽음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거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공령의 입가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웃음이 피어났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 그러니 조금 과격해도 이해하라고.”
서걱!
잘라내는 소리.
날카롭기 짝이 없는 칼날로 피와 살이 흐르는 무언가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이어졌다.
‘뭘…….’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앗!
들려온 것은 무언가가 수도꼭지를 세차게 돌린 것과 같은 물소리였다. 진득한 액체가 폭포처럼 토해져 나오는 소리!
그 소리와 함께 공령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의 몸이 말 그대로 동강동강 나 바닥을 굴렀다.
“뭐…….”
“뭐야, 저게…….”
바로 앞에 있던 동료들이 팔다리가 빠진 장난감 같은 모양새가 되어 쓰러지는 것을 본 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체 뭘 어떻…… 어?’
당황한 이들의 눈에 기이한 것이 보인다.
평소라면 보일 리 없는, 너무나도 얇은 무언가.
실이라는 말조차도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얇은 선 같은 무언가가 허공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또옥.
그 선을 타고 흐르는 피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무엇이 저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은사(銀絲)?”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일에 당황하는 그들의 귓가에 공령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말하지만, 달아나는 이는 막지 않아. 달아날 수 있다면 말이야.”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흑왕을 따르는 이. 십이비도 중의 일인, 공령이라 한다.”
공령이 손끝에서 흘러나온 와이어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너희에겐 의미가 없는 말이겠지만.”
세상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