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00
#1899.
얻어맞다 (4)
까딱까딱.
공령이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아직 감각이 미묘하군.’
무위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무인의 무학이란 실전에서 제 위력을 발휘해야 그 의미가 있는 법.
무학을 갈고닦는 데 소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실전에서 사람을 상대로 무학을 펼쳐 본 지는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아니. ‘제대로’라는 말까지 붙는다면 몇 년이 아니라 몇 십 년이라는 말을 붙여도 이상할 게 없다.
“흐음.”
이런 감각은 수련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실전.
삶과 죽음이 오가는 실전을 겪어야 회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곧 회복이야 퇼 테지만…….’
공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조각조각 난 시체들과 그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모여 흐르는 광경이 들어온다.
그 시체 더미와 피의 강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비린내가 금방이라도 코를 마비시킬 것 같다. 제아무리 철석간담을 지닌 이라고 해도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직면한다면, 속에 든 것을 게워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령은 그 광경에서 딱히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끔찍한 광경일지 모르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 이런 광경은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나 그가 가는 곳은 말이다.
“……대체 얼마나 죽여 대야 감각이 완전히 돌아올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
공령의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적당히 상대를 해주다 보면 감각이 웬만큼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건만, 전투가 끝나고 보니 별다른 성과가 없는 느낌이었다.
확실한 것.
세상은 발전했지만, 무인들의 세상은 퇴보했다.
그가 최전성기를 달리던 과거의 중원이었다면, 이름 없는 삼류 문파를 상대한다 해도 이보다는 저항이 심했을 것이다.
이들이 이름 없는 삼류 문파의 제자들이 아니라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홍왕계의 무사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현대의 무인들은 나약할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군.’
무인들의 삶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나아졌다. 과거의 무인들도 그 힘을 바탕으로 평범한 양민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지만, 과거의 세상은 그 조금 더 나은 부유함을 누릴 방법이 딱히 없던 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무인들은 뒷세계를 장악하고, 그 장악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다시 말하자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나약한 이들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썩어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딱히 근성론에 사로잡힌 건 아니다.
그는 과거나 지금이나 노력과 근성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을 그리 믿지 않는 이였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더 흘러간다면 현대의 무인들은 더 약해져 갈 것이고, 무인들의 세상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만은 동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나쯤은…….”
공령이 시산혈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내줄 걸 그랬나?”
피식 웃어버린 공령이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건물 전체를 돔처럼 둘러싸고 있던 그의 와이어들이 비단이 서로 마찰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그의 소매로 빨려 들어갔다.
‘좋은 세상이지.’
과거에는 이보다 훨씬 더 무겁고 약한 은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온갖 비전을 다 동원해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은사의 가격은 동등한 무게의 황금보다 몇 십 배는 더 비쌌다.
하지만 지금은?
‘공산품이 당시의 비전을 능가하는 세상이지.’
산업용으로 따로 제작된 고가의 와이어는 당시 그가 사용하던 은사보다 열 배는 가늘고, 당시보다 수십 배의 무게를 이겨낸다.
질이 더 좋아진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그런 물건을 그저 주문하는 것만으로 별 어려움 없이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직 과거 그대로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손에 익다며 예전의 방식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공령의 입장에서 그런 이들은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멍청이들일 뿐이었다.
사라락.
공령이 와이어를 살짝 뽑아냈다가 다시 밀어 넣는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고수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그건 고수가 되어본 적 없는 이들의 환상일 뿐이다.
명필일수록 붓은 최고급을 고집하는 법이고, 고수일수록 명검을 얻기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법이다. 명검으로 이름을 날린 검들이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촤락.
만족스러운 얼굴로 와이어를 한 번 뻗어낸 공령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우우우웅.
그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가만히 울리는 휴대폰의 감각을 느끼던 공령이 피식 웃고 말았다.
‘좋은 세상이라니까.’
과거에는 전장에 나가 있는 이와 연락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아무리 빨리 경공을 펼치고, 말을 갈아타며 달려도 속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제때 정보가 전달되지 않아 패배하는 일은 딱히 실수라고 취급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앉은 자리에서 버튼 몇 번 누르는 것만으로도 수천 킬로 떨어진 곳까지 연락을 할 수 있다.
‘과거에도 이런 게 있었다면 역사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하군.’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지배하던 세상은 이미 끝이 났다. 아마 이 흐름을 돌이킬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공령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딱히 서두르지 않는 동작으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지?”
[정리가 끝났으면 그만 물러나셔야 합니다.]“알고 있다.”
애초에 그러기로 했으니까.
“일일이 연락하지 않아도 돼. 나는 다른 멍청이들과는 다르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저 확인 차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흑왕의 명인가?”
공령이 낮게 웃었다.
“알았다. 바로 물러나지.”
[다만, 흑왕께서 피해가 큰 것에 조금 언짢은 기색을 보이셨습니다.]“흠…….”
공령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흑왕께 보고드리도록. 어설프게 자비를 베풀었다가 희망을 품는 이들이 늘어나면 피해는 더 커질 거라고. 손을 대지 않는다면 모를까, 손을 대야 한다면 확실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럼.]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들은 공령이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흠.”
과하다라…….
“흑왕께서도 평화에 젖으셨나?”
과거에 이런 광경이야 심심찮게 보던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저 흑왕이 전장을 누비던 시절에는 이 정도 광경이야 딱히 끔찍하다는 말을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을 터.
“세상을 피로 물들였던 분이 꽤 감상적이 되셨군.”
공령이 나직하게 웃었다.
하지만 뭐…….
딱히 탓할 일은 아니다.
세상이 달라지면 사람도 변해야 하는 법.
예전과 달라진 건 흑왕뿐만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십이비도들도 과거의 그들과는 분명 많은 부분이 변했다.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변하는 와중에서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고 있는가다.
그것만 지키고 있다면 다른 부분은 얼마나 변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공령의 귓가에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음?”
공령이 고개를 돌렸다.
‘실수라…….’
실전 감각이 떨어진다는 건 이런 문제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예전이었다면 그의 감각이 생존자를 놓쳤을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공령이 소리가 난 쪽으로 발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벅.
동강동강 나 쌓여 있는 시신들 사이로 개미 소리 같은 신음이 새어 나온다.
그가 가볍게 손을 내젓자 시체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잘려 나간 다리를 움켜잡고 있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운이 좋군. 아니, 운이 나쁜 건가?”
공령이 생존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소리가 들리는 순간 숨통을 끊어놓았겠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른 이들뿐 아니라 그 역시 변했다는 거겠지.
“나를 봐라.”
몽롱한 의식을 채 부여잡지 못하고 있던 이가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들어 공령을 바라보았다.
“흐음.”
눈빛.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이의 눈빛이 원독에 차 공령을 노려보았다.
“좋아.”
예전에는 저런 눈을 한 이가 많았지.
무력이 주는 향락에 젖어 무인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이는 저런 눈빛을 하지 못한다. 그를 보는 순간, 공포에 젖어 달아날 길부터 찾았겠지. 그게 아니면 눈물을 짜내며 용서를 빌거나.
하지만 이자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격차를 실감했음에도 대항의 의지를 잃지 않은 것이다.
‘나도 늙었지.’
과거였다면 저 눈을 뽑아냈을 것이다.
그 역시 그리 좋은 사람으로 불리지는 못하던 이. 정과 사를 굳이 나눠야 한다면, 사 쪽으로 급격하게 쏠리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저 눈빛이 그리 싫지 않다.
과거에는 너무도 당연하던 것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된 세상이라 그런 모양이다.
“그 눈빛을 유지해라, 꼬마야.”
공령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너 같은 이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때는 그 눈빛이 다시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 그런 세상에서는 다리 하나 잃은 정도는 딱히 문제도 아닐 거다.”
공령이 가볍게 웃어준 뒤 몸을 돌렸다.
“이…… 이…… 자라 새……끼…….”
“쿡쿡.”
낮게 웃은 공령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때가 오면 네가 내게 감사하게 될지도 모르지.”
말을 마친 공령이 미련 없이 걸어간다.
“끄으…….”
홀로 남은 이가 점점 멀어지는 공령의 뒷모습을 원독에 찬 눈으로 노려보다가 다리를 움켜잡았다.
의식이 돌아오며 점점 더 고통이 극심해진다. 잘려 나간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광경들이 너무도 참혹하다.
“이…….”
모두 죽었다.
이곳을 지키던 이들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그 하나뿐이다.
“이…….”
조금 전까지 대화를 하고, 같이 밥을 먹던 이들이 처참한 시체가 된 광경을 눈으로 본다는 건 지옥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저 강력하기 짝이 없던 창왕계와의 지독한 전쟁을 지속해 오면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다. 그들은 더없이 강하고 위협적이지만, 적어도 맞서 싸워볼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저런 놈들을 대체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지?’
마음 어딘가가 꺾이는 기분이다.
마음속에 분노가 들어차 머리가 하얗게 탈색될 지경이지만, 그 분노는 차마 공령을 향해 뻗어지지 못했다.
“우으윽.”
바닥을 움켜잡은 이가 신음을 토하며 몸을 떨었다.
패배.
더할 수 없이 완벽한 패배의 무게 앞에 그의 머리가 점점 더 아래로 떨어진다.
쿵!
피로 젖은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그의 등 위로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날.
홍왕계 스물한 개의 지부가 동시에 궤멸했고, 그 모든 지부를 통틀어 생존자는 채 열을 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