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01
#1900.
얻어맞다 (5)
“피해는?”
“지부…….”
차이커창이 잠시 말을 멈추고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홍왕을 앞에 두고 말을 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더 큰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스물한 곳의 지부가 완파, 그리고 추가적으로 두 곳의 지부가 반파되었습니다. 앞선 스물한 곳의 지부에서 생존자는 일곱, 뒤에 반파된 지부에서의 생존자는 이백, 희생자는 삼백입니다.”
홍왕이 고개를 들어 차이커창을 바라보았다.
“두 지부를 따로 구분한 이유는?”
“앞선 곳은 공격당한 곳, 그리고 다른 두 지부는 그들을 추적하다 전력을 상실하고 추적을 포기한 곳입니다.”
“답지 않은 짓을 했군, 차이커창.”
홍왕이 피식 웃었다.
“지부 정도로 추적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 이성을 잠시 잃었던가?”
“선제적으로 전해놓은 명령을 취소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제대로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홍왕이시여. 제 실책입니다.”
“흠.”
홍왕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스물한 곳의 지부에서 생존자가 일곱이라…….’
놓쳤다?
그럴 리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지부를 몰살시킬 능력이 있는 이들이 달아나는 이들을 놓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본 지부의 인원들이 모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방으로 도주했다고 한들, 도주에 성공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대하기 힘든 실수. 그게 아니라면…….
“앞서 도주한 생존자들의 상태는?”
“……정신적으로는 극한에 몰려 있는 것 같지만, 육체적으로는 별 부상이 없습니다.”
“풀어줬군.”
그 멀쩡한 입으로 자신들이 겪은 일과 공포를 사방에 전하라고 말이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외통수군.”
홍왕이 끌끌대며 웃었다.
저들의 생각은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대응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생존자들을 격리해 버리고 다른 이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 공포의 전염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아.’
이미 지부가 궤멸당했다는 소식은 홍왕계 전체에 퍼졌을 것이고, 소수의 생존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생존자들을 격리한다면, 당연히 상부가 뭔가를 숨겨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터.
이리되면 공포가 진정되는 게 아니라 더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어설프게 숨기려 들지 마라,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차이커창 역시 홍왕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저들에게도 동일한 피해를 강요해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겠지. 하지만…… 종적을 잡을 수 없다고 했나?”
“……예. 도무지.”
차이커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홍왕계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들의 종적을 찾으려 한 것이다.
소수의 강자가 다수를 힘으로 압도하는 일이 벌어지는 순간, 다수는 대항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마련이다. 흑왕계는 그저 싸우고 싶을 때 슬그머니 다가와 학살을 강행하고, 반격이 시작될 무렵 슬쩍 빠져 버리기만 반복하면 된다.
‘갉아 먹힌다.’
전력이?
아니. 정신이.
지금은 외곽이 타격당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저들이 중심부를 타격한다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 강한 전력과 더 강한 조직력으로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빠져나가는 이들을 잡고 늘어지기 어렵다.
“날파리 같군.”
홍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대수롭지 않게 비유하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암담한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놈들의 전력이 나와 비등하다고 할 때…….”
“……예.”
“발목이라도 잡고 늘어질 수 있는 이의 수가 몇이나 되지?”
차이커창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홍왕계의 전력을 움직이는 이,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홍왕에게 고해야 할 현실이 너무도 참담하다 보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섯……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다섯이라…….”
홍왕이 낮게 웃었다.
대등한 존재가 다섯이 있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상대의 발을 묶으며 지원을 기다릴 수 있는 무인의 수가 다섯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절망적이로군.”
홍왕이 낮게 침음했다.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나는 수많은 세월 동안 쓸개를 씹으며 중원을 일통하는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그건 지금은 죽은 창왕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고,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이지만, 대적자로서의 창왕은 위대한 이였다. 나는 그와 싸울 수 있었던 시간을 영광이라 생각한다.”
“홍왕이시여…….”
“한데…….”
홍왕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겋리ㅛㅛ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저 흑왕이 깔아놓은 장기판 위에서 놀고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
뭔가 부정하는 말을 해야 할 상황이지만, 차이커창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은 그 어떤 위로조차 그저 얄팍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
“대응은 어찌할 셈이지?”
차이커창이 마른침을 삼켰다.
적의 공격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다.
당연히 지속적으로 공격을 해올 것이다. 이번 전투를 통해 저들은 자신들이 낸 견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고, 홍왕계에 대한 필승법을 확립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공격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극단적으로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
“반드시 공격이 한 번 더 들어올 겁니다.”
“그렇겠지.”
“거기에서부터 반격을 할 셈입니다.”
홍왕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반격이 가능한가?”
“어차피 피해를 입지 않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홍왕이시여, 이 전투를 통해 우리가 피해만 입은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 전투를 통해 저들이 지금의 전력을 잃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한다라…….”
“예!”
차이커창이 단호하게 말했다.
“공격을 받을 때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지부 셋을 날리는 수준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좀 더 추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중도에 물러난 것은 저들 역시 반격을 당하는 걸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적의 공격 방향을 감안했을 때, 효율의 문제든 개인의 문제든 저들은 서로 전력을 합치는 걸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다음에도 공격에 나서는 인원은 한 명!”
“…….”
“오늘보다 더 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단 한 곳에 가용한 전력을 모조리 투입한다면, 하나를 잡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방어를 하느니 마주 찔러 죽이겠다는 건가?”
“어차피 막을 수 없다면, 팔이라도 내놓고 가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왕이 낮게 웃었다.
차이커창다운 전략이다.
차이커창이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이곳은 분명 흑왕이 만들어낸 장기판 위일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장기판 위에서는 결국 승패가 갈리는 법. 어떤 장기도 한 사람이 양쪽을 동시에 두는 법은 없습니다. 승리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곳이 전장이든 장기판 위든 상관이 없습니다, 홍왕이시여.”
그 말에 홍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군. 내가 잠시 강건하지 못했다.”
“저들은 분명 강대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 강대함을 유지하기 위해 저희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내주었습니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홍왕계의 평무사들은 개미와도 같을지 모르지만, 개미조차 몇 만이 넘어가면 사람 따위는 백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흐으음.”
“중원을 일통하며 이룩한 전력은 홍왕의 방패가 될 것이며, 또한 창이 될 것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홍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 말에 틀림이 없다.”
홍왕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의 방식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내가 지금껏 해온 것이 틀렸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옳고 그름은 누구의 목이 먼저 떨어지느냐로 판가름이 날 터.”
“…….”
“우리가 평생을 바쳐 온 홍왕계가 몇 번의 공격으로 겁을 먹고 달아나는 오합지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 우리가 이룩한 세력이 중원 최강임을 증명하라.”
“예, 홍왕이시여!”
“그리고!”
홍왕의 눈이 금빛의 안광이 솟구쳤다.
“흑왕이 저들을 말로 부린다면, 나 역시 너의 말이 되어주겠다.”
“그, 그 말씀은…….”
“한 놈쯤은 내가 잡아주어야 면이 서겠지. 네가 예상하는 공격로에 나를 배치하라. 내가 네 부담을 덜어주겠다.”
차이커창이 고개를 확 숙였다.
“호, 홍왕께서 직접 나설 필요까지는…….”
너무 이르다.
아니, 이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홍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태가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전면에 나선 적이 없던 사람이다.
그런 홍왕이 이제 겨우 탐색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제 스스로 방벽이 되겠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일한 소리.”
홍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적이 노리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하는 법이지. 창왕이 내게 그걸 가르쳐 주었고, 마왕이 내게 그 사실을 절감하게 했다.”
“…….”
“뒤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기를 만들어줄 수 없다면, 내가 있는 곳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켜 줄 것이다.”
“화, 황공하옵니다!”
차이커창이 크게 소리치며 머리를 조아렸다.
한 곳을 막아낼 수 있다면 사태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다. 그리고 두 곳을 제압할 수 있다면 상황은 극단적으로 유리해진다. 소수라는 것은 저들의 장점이지만 더없는 약점이기도 하다.
단 한 명의 고수를 잃는 것만으로도 전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으니까.
“명대로 시행하라.”
“예, 홍왕이시여!”
차이커창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총회는 어찌 되었는냐?”
“지원 준비는 거의 끝냈다고 합니다. 이쪽에서 요청만 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요청은?”
“아직은…….”
홍왕이 눈을 찌푸렸다.
“혹여 네게 아직 총회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남아 있느냐?”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차이커창이 낮게 말했다.
“받는 것이 있다며 내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저는 저들의 개입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것뿐입니다.”
“흐음.”
홍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네가 생각하는 게 낫겠지.”
“…….”
“하나 기억하라, 차이커창. 남은 것이 없다면 나눌 것도 없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홍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태사의에 앉았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홍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차이커창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대전을 빠져나왔다.
탁.
문을 닫은 차이커창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저 기습을 한 번 당했을 뿐이다.’
전력의 피해는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흘러가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똑똑히 보여주마, 흑왕!’
그리고…….
저 총회에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