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22
#1921.
반격하다 (1)
적의라는 건 살면서 수도 없이 맞이하게 되는 감정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는 법.
모두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사람이란 결코 모두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스스로의 잘못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관계와 관계 사이에 적의는 반드시 생겨난다.
그리고…….
이 적의라는 감정에는 꽤 재미있는 특성이 있다.
바로 다른 감정들과는 달리 누군가 표출하는 적의의 크고 작음보다 나에게 적의를 품은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점이다.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이는 아무리 과격한 적의를 품는다고 해도 조금의 위협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막대한 힘으로 나를 짓누를 수 있는 이가 조그마한 적의라도 품는다면, 그 상황은 더없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법이 아니던가.
그리고 지금.
낭곤은 비할 바 없이 강대한 이가 그에게 적의를 품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살기에는 익숙하다.
그는 전장에서 살아온 자.
전장의 피를 물처럼 마시고, 적의 살을 뜯으며 자신을 완성한 자다.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애저녁에 극복했다.
적이 내뿜는 살기 따위에는 코웃음을 쳐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존재가 그에게 적의를 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육체는 지금 지금까지 그가 알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으득.
낭곤이 입술을 콱 깨문다.
자신이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아니다.
낭곤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완벽한 이.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자였다.
마존.
고금제일마. 아니, 고금제일인.
낭곤의 명성이 아무리 드높았다 한들 저 마존의 이름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일 뿐이다.
그 위명. 아니, 그 악명.
강호에 몸을 담은 이라면 모를 도리가 없다.
심지어 저 흑왕조차도 한때 마존의 휘하에 있지 않았던가.
‘모르겠지.’
저 뒤에 서 있는 이들도.
심지어 그 마존에게 구원을 받은 홍왕조차도.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은 마존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인이라는 존재가 희귀종이 되어버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입술을 깨문 것은 그저 이 적의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함이다.
보라.
지옥으로 가는 문이라도 열린 듯, 마존의 몸 주변으로 검은 마기가 일렁였다.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은 마기가 품고 있는 힘의 차원을 넘어 말도 안 되는 압박감을 선사했다.
우드드드득!
낭곤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파권이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얼굴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두려움, 공포, 껄끄러움.
그리고…….
기대와 흥분.
상반된 두 경향의 감정이 동시에 북받친다.
그 표정을 본 낭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머저리 같은.’
마존을 상대한다는 것은 더없이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무인이라면 고금제일마라 불리는 마존과 겨뤄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 무인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석상처럼 서 있는 홍왕에게로 향했다.
‘네 말이 그리 틀린 게 없지.’
무인이라면 가슴 뛸 일.
하지만 그도, 파권도 이제는 더 이상 순수한 무인일 수 없었다.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존재를 인정하고 굴복한 순간부터 그들은 그저 사냥개가 되어버린 것이니까.
세상의 모든 무인에게 동등하게 가져다 댈 수 있는 잣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낭곤은 알고 있다.
머리 위에 단 한 사람조차 인정하지 않던 이들.
오로지 저항하고 밟고 올라서는 것밖에 모르던 이들이 공포에 질려 굴복한 순간부터는 더는 과거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포장해 봐야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저 호기와 투쟁심이 거슬리는 것이다.
“……정신 차려, 멍청한 놈아.”
파권의 시선이 낭곤에게로 향한다.
“달아난다.”
“…….”
파권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낭곤에게 있어서는 이게 최선이자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건 예상외의 사태다. 달아나 흑왕께 보고 해야 한다.”
알고 있다.
이건 변명이다.
흑왕이라면 여기서 그들의 소식이 끊기는 순간, 모든 것을 짐작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저들의 움직임을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흑왕을 들먹이는 것은 이성을 잃고 날뛸지도 모르는 파권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잊지 마라, 우리가 무얼 위해 싸우는지.”
파권의 눈이 살짝 가라앉는다.
여전히 그 눈에 노기가 가신 것은 아니지만, 한결 차분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빌어먹을.”
파권 역시 그의 말을 이해한 듯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앞으로 쏠려 있던 무게 중심을 뒤로 뺐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파권이 그의 말을 이해해 준 덕분에 일이 한결 편해졌다.
문제는…….
저들은 그의 말을 이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 정도겠지.
저벅저벅.
입에 담배를 문 강진호가 천천히 낭곤을 향해 다가온다.
그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낭곤의 뇌리에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저 쇠마저도 녹여 버리고 찢어버릴 것 같은 마기의 파동 속에서 잘도 저 부드러운 담배가 버티고 있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강진호가 입에 담배를 문 채 말한다.
“누가 날 상대할 거지?”
“…….”
낭곤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둘 중 하나가 마존을 상대한다면, 남은 이는 이곳에 있는 네 사람을 상대해야 할 터.
어느 쪽이 달아나기에 좀 더 용이한지 계산하지 않을 도리가 없…….
“나다.”
하나 파권에게는 그 계산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앞으로 두어 발 나서 강진호를 마주하고 섰다. 두 주먹에 모인 기운과 그의 표정만으로도 머리끝까지 차오른 전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강진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그 뒤틀리고 불길한 미소를 본 이라면 누구라도 심장이 차가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손을 앞으로 쭉 뻗은 강진호가 검지손가락을 가볍게 굽혔다.
“와봐.”
파권의 두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의 발이 바닥을 박찬다.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검은 유성이 된 그의 몸이 강진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낭곤이 뒤쪽으로 몸을 띄워 날렸다.
달아난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와 파권은 십이비도라는 같은 이름으로 얽혀 있지만, 딱히 서로 동료라고 부를 만한 관계는 아니다. 그 말인즉, 누군가를 상대하기 위해서 손발을 맞춰본 적은 없다는 뜻.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에야 임기응변으로 합공을 펼칠 수 있지만, 적의 힘이 대등할 때는 함께 싸우는 게 오히려 독이 된다.
반면, 총회의 무인들은 분명 함께 손발을 맞춰온 경험이 더 많을 터.
일단은 마존과 저들을 분리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딜!”
콰아아아아아아!
조금 전에 본 권력이 그의 퇴로를 막으며 날아든다.
순간, 그 권력을 몸으로 받아내며 퇴로를 확보해 볼까를 고민한 낭곤이지만, 우선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들의 능력을 잘 모른다. 도박이란 상대와 자신을 가늠하고 나서야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법.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멈춰 선 그가 먹이를 노리는 야수 같은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전방에 바토르와 장민, 후방에서 위긴스와 방진훈이 그를 포위하고 거리를 좁혀 다가오고 있었다.
“다 비켜라. 내가 상대한다.”
“아니. 진정하십시오.”
바토르가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서려 하나, 위긴스가 그런 그를 만류했다.
“호승심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십이비도는 아직 열이나 남아 있으니, 바토르 님이 홀로 그들을 대적해야 할 순간은 반드시 올 겁니다.”
“…….”
“지금은 확실하게 저들에게 피해를 줘야 합니다. 이쪽은 피해를 입지 않고 말이지요.”
위긴스가 빙그레 웃으며 낭곤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여유가 거슬린다.
“확실하게 잡아내지 못한다면 저들에게 얕잡아 보일 뿐입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지요.”
“그렇지.”
장민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눈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낭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달아나지만 못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어설프게 넷이 한 번에 달려들었다가는 오히려 기회를 줄 수도 있을 텐데?”
“그건…….”
“그렇지! 영감이 이해력이 좋군! 다 늙어서!”
“……넌 주둥아리를 좀 닥치는 게 좋겠군.”
장민이 손짓했다.
“퇴로는 내가 막는다. 확실하게 처리해라.”
“하핫!”
바토르가 앞으로 한 발을 뻗었다.
쿠우웅!
딱히 내력을 실어 밟은 것도 아니건만,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발걸음이다.
“백연홍 놈에게 해야 할 복수를 여기에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지! 사지를 찢어주마!”
자신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바토르를 본 낭곤이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이가 없군.”
오만함 따위는 없다.
전장에서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강함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아니, 때로는 강함이라는 게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생존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긴장하는 이유는 저기에 마존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 따위가 나를 상대로 여유를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 순간, 바토르가 발출한 권이 낭곤에게 날아들었다.
딱히 빠르지 않은, 피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하지만 낭곤은 피하지 않은 채 날아드는 권력을 맞받았다. 그가 한 말이 그의 발목을 묶어 이 자리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교차한 곤과 부딪친 권력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그 여파에 바닥을 딛고 있던 낭곤의 발이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뒤로 한 걸음을 내딛고 만다.
낭곤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좋은 얼굴이 되었군.”
“…….”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내 마음에 들도록 완전히 뭉개줄 테니 덤벼봐.”
꾸우욱.
곤을 잡은 낭곤의 양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입이 비틀리듯 열렸다.
“……우선 너를 죽이면 길을 열기가 쉬워진다는 건 이해했다.”
“멍청한!”
그 말이 신호가 되듯 바토르와 낭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우우우우웅!
주먹에 몰려든 기운이 그 안에 온전히 담기지 못하고 주먹 밖으로까지 나와 휘돌았다. 마치 수천 마리 벌 떼가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토르의 일권이 낭곤의 가슴을 향해 폭발적인 속도로 뿜어졌다.
하지만 상대는 백승무적곤!
낭곤이자 낭왕! 전투에는 누구보다 익숙한 이.
휘릭!
허공에서 한 바퀴 휘돈 곤이 내뻗은 바토르의 주먹을 내려친다. 뻗어지던 권력의 방향이 뒤틀리며 낭곤의 몸이 아닌, 바로 아래 바닥으로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래에서 일어나는 폭발에 몸을 들썩이는 순간,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낭곤의 권이 바토르의 아래턱에 빛살처럼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