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31
#1930.
분쇄하다 (5)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살아가며 실수를 저지르지 않거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잘못에는 당연히 처벌이 따르기 마련이다.
실수에 대한 합당한 처벌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제대로 된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사람은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고, 결국에는 스스로를 망치게 되는 법이다.
신창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명하지 않는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지르지 않아야 할 실수를 해버렸다면, 그에 대한 벌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신창의 얼굴은 더없이 희게 질려 있었다.
부상이 깊기 때문에?
아니다.
그가 홍왕에게 입은 부상은 물론 무척 깊다. 하지만 그 부상이 지금의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를 숨도 못 쉬게 압박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앞에 있는 한 사람의 존재였다.
“흐음.”
잔에 담긴 붉은 와인이 가볍게 흔들린다.
동그란 유리잔을 가볍게 흔든 흑왕이 느긋하게 한 모금의 와인을 마시고는 가만히 신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투명한 시선을 마주한 신창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뒷머리가 축축하게 젖어들고, 식은땀에 젖은 옷이 등에 달라붙는다.
두렵다.
그래. 그는 이 상황이 너무도 두려웠다.
흑왕에게 자신의 실수를, 그리고 자신의 실패를 보고해야 하는 상황도 두렵고, 눈앞의 존재를 이런 상황에서 대면하는 것도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그에게 대체 어떠한 벌이 떨어질지 예측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신상필벌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조직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수하들이 윗사람을 따르게 만들기 위해서는 합당한 상과 합당한 벌이 필요한 법. 그건 조직을 이끄는 이들에게는 상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흑왕은 그러한 상식에서 이반된 존재.
그는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존재다.
때로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질러도 그저 웃으며 넘어가 버리고, 때로는 별것 아닌 잘못을 저질러도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모조리 겪는 가장 끔찍한 죽음을 선사한다.
그 결정은 온전히 그저 흑왕의 변덕에 달려 있는 것.
다른 이들이라면 오히려 평을 깎아먹을 만한 일이지만, 흑왕은 그마저도 자신의 카리스마로 만들어 버린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란 때로는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법이니까.
“그래서…….”
흑왕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파권과 낭곤은 죽었고…….”
“…….”
“너는 간신히 도망쳐 왔다, 이 말인가?”
“…….”
신창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딱히 감정이 담긴 목소리는 아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감안한다면, 되레 지독하게 담담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두렵다.
저 담담한 목소리 뒤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할 말은?”
“저는…….”
신창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알고 있다.
그가 어떤 변명을 하든, 그가 어떤 설득을 하든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흑왕은 굳건한 바위산과 같은 사람이다. 인간의 힘으로 밀고 후려쳐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할 말은 없습니다.”
흑왕이 말없이 가만히 신창을 바라보았다.
“제게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구하지 못한 죄를 묻는다면 얼마든지 받겠습니다만,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제 몸 하나 빼내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흠.”
흑왕의 시선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신창은 굳이 변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다. 그는 자신의 세 치 혀로 흑왕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오만에 젖어 있는 인간이 아니다.
사람은 신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완전함이란 흔들리지 않는 것.
흑왕이 그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존재라면, 감히 그 신성에 의구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일어나라.”
“예!”
신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흑왕을 마주 보았다.
“어땠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말이야.”
“…….”
흑왕의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즐거워 보이던가, 아니면 심각해 보이던가? 아니, 아니겠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겠지.”
“……저는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정도의 거리였다면 제가 아무리 용을 써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
“틀렸어.”
흑왕이 고개를 저었다.
“거리 같은 건 무의미하지. 네가 살아 돌아온 이유는 그저 그가 너에게 흥미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
“원래 그런 사람이지. 눈앞에 있는 것에는 자비가 없지만, 바로 앞에 있는 싱싱한 먹이를 두고 먼 곳에 있는 다친 짐승부터 챙겨두는, 융통성은 없는.”
흑왕이 재미있다는 듯 뇌까린다.
“그렇기에 마존이지. 그래, 그렇기에 적마야.”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십이비도는 흑왕이 심혈을 기울여 모은 그의 수족이다. 다시 말해 십이비도 중 둘이 목숨을 잃은 이 상황은 흑왕의 손이 둘이나 잘려 나간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흑왕의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예전보다 더 과감해졌군. 과거에는 얻어맞으면 목을 베고, 달아나는 적을 쫓아 등에 칼을 찔러 넣을지언정 맞기 전에 먼저 움직인다는 개념은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건 완벽한 오만이다.
먼저 움직인다는 것은 위기에 빠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최소한 불리한 상황에는 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을 때, 사람은 선제적인 타격을 고려한다.
하지만 과거의 강진호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불리하다 생각지 않는다.
그 혼자만의 무력으로 세상이 모두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자신감으로 살아가는 이였으니까.
강진호는 그런 스스로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이의 나사 빠진 짓거리라 자평했지만, 흑왕이 보기에 그건 과도하기 짝이 없는 오만함의 발현이었다.
‘하기야…….’
잃을 것이 없는 이는 오만할 자격이 있다. 그 오만함의 리스크를 온전히 자신이 감당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 강진호가 먼저 움직였다.
다른 이도 아닌, 과거에 그와 싸운 홍왕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격세지감이라…….”
흑왕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은 결국 변할 수밖에 없다.
그건 그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는 세상의 이치다.
하지만 강진호의 변화를 그 두 눈으로 지켜보고, 그 두 귀로 듣는 것은 흑왕에게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묘한 감흥을 가져다준다.
그는 강진호의 변하지 않은 부분에서 과거의 향수를 느꼈고, 변해 버린 강진호의 모습에서 덧없는 세월을 느꼈다.
“결국은 선택해 버렸군.”
흑왕의 시선이 먼 창밖으로 향한다. 통유리로 만들어진 전면창 너머로 울창한 숲들이 보인다.
“결국은 그렇게…….”
저 숲은 과거나 지금이나 딱히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그 숲을 거니는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그 사람일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이 달라지면 입장이 달라지고, 입장이 달라지면 걷는 길이 달라지는 법이다.
“결국은…….”
흑왕은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너무도 드문 일이지만, 지금의 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반드시 적으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적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 그를 죽여야 한다면 그는 오직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인연 혹은 악연.
우정 혹은 증오.
세상의 이치를 논하고 역사의 흐름을 논하지만, 사람의 속 하나 알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선택을 했다면 더는 뒤돌아볼 필요 없겠지.”
흑왕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신창.”
“예.”
“모든 작전을 일시 중단한다. 여기로 남은 십이비도들을 모조리 불러들여라.”
“외곽을 공격하는 이들 모두 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흑왕이시여!”
“서두르라고 해.”
“예!”
의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의도를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수족, 그저 명을 행하는 이들이니까.
신창이 겨우 긴장이 가신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우양이 조심스레 물었다.
“신창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실 겁니까?”
“굳이?”
흑왕이 피식 웃었다.
“실패는 실패입니다. 그를 벌하지 않으면 다른 십이비도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흑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군. 기분이 좋아 용서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그래, 그냥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하지.”
“예.”
리우양은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고 물러섰다.
논리를 논한다면 할 말이 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게 흑왕이 원하는 결론이라면 더 덧붙일 말은 없다.
“흐음.”
흑왕이 가만히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러 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군.”
“…….”
“적어도 내게는 파권과 낭곤을 잃고 도망쳐 온 추악함보다 그 사람의 소식을 가져와 날 즐겁게 해준 부분이 더 큰 모양이야. 딱히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총회가 움직인 이상, 지금보다 더 껄끄러운 싸움이 될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흑왕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왠지 홀가분하군…….”
감은 눈 사이로 과거 강진호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니, 강진호라기보다는 적천마존. 그래, 그 웅대하던 이의 모습이.
그리고 그 뒤로 지금의 강진호의 모습이 떠올라 적천마존의 모습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당신도 느끼고 있을까?’
지금 그가 상대해야 하는 이는 강진호인가, 아니면 적천마존인가.
그를 상대하는 이는 흑왕인가, 아니면 청마인가.
둘은 결국 하나. 하지만 결코 하나가 아니다.
“두 번의 삶을 산다는 건 말이야…….”
“예.”
“한 번의 삶을 두 번에 나눠 사는 게 아니야.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단절이지. 아무리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건 전과 같을 수 없지.”
“…….”
“그렇기에 그리운 건지도 모르지.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과거를 추억하지만, 귀환한 이들은 과거의 자신을 추억하지.”
흑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놓을 수가 없는가 봐.”
“…….”
“그는 나를 알고, 나는 그를 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시절을 마주 본 이. 그렇기에 그는 나의 거울이고, 나는 그의 거울이겠지.”
거울이 서로를 마주 보면 그 안에는 끝없는 세상이 생겨난다.
강진호와 그의 관계는 결국 이럴 수밖에 없다.
“마존이시여.”
흑왕이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휘저었다.
“당신과 나의 전장은 불타는 세상 한가운데일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
전초전은 끝났다.
이제 그와 강진호가 만들어낼 겁화가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겁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