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34
#1933.
대작하다 (3)
유리벽을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다.
위긴스의 시선이 뜻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고는 슬쩍 그 뒤에 있는 커다란 TV에 가닿았다.
“재미있는 일이야.”
TV에 고정된 위긴스의 시선이 다시 노인에게로 향했다.
노인이 그런 위긴스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TV를 볼 수 있었지만, 딱히 내 손으로 TV를 튼 적이 없었지. 정보는 보고서에서 얻을 수 있고, 내 사유에는 저 작은 화면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거든.”
“그랬죠.”
“하지만…… 이 작은 공간이 내 세상의 전부가 되고 나니 저 TV가 더없이 소중해지더군. 처음에는 켜놓는 것조차 딱히 즐겁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하루 종일 저것만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지.”
노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반성하는 중이네.”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TV나 인터넷을 즐기는 요즘 젊은이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노인, 마스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처지가 되어보니, 그들이 그런 매체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될 수 있는 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막상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게야. 그저 이해심 많은 늙은이를 연기했을 뿐이지.”
위긴스는 그런 마스터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겉으로나마 마스터에게 동조하는 말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위긴스는 그런 마스터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특히나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에는 말이다.
“TV를 설치해 드린 게 헛수고는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위긴스가 뉴스에 나온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보며 말하자, 마스터가 미소를 지었다.
“기이하군.”
“…….”
“이제는 마스터의 자리에 올라서 원탁의 지배자가 된 자네에게 아직도 내 조언이 쓸모가 있다니 말이야. 기운을 보면 연이어 마나를 소모한 모양인데, 이 늙은이의 말이 그만한 투자를 할 가치가 있던가?”
“지식은 늘었습니다.”
위긴스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방대한 지식을 얻고, 높은 수준에 올랐습니다. 이제 학식의 영역이라면 마스터조차 제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나는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에 발을 들여 그 모든 것을 얻어 돌아왔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마스터처럼 저 역시 이 상황이 되고서야 하나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동일하게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요.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겁니다.”
마스터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안다는 건가?”
“적어도 제 머릿속에 있는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타인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스터.”
“훌륭한 학생이로군. 아니, 이제는 학생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무색한가?”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위긴스는 새삼 마스터라는 사람이 가진 격을 실감했다.
자신이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땠을까?
평생을 함께해 온 마나를 잃고 금제가 된 채 겨우 세 평도 넘지 않는 방에 갇혀 살아가게 된다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이런 처지가 된다면 말이다.
강진호가 다른 곳에 신경 쓰는 틈을 타 슬쩍 찔러본 말로 허락받은 TV가 마스터의 유일한 친구이자 세상과의 소통 창구다.
일반적인 범죄자들에 비한다면 더 나은 처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평생을 독방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꼭 그리 생각할 수만도 없다.
하지만 지금 마스터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답답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성인 같으시군요. 깊은 깨우침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깨우침이라기에는 거창하군. 그저 자포자기한 것뿐이지.”
“자포자기요?”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능력으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상황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그저 집착하지 않기로 한 것뿐이네. 사람이 맨몸으로 우주로 나갈 수 없다고 답답해하지 않고, 양팔을 휘둘러 하늘을 날 수 없다고 고통받지 않는 것처럼.”
“…….”
“할 수 있던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는 법이지. 그저 만족할 뿐이네.”
“……저는 모르겠습니다.”
위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사람은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려 하고, 로켓을 만들어 우주로 나가려 하죠. 자신에게 없는 것조차 창조해 세상을 넓히려 하는 게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만족하실 수 있으십니까?”
마스터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위긴스에게서 뭔가 말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저를 도와주십시오. 로드께서는 더없이 단호하시지만, 또한 자애로우신 분. 마스터의 죄악을 모두 씻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상황을 베풀어주실 수는 있을 겁니다.”
“내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군.”
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뉴스에 나오고 있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저것 때문인가?”
“예.”
위긴스가 말했다.
“저들이 하고 있는 행동의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흐음.”
“어렴풋이는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짐작은 제각각 다르겠지요. 하지만 마스터, 저는 뭔가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흐음.”
마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고는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고는 천천히 끓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물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자, 포트를 잡고는 잔에 물을 따랐다.
컵 가득 따뜻한 물을 받아 온 마스터가 자리에 다시 앉아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어떤가?”
“……무슨 말씀이신지?”
“꽤 호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한국에서라면 죄수의 신분으로 끓인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
“하지만 북유럽의 몇몇 국가는 죄수들에게 집을 내주고 마당까지 제공하지, 정해진 곳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게 말이야.”
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 따뜻한 물 한 잔이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떤 죄수들에게는 이 전기 포트가 사치의 상징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죄수 주제에 감히 누릴 수 없는 사치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따뜻한 물을 한 번 홀짝인 마스터가 뜻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같은 것이라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진다는 게지. 아무리 해석하고 이해하려 해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른 이유를 찾을 게 아니라 시선을 바꿔봐야 하지 않겠나?”
“시선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위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스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 저들이 다시 움직일지 모릅니다. 명확하게 말씀을…….”
“위긴스.”
마스터의 차가운 시선이 위긴스를 꿰뚫는다.
그 눈빛을 본 위긴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사람의 격이라는 것은 가진 무위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마스터가 증명하고 있었다.
“자네가 하고 있는 건 위악이네.”
“…….”
“스스로가 악한의 가면을 써서 자신에게 오는 가책을 피하려 하는 것 같은데, 그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야.”
“저는…….”
위긴스가 딱히 변명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내가 왜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줄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악하게 굴지 말고 선하게 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닐세.”
마스터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위악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선하다고 믿는 이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거든. 자네는 자네 스스로는 그리 악하지 않으나 악한 척 굴면서 얻는 이득을 버릴 수 없다고 믿는 모양이네만…….”
순간, 위긴스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쏘아보는 마스터의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글쎄, 내가 보기에 자네는 그리 선하지 않네. 아니, 오히려 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비난하셔도…….”
“아니. 이해 못하고 있군.”
“…….”
위긴스가 멍한 얼굴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위악 떨지 말라고 하는 걸세. 자네는 스스로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면피하는 것뿐이야. 자네는 자네 스스로가 정말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째서인 줄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자네들과 싸우고 있는 이들을 악하다 믿기 때문이지.”
위긴스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소리를 들은 그의 눈가가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건…….”
“스스로 악하다 생각하고 인정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적이 악하다 생각하지 않지. 하지만 자네들은 이미 저 흑왕계인가 하는 이들을 악이라 규정했어. 그들이 뭔가 개인적인, 혹은 악한 이유로 세상을 휘젓는다 생각하지.”
“…….”
“자네뿐만이 아니네. 총회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네. 왜? 적을 수없이 쓰러뜨리다 보니 본인이 악에 맞서 싸우는 용사라도 된 것 같은가?”
위긴스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나 이건 마스터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이 아니었다. 떨리는 손끝을 감추기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잊지 말게, 위긴스.”
마스터의 입꼬리가 좀 더 말려 올라갔다.
“악은 자네들이야.”
“…….”
“어떤 곳도 자네들처럼 급격하게 세력을 불리고, 타국을 침공하여 복속시키고, 노예처럼 부리는 곳은 없네. 이 모든 일에 관련이 없는 이들이 본다면 누굴 악당이라 생각하겠는가?”
“저희는 그저…….”
“아네.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 맞서 싸우다 보니 이리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겠지. 그럼 하나 묻겠는데…….”
마스터가 천천히 따뜻한 물을 마시고는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자네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싸우고 있었지?”
“…….”
위긴스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악하게 시작하는 곳은 없지. 그러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변질되고,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유를 만들어내게 되는 법이지.”
“하지만 그건…….”
“저들이 자네들은 공격했는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저들이 서로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전쟁을 하자고 했던가?”
“……그도 아닙니다.”
“그럼 왜 싸우고 있는 건가?”
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위악이란 그런 걸세. 겉으로는 패도를 논하고 악함을 논하지만, 안으로는 사실 나는 옳고, 선하고, 틀리지 않았다 믿는 것.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일 뿐이라 위안하는 것.”
마스터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게, 위긴스.”
“…….”
“어쩌면 용사와 마왕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네. 그런데 용사의 입장에서 마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맞아떨어지는 게 없는 법이지. 스스로의 입장을 분명히 알게. 자네들이 마왕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일지도 모르지.”
위긴스의 눈이 낮게 흔들렸다.
더없는 무거움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