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35
#1934.
대작하다 (4)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담담한 목소리가 폐부를 파고든다.
“내가 이 꼴로 갇혀 있다고 해서 총회에 대한 악감정을 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게. 나는 내가 받고 있는 벌은 무척 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 마스터께서 그럴 분이 아니시라는 것도 알고 있구요.”
마스터가 빙긋 웃으며 위긴스를 바라본다.
“그래. 그래서 자네는 좋은 학생이야.”
“하지만…… 솔직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자네가 말했지.”
마스터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렸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거라고.”
“…….”
“지식이 많은 이가 지혜롭지 못한 이유는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알고 있는 지식을 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지금 자네가 말한 거부감일세.”
위긴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시작은 자신에게서지. 지금 스스로가 어디에 서 있는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를 이해한다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꿀 수 있을 걸세.”
“마스터.”
“총회는 이미 너무 멀리 왔어.”
마스터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흥한 것은 쇠하기 마련이고, 고인 것은 변질되기 마련이지. 대의를 논하는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되는 법이고, 지금 내가 행하는 것이 옳다고 믿어서는 안 되는 법일세. 그래, 위긴스. 이건 자네가 내게 한 말이 아니던가.”
“…….”
위긴스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분명 과도하게 경직되어 버린 원탁을 두고 그가 마스터에게 한 말이다.
“총회는 원탁처럼 오랜 시간 동안 정체되지는 않았네. 아니, 정체라는 게 없었을지도 모르지.”
“예.”
“하지만 총회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겪었네. 그 와중에 너무 것이 오고 갔지. 위긴스, 생각해 보게나. 자네가 생각하는 대의와 회주님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자네는 무엇을 택하겠는가?”
위긴스가 말없이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떳떳하지 못한 것뿐이다.
“잘 듣게, 위긴스.”
“예, 마스터.”
“악당이 될 거라면 제대로 악당이 되게.”
“…….”
마스터가 손에 들린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더군. 힘이 없는 정의는 초라하다고 말이야.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 힘이 없는 정의는 초라할지 모르겠지만, 힘이 없는 악은 그보다 더 한심한 법이지.”
“마스터…….”
“그저 하나만 기억하면 될 일이야. 자신이 백로라 착각하는 까마귀처럼 한심한 생물은 없는 법이지. 까마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그럼 모든 것이 바로 보일 테니까.”
“…….”
“여기까지네. 더 해줄 말은 없군. 나는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이야. 이 이상은 자네의 몫이겠지.”
위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혹여 회주님께서 내 공을 인정해 주신다면 말일세.”
“예.”
“뜨거운 물 말고 홍차 정도는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을 전해주게. 입이 영 심심해서 이거…….”
“……알겠습니다.”
“가보게나.”
“예.”
위긴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돌아서 밖으로 나가는 위긴스를 바라보는 마스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글쎄, 모르겠군. 어느 쪽이 나을지.’
될 수 있으면 홍차가 빨리 이 감옥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 홍차를 마실 수 있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쿠우웅!
문이 굳게 닫힌다.
위긴스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단단히 닫힌 철문이 오늘따라 뭔가 어색하다.
‘악당이라…….’
이쪽이 악당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마스터가 말하는 악이라는 것은, 그저 사람을 죽인다든가, 제 욕망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는 식의 작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닐 터.
이쪽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선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저쪽이 선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어쩌면…….”
위긴스가 굳은 얼굴로 발을 옮겼다.
어쩌면 자신들은 전혀 다른 것을 상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 *
커다란 스피커에서 웅장한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제2번 C단조, 부활.
오케스트라와 성악이 조화된 소리가 커다란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며 압도적인 웅장함으로 실내를 가득 채운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유리잔이 진동할 정도의 커다란 음향.
소파에 앉은 흑왕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음악을 감상했다.
드문드문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 끝이 그게 잠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을 뿐.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이들은 귀를 파고드는 거대한 음악에도 일정 반응하지 않은 채 석상처럼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길고 긴 교향곡.
그 곡이 끝나기를 그저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윽고 오케스트라의 소리와 합창단의 목소리가 최고조에 이르고 긴 여운과 함께 곡이 끝났다.
정적.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정적이 흐르고, 굳게 감겨 있던 흑왕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흐음.”
흑왕의 뒤에 시립해 있던 리우양이 재빨리 잔을 가져와 세팅하고는 와인을 따랐다.
“어떠셨습니까?”
“글쎄.”
흑왕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음악은 잘 몰라서.”
“…….”
와인이 가득 찬 잔을 바라보던 흑왕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는다.
“와인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와인을 잘 모르지만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잘 모르지만 음악을 듣지. 이상한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꿈보다 해몽이로군.”
흑왕이 낮게 웃었다.
“나는 그냥 무지한 것뿐이야. 살아온 날에 비하면 과하게 멍청하고, 과하게 어리석지.”
그가 와인 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멍청하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나는 우둔한 사람이라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군.”
그가 무릎을 꿇고 있는 십이비도들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너희에게는 다른 방도가 있나?”
“없습니다.”
“그래, 그런 거지.”
흑왕이 빙그레 웃었다.
“살아가다 보면 알게 되는 법이지. 세상에 완벽한 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아니, 어쩌면 완벽한 답은 존재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찾아낼 수 없는 건지도 몰라.”
흑왕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창밖의 모습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풀이 죽은 자리에 새로운 풀이 자라고, 죽은 나무가 쓰러져 거름이 된 곳에 새로운 나무가 자라난다. 과거의 풍광과 완전히 같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저곳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직 이곳에 서 있는 인간만 달라졌을 뿐이다.
“삶이 영원하다면 답을 찾고 있었겠지. 하지만 우리 귀환자들처럼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람도 없어. 그렇지 않나?”
“흑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 그건 슬픈 일이야.”
저벅저벅.
창으로 다가간 흑왕이 손을 뻗어 유리를 매만진다.
“한 번의 삶을 사는 이는 명성에 집착하지. 그리고 자신이 그 삶의 끝에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거라 믿는단 말이야. 하지만 이미 한 번의 삶을 겪어본 이들은 알게 되는 법이지. 명성을 쌓아 후세에 전하는 것도, 내가 이룩한 무언가가 회자되는 것도 그저 허무할 뿐이라는 사실을.”
흑왕이 낮게 웃었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다들 나름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가 달라졌던가.
그들이 이 세상으로 돌아와 본 것은 쇠락한 무인계와 정해져 있는 미래뿐이었다.
그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둘뿐이다.
쭉정이만 남아버린 무인계의 가장 윗자리에 올라 바깥세상의 눈을 피해서 반쪽짜리 왕의 삶을 누리든가.
그게 아니면 자존심을 버린 무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바깥 세상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둘 중 어느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반쪽짜리 왕의 삶도 나름 즐거웠을지 모르고, 그들의 능력이라면 드러난 세상에서도 행복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그런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건 이들이 하늘을 그려놓은 천장을 하늘이라 믿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기에 흑왕은 또 다른 선택을 했다.
있을 수 없던 세 번째 선택지.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런 흑왕의 선택에 자신의 인생을 건 이들이다.
“두 사람이 죽었다.”
“…….”
“애석한 일이지. 그래 뜻을 같이하던 이가 둘이나 죽었다는 건 애석한 일이다.”
흑왕이 몸을 돌려 남은 십이비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기서 멈출 건가?”
“아닙니다.”
흑왕이 낮게 웃었다.
“어차피 우리는 한 번, 아니, 두 번은 죽었던 이들이다. 그런데 또 죽는 게 겁날 이유가 있나?”
잔을 매만지던 흑왕의 손이 유리잔을 파고든다. 가벼운 충격으로도 깨져야 할 유리가 깨지는 대신 서서히 녹아내리며 흘러나온 와인이 흑왕의 손을 붉게 적셨다.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죽는 게 두려운 거지. 모두 첫 번째 삶에서 그걸 경험했을 테지?”
“그렇습니다!”
“그럼…….”
흑왕이 기괴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목숨을 바쳐라.”
“…….”
“어떤 삶을 살았는가로 평가받을 생각 따위는 버려. 어떻게 죽었는가로 평가받을 생각도 버려라. 어차피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흔적이 아닌, 영광을 남겨라. 그 영광 아래 죽어라.”
“예!”
십이비도가 일제히 대답을 하자 흑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자. 어쩌면 오늘 이후로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흑왕이 모두를 눈에 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뭔 상관이야.”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가라, 머저리들아. 가장 나중에 죽는 놈은 먼저 죽은 놈들에게 엿이라도 먹여주라고.”
“보중하십시오!”
“살아남으십시오!”
“개소리들을.”
십이비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진중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흑왕을 바라보았다.
“가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몸을 돌려 문밖으로 걸어나갈 뿐이다.
흑왕이 말없이 그런 십이비도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백연홍.”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백연홍이 고개를 돌려 흑왕을 마주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
핏발이 선 눈으로 흑왕을 노려보던 백연홍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을 개병신 취급하지 마십시오.”
“…….”
“놀아야 할 때와 놀지 말아야 할 때 정도는 구분할 줄 압니다.”
“하핫!”
“지옥에서 만나면 그 면상에 주먹 한 방은 처 날려 드리지, 빌어먹을 왕.”
“얼마든지.”
백연홍이 몸을 홱 돌려 문을 빠져나간다.
이윽고 리우양과 둘만 남은 흑왕이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흑왕이시여.”
“이상하구나.”
흑왕이 옅은 미소를 품었다.
“아직 나에게도 긴장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군. 뭔가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
“아무래도 좋아.”
흑왕이 다시 창가로 걸어가 밖으로 보이는 숲을 바라보고 섰다.
“세상은 바뀌지 않아.”
“…….”
“하지만 그 바뀌지 않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악을 쓰는 게 인간이지. 그래. 나는 인간이다, 그 누구보다.”
창을 움켜잡은 흑왕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젠 나도 돌이킬 수 없어. 끝까지 가는 수밖에.”
흑왕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가자, 리우양. 이제 내 차례다.”
“예, 흑왕이시여! 끝까지 보필하겠습니다.”
두 사람마저 떠난 커다란 거실에 다시 한번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더없이 웅장하고, 더없이 강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