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41
#1940.
무너지다 (5)
검은 밴에 몸을 실은 방진훈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뭔 나라 안에서 이동하는 데 차로 한참 가서 비행기를 타고, 그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또 차를 타고 한참 가야 돼!”
“……아니,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국내선 안 타보셨어요?”
“…….”
“안 타보셨구나.”
이현수의 말에 방진훈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왜 안 타봐! 내가 지금까지 해외를 몇 번이나 갔는데!”
“아니, 국내선 말입니다, 국내선. 김포에서 김해라든가.”
“한국에서 이동하는데 비행기가 왜 필요해! KTX 타면 되지!”
“아뇨. 뭐, 빤한 소리를 하시길래.”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방진훈의 눈빛을 본 이현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자고로 선불 맞은 멧돼지 앞은 가로막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이 새끼야, 이동 거리가 다르잖아! 차 타고 네 시간은 달렸다. 한국에서 이 정도면 서울에서 부산 도착했어.”
“애초에 한국이 아니라니까요. 자꾸 그러시네.”
“끄응.”
방진훈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끼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는 도로 밖 풍경이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게 했다.
“이럴 거면 그냥 헬기를 타는 게 낫지.”
“헬기 공수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리고…… 헬기는 항속거리 때문에 한 번에 못 갑니다. 중간에 주유할 곳 찾고 하는 것도 보통 일 아니에요.”
“너, 이 새끼. 그새 홍왕계에 돈이라도 처먹었냐? 하는 말마다 저쪽 편 드냐?”
“제가 돈으로 움직일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니. 영혼도 팔 새끼로 보인다. 왜?”
“제대로 보셨습니다.”
이현수가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그 꼴을 본 방진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돈만 적당히 주면 얼마든지 붙어줄 텐데, 얘들이 가난해서 제 요구치를 못 맞춰주더라고요. 내가 한 5조만 주면 회주님 팬티 색깔까지 불어줄 수 있는데.”
“회주님 팬티 색깔을 네가 어떻게 알아, 이 미친놈아!”
“왜 모릅니까. 훈련하고 샤워하시잖아요. 검은색밖에 안 입으시던데. 왜 그렇게 관심이 없으세요.”
“……미친놈인가, 진짜.”
방진훈이 질렸다는 얼굴로 옆쪽으로 달라붙었다. 최대한 이현수와의 거리를 벌리고 싶다는 듯 말이다.
“기본 상식인데.”
“그런 상식은 세상에 없어, 인마!”
이현수가 피식 웃어버렸다.
간단한 농담이라도 나누는 쪽이 입을 꾹 닫고 가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는 걸 그도 알고, 방진훈도 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뭐가 말입니까?”
“살다 살다 내가 설마 중국 주석을 지키러 가는 날이 올 줄이야. 나는 사실 솔직히 말해 어느 쪽인가 하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는 아주 잘 알겠습니다만, 지금 상황에서 굳이 입 밖으로 내실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참.”
방진훈이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설마 그가 이런 역할을 맡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지.”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위긴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서는 세상 다 통달했다는 듯이 말씀하십니까?”
“……나는 그냥 세상일은 돌고 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네.”
“…….”
“국가와의 관계도 그런 법이지. 때로는 험악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협력을 해야 할 일도 생기는 법이고.”
“홍왕계와 우리처럼 말입니까?”
“딱 적당한 비유로군.”
위긴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지. 시간은 때로 많은 걸 덮어주거든.”
이현수가 뚱한 얼굴로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본 위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니. 뭐, 말씀은 다 맞는 말씀이신데…….”
“맞는데?”
이현수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국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가 좀 껄끄럽달까…….”
“…….”
“영국이 원래 일을 저질러 놓은 뒤 수습 안 하고 대책 없이 토껴 버리는 걸로는 세계제일의 국가 아닙니까. 전 세계에다가 온갖 똥을 다 싸질러 놓는 나란데 시간이 다 덮어준다니…….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았으니까 욕을 퍼먹는구나 싶기도 하고.”
“내, 내 조국을 욕하지 말게!”
“……욕먹을 짓을 안 해야 욕을 안 하죠.”
위긴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이현수가 혀를 찼다.
“여하튼.”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저 멀리 슬슬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봐서는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늦지는 않은 모양인데…….”
“늦었다면 난리가 났겠지.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는 것을 봐서는……. 아니, 아니지. 이 나라라면 주석이 암살당한다고 해도 바로 언론에서 보도하지는 않겠지.”
“재미있지 않습니까?”
“뭐가?”
이현수가 슬쩍 방진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보도 통제와 싸워온 역사라고 할 수 있잖습니까.”
“…….”
“정부가 신문사에 쳐들어가 기자들을 굴비마냥 줄줄이 잡아넣고, 신문사에 깡패들을 투입해서 윤전기를 박살 내고. 진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는 게 이상하지 않던 시절부터 여기까지.”
“……갑자기 뭔 역사 강의야?”
“들어보십쇼. 여하튼 그런 시절에서 어제 대통령이 어디에서 밥을 먹었는지까지 보도가 되는 시대가 됐다, 이거죠. 물론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피로 쟁취한 언론 자유가 한국의 자랑 중 하나인 건 분명하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한국에서 지금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면, 아마 국가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겠죠. 언론은 연일 정부를 때려 댔을 거고, 진실을 알게 된 국민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뛰쳐나와 청와대로 달려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잖습니까.”
“……그렇겠지.”
평소에는 웬만하면 통제에 따르다가 임계점이 넘는 순간에 답도 없이 불타는 한국인의 습성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청와대 담벼락 정도는 무너진다고 봐야 했다.
“선이라고 믿어왔던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게 세상의 아이러니죠.”
“인마, 그 정도 부작용은 감수해야지.”
“그렇죠, 부작용. 예, 부작용. 그런데요…….”
“응?”
이현수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부작용이라는 것은 좋은 결과를 낼 때나 부작용이라는 호칭을 얻는 거죠. 그 결과가 좋은 게 아니라면 나쁨 점이 하나 추가되는 것일 뿐입니다.”
“뭔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뇨.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까지 저는 개개인의 자유도를 높이는 것이 절대적인 선에 다가가는 방향이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거든요.”
“…….”
“그런데 이 일련의 상황을 보고 있으니, 과연 내가 믿는 것이 정말 절대적인 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사람이 한 없이 자유로워지는 게 정말 옳은 방향인가…….”
“뭔 개소리를 하고 있어.”
방진훈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사람이 뭣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하고 사는 게 좋다는 거야?”
“그건 딜레마죠.”
“응?”
이현수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지금 당장 한국 사람들에게 정부가 자신들을 웬만큼 통제해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는 것과 지금 이상의 자유가 부여되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90% 정도는 후자를 택하겠죠.”
“그야 당연하지.”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같은 일이 벌어진 다음에는요?”
“…….”
방진훈이 입을 닫았다.
“아니, 거기서 더 나가서 도시가 불타고, 소요가 일어나고, 여기저기서 죽는 사람들이 나오고 완전 박살이 나는 상황을 두 눈으로 본다면, 그래도 같은 선택을 할까요?”
“그야…….”
“적어도 비율은 달라지겠죠.”
방진훈은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대세가 바뀐다는 말이라면 틀렸다고 소리칠 수 있지만, 비율이 바뀐다는 말은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
“이건 애완견 논쟁입니다.”
“뭔 소리야?”
“비유가 좀 조악하긴 한데…… 사람을 개에 가져다 대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들어주십쇼. 이사님은 한 번씩 이상한 꼬투리에 흥분하셔서.”
“알았으니 말해 봐, 새끼야.”
“그런 겁니다. 커뮤 같은 데 자주 나오는 말인데,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개의 자유를 통제하고 제한한다. 정말 개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려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해줘야 한다’.”
“…….”
“고양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안에만 갇혀 살 애들이 아니라 산과 들에서 뛰어야 할 애들이라는 거죠. 애초에 개나 고양이는 그렇게 태어난 거니까.”
“그러니까, 고양이나 개를 집에서 키우는 게 학대다?”
“학대인지는 모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고양이나 개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죠.”
“그건 또 뭔 소리야?”
“생각해 보십시오. 개는 적당히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에 안락한 숙소를 얻고, 영양만점인 사료를 얻죠. 그리고 현대 의학의 치료까지 받습니다. 야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
“덕분에 배나 되는 수명을 얻고, 편히 살다 죽을 수 있습니다. 대신 단 하나만 포기하면 됩니다.”
“자유?”
“예.”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적당한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에 평온을 얻을 수 있다면, 사람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방진훈이 헛웃음을 치며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 실장, 다 좋은데, 지금 그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무슨 생각?”
이현수가 천천히 입을 연다.
“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얻는 것에 따라서, 그리고 합의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거라면…… 어쩌면 우리가 지향해야 한다고 믿고, 반드시 옳다고 믿은 것들도 다 틀린 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방진훈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위긴스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내가 마스터에게 들은 말과 같은 맥락이로군.”
“예? 마스터가요?”
“그래. 뉘앙스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말이었지. 그리고 마스터는 그게 내가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했지.”
새삼스럽다.
그는 이 대답을 찾아내기 위해서 굳이 한국까지 가서 마스터를 대면해야 했다. 하지만 이현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밴 안에서 그와 같은 곳에 도달한다.
‘확실히 난놈은 난놈이야.’
이현수에게는 핵심을 짚는 감각이 있다.
“그래서…….”
“예?”
“그 사유의 결론은 뭐지?”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결론이랄 게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이현수가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을 보고 싶어 돌린 시선이 아니다. 그저 지금의 눈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동작이었다.
“나를 위해 악당이 될 수 있는가.”
“…….”
“그 문제겠죠, 그저.”
위긴스의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는다.
같은 시작이지만, 그가 도달한 결론과 이현수가 도달한 결론은 달랐다. 이현수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들어가 버렸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부정할 수 없는 결론에 닿은 건지도 모른다.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오겠군.”
“아마도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방진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뭐라는 거야?”
“…….”
“…….”
위긴스가 피식 웃었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지. 잡념은 지우고.”
“예.”
그들을 태운 밴이 북경의 외곽 도로를 달려 깊은 산중으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