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51
#1950.
격변하다 (5)
“후욱! 후욱! 후욱!”
전력질주를 하다 쓰러진 것처럼 거친 숨이 토해져 나온다. 금방이라도 폐가 목구멍을 타고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하지만 이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이밀었다가 빠져나온 이라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다리에 절로 힘이 풀리고,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억지로 힘을 주어 고개를 든 비서장의 시선에 옅은 노란색을 띈 흰 머리 외국인의 등이 들어온다.
‘누구지?’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들 앞을 지키고 섰다는 것보다 건너편에 보이는 공령의 표정이 더 확실하게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어…….”
비서장의 고개가 뒤로 확 꺾인다. 이성이 돌아오는 순간, 그의 뇌리를 채운 것은 주석의 안전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주석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핏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다친 곳은 보이지 않는다.
“뒤, 뒤쪽으로 물러…….”
“너무 물러나지 마십시오.”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리려 한 서기장을 위긴스가 만류한다.
“너무 거리가 벌어지면 지켜 드리기 어렵습니다. 겁이…… 아니, 조금 껄끄러우더라도 지금의 위치에 계시기를 제안드립니다.”
비서장이 주석을 바라보자, 주석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지금껏 입을 닫고 있던 주석이 위긴스의 등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어디 소속인가? 미국? 아니면 홍왕?”
“아니요. 국적은 영국. 그리고 소속은 총회입니다. 한국의 무인 집단이지요.”
“……한국?”
주석의 표정에 혼란이 깃들었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갑자기 이곳에 한국의 무인이 나타난 것도 놀랄 일인데, 그 무인이 금발의 백인이라니. 머릿속에서 정보들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이야기는 나중에.”
위긴스가 말을 끊어버린다. 무례할 수도 있는 언행이지만, 주석 역시 지금 상황의 심각함을 이해하고 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흐음.”
위긴스가 살짝 자라난 턱수염을 쓸어내린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손끝에 머무는 순간,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좀 다급하게 추적하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
“꽤 의기양양하셨을 텐데, 괜찮으십니까?”
공령이 무시무시한 살기가 어린 얼굴로 위긴스를 노려보았다.
‘저 빌어먹을 놈이.’
이죽거리는 입을 당장에라도 찢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와이어를 막아낸 저 투명한 막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무학은 서로가 서로의 기술과 능력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을 때는 무적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상대의 능력을 간파하지 못할 때는 위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그렇기에 이 요란한 기술을 사용하는 그가 암살자라 불리는 것이다.
“이게 뭔 조화인지…….”
괴불도 당혹감을 숨기지 않있다.
텔레포트?
물론 알고 있다. 서양의 무인들이 그런 기술을 쓴다는 것도 이해하고, 최근 창왕계와 홍왕계의 전투에서 커다란 변수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말이 다르다.
그들이 알고 있는 텔레포트란 준비된 마법진을 통해 인원을 전송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어떤 사전 준비도 없이 갑자기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정리하지.”
공령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무슨 수작질을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딱히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너를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정답입니다.”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혹시 알고 있습니까?”
“……뭘?”
“세상 사람들은 실패를 하는 이유가 정답을 몰라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실패는 몰라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알고도 할 수 없어서 벌어지지요.”
“…….”
“자, 그럼 그쪽 분들은 어떨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괴불.”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공령이 짧게 일갈했다.
“부숴!”
“흐으으음!”
괴불이 앞으로 한 발 나서자, 위긴스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승려?”
살면서 승려를 본 경험이야 그리 드물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전신에 피 칠을 한 중을 보는 경험은 진귀하기 짝이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특히나 그 피가 자신의 주먹으로 때려죽인 이들의 피라면 말이다.
“……딱히 종교의 가르침 운운할 생각은 없지만, 그 승복이 조금 무색하긴 하군요.”
“아미타불.”
합장을 한 괴불이 빙그레 웃으며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사바세계는 어차피 고통으로 가득 찬 곳, 살아 고통만 받을 이들을 정토로 인도하는 것은 불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그쪽 부처님께서는 살인이 죄라고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압니다. 하지만…….”
괴불의 두 눈에 붉은 혈광이 어렸다.
“이 내가 지옥으로 가면 그만! 이 한 몸을 바쳐 수백, 수천의 번뇌를 구제할 수 있다면, 어찌 그 길을 마다하겠소?”
“……완전히 미쳤군.”
“하하하하하핫!”
순간, 괴불이 앞으로 치고 나왔다.
그 육체의 움직임만으로 실내에 폭풍이 일었다.
가공할 속도, 누구나 놀랄 만한 속도이지만, 그런 괴불을 맞이하는 위긴스의 두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웅.
그의 손에 잡힌 검이 새하얀 빛을 내뿜는다 싶더니, 위긴스의 앞쪽 바닥이 솟구쳐 오르며 커다란 석벽을 만들어냈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괴불은 그 석벽을 보고도 일체의 망설임을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살짝 앞으로 내민 괴불이 그대로 석벽을 들이받았다.
석벽이 산산조각이 나며 앞쪽이 뻥 뚫린다. 하지만 이내 제이, 제삼의 석벽이 솟아오르며 수십 겹의 벽이 되어 괴불을 가로막았다.
“아미타불!”
괴불이 노호성 같은 불호를 외며 석벽으로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그의 몸이 포탄처럼 틀어박히는 순간, 마나로 강화된 벽들이 마치 두부로 만든 것처럼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수십 겹의 석벽이 순식간에 박살 나고, 거리를 좁힌 괴불이 바닥을 내리밟았다.
“나한(羅漢)!”
그의 주먹에서 뿜어진 붉은 혈광이 위긴스를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든다.
위긴스가 검을 살짝 들어 올리자, 그의 앞에 우윳빛의 막이 생겨나 날아드는 권강을 막아냈다.
카가아아아아앙!
얇은 철판을 해머로 때려 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날아든 권강이 실드를 후려치고는 뒤틀려 천장에 틀어박힌다.
“오오오오오오!”
연이어 내질러지는 십여 번의 권격.
한 번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붉은 권강이 내뿜어져 위긴스가 만들어낸 실드를 후려친다.
권강과 충돌할 때마다 실드가 막대기로 내려친 풍선처럼 뒤틀리고 흔들렸다.
‘무지막지하군.’
위긴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전해지는 힘이 가공한 수준이다. 마치 홍왕의 권격이나 바토르의 권격을 상대하는 느낌.
홍왕과도 같은 막대한 내력에 바토르의 흉성이 더해진 것 같은 권격들이다. 한 번 막아낼 때마다 머리에 뒤집어쓴 종을 망치로 때려 대는 것만 같다.
하지만…….
‘버틸 수는 있군.’
이전의 그였다면 이 일격에 실드가 날아간 채 날아가 처박혔을 것이 분명하다. 과거의 그가 약한 것이 아니라, 저 괴불이라는 자의 내력이 그만큼 가공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가공할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다. 단순히 지식뿐 아니라 마력의 운용조가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뛰어나졌다는 증거!
자신감이 붙은 위긴스가 앞으로 한 발 밀고 나갔다.
‘과하지 않게.’
아직 그는 그가 체화한 것들을 실전에 제대로 적용해 보지 못했다. 한순간에 목숨이 갈리는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이건 더없이 치명적일 수 있으니, 살얼음 위를 걷듯 신중해야 한다.
콰아아앙!
그 순간, 괴불이 바닥을 박찼다.
위긴스의 뇌가 맹렬하게 돌기 시작한다.
내디딘 발끝에서 번져 나간 균열이 바닥을 갈라내는 모습, 허공으로 살짝 솟아오른 괴불이 허리를 뒤틀며 그에게 날아드는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습관처럼 입으로 룬어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채 한마디를 내뱉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완성된 술식이 마나를 끌어 올린다. 손을 타고 룬검으로 밀려 들어간 마나가 룬검의 마법진을 활성화시키며 증폭되기 시작했다.
“어디…….”
위긴스의 입꼬리가 쭉 말려 올라갔다.
그가 검을 앞으로 떨쳐 낸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빛들이 앞쪽에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낸다.
“오오오오!”
하나 괴불은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허공에 새겨진 마법진을 향해 돌진했다.
절대적인 확신.
위긴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내력과 힘으로 부숴 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다. 설사 그의 힘을 도로 튕겨낸다 하더라도 더 큰 힘으로 부숴 버릴 것.
우웅!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더니 커다란 백색의 원을 만들어낸다. 마치 천신의 방패와도 같은 순백의 원을 향해 괴불이 권을 내질렀다.
붉은 유성처럼 화한 괴불의 육체가 빛살이 되어 백색의 원을 향해 틀어박히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괴불의 몸이 백색의 원 안으로 사라진다.
“……어?”
공령의 입에서 답지 않은 멍청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허공에 떠 있는 백색의 원뿐이다. 괴불도, 괴불이 내뿜던 기의 파동도, 심지어는 그가 날려 댄 강기의 파편들조차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괴불은 이 공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우우웅.
그렇게 괴불을 집어삼킨 원이 순식간에 작아지더니, 이내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뭘…….”
공령의 두 눈이 위긴스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 담긴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듯 위긴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집어삼킨 건가?”
“아니요. 저는 그리 대단하지 않아서, 저만 한 분을 구속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저 통로를 연 것뿐이지요.”
“……통로?”
“예. 이곳과 바깥을 연결하는. 저야 아직 부족한지라 급하게 만들면 겨우 그 정도 거리를 이을 수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바닥에 빠지면 스테이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법이지요.”
공령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저놈이 이곳과 지상을 잇는 통로를 만들었고, 괴불, 그 멍청한 놈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 통로로 뛰어들었다고?
“그럼 처음부터 그걸로 왔으면 될 일 아닌가.”
“조금 다릅니다. 블링크는 마나 디텍트를 통해 할 수 있지만, 게이트는 준비가 필요하죠.”
“…….”
“투우사에게 붉은 천이 필요한 것처럼.”
공령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저 말을 해석하면, 이자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바깥쪽에 미리 통로를 열 준비를 해뒀다는 뜻이다.
“사람은 황소와 싸워 이길 수 없지만…… 투우사는 이길 수 있다는 거로군. 힘으로 맞상대 해주지 않으면 되니까.”
“정확합니다.”
위긴스가 미소를 짓는다.
“그래봐야 편법. 고작 5분 정도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지금부터 5분간은 일대일이군요.”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물론이죠. 5분이면…….”
위긴스가 복잡한 룬어가 새겨진 검을 들어 공령을 겨누었다.
“당신 하나 죽이는 데는 충분한 시간일 테니까.”
“…….”
저벅.
공령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촤라라락.
그의 양손에서 와이어가 줄줄이 뿜어져 나온다. 마치 거대한 검은 거미가 사냥감을 잡기 위해 거미줄을 뿌려 대는 것처럼.
“전신 신경에 와이어가 박혀도 같은 말을 지껄일 수 있으면 좋겠군.”
“음, 치과는 질색인데.”
얼굴을 일그러뜨린 공령이 손을 뒤흔드는 순간, 사방으로 흩뿌려진 와이어들이 일제히 위긴스를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