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55
#1954.
교전하다 (4)
“흐으음.”
혈왕이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장내를 주시했다.
‘홍왕이라…….’
생각한 것 이상이다.
물론 그 명성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그리고 그 힘이 그들에 못지않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이미 짐작한 바였다.
다른 십이비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혈왕은 삼왕이라는 존재를 무시하지 않는다. 한 시대를 지배한 이들은 그게 누구라고 해도 범인과는 다른 특별함을 갖추고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뛰어넘는군.’
강하다.
지금 홍왕이 보여주는 권격은 과거 그의 삶을 통틀어봐도 드문 수준이었다. 불문 무학의 극한에 오른 소림이 고승들이나 간간이 보여주던 수준이다.
하지만 저 권력 역시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닐 터.
그것까지 감안한다면, 과거 소림의 고승들에 비해서도 홍왕의 내력이 더 높고 강하다는 의미다.
‘재미있군.’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시에 그 환경을 뛰어넘는 존재.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상상을 초월하는 이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혈왕의 시선이 비척이며 몸을 일으키는 흑의인들에게로 향한다.
아니, 이제는 흑의인이라 부를 수도 없다. 홍왕의 권력이 몸을 감싼 붕대는 갈기갈기 찢어져 반쯤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은 옷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검다’라는 정체성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찢어져 흘러내린 붕대 안에서 드러난 그들의 육체마저도 석탄처럼 검은빛을 띠고 있다.
권격에 찢겨져 새하얀 뼈를 드러내던 상처에 시커먼 살덩어리가 요동친다 싶더니, 이내 빈 곳을 메워낸다.
그 광경을 보며 혈왕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의 힘은 과거에 비한다면 비등하거나 조금 더 우월한 수준에 불과하다.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건 십이비도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생강시들은 과거의 생강시의 수준을 완벽하게 뛰어넘었다.
과거, 중원을 피와 공포로 물들인 그의 강시들보다 최소 세 배 이상은 강하다.
이유?
아주 간단하다. 재료가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는 생강시로 만들 만한 이들을 쉽사리 구할 수 없었다. 무위가 낮은 이들은 생강시로 만들어봐야 재료비가 아까운 수준의 효율밖에 뽑아내지 못했고, 강자들은 생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기껏 구해낸 좋은 재료들은 생강시를 만드는 실험을 하다 구 할 이상 폐기되었기에 완벽한 방법을 확립한 이후에는 쓸 만한 재료가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생에서는 다르다.
그에게는 전생에서 획득한 완벽한 지식이 있고, 굳이 모습을 드러내 다른 이들의 혐오를 끌지 않고도 연구를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의 긴 시간이 있었다.
게다가 혈교라는 사교를 이끌 때에 비해 몇 십 배는 더 수월하게 강시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이들을 수급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흑왕의 대리라는 명분과 귀환자들의 왕이라는 명성이 있기 때문이다.
흑왕의 이름으로 귀환자들을 끌어들이고, 그들 중 적당한 이들을 지원하여 전생의 무위를 되찾게 만들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제압해 강시로 만든다.
‘되레 욕구를 참아내는 게 더 힘들었지.’
흑왕이 적당한 수에서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끊임없이 강시들을 제작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군단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일이 몇 배는 수월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흑왕의 명은 거역할 수 없으니까.
그가 아무리 강시의 대군으로 자신을 보호한다고 해도 흑왕은 간단하게 그 인의 장막을 열고 들어와 그의 목을 날릴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상관없다. 덕분에 강시의 수가 아닌 질을 높이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 홍왕을 둘러싼 강시들은 그가 만들어낸 걸작들. 홍왕이 아니라 누가 온다고 해도 쉽사리 상대할 수 없는 이들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지만, 위대한 결과에는 당연히 희생이 따르는 법 아니겠는가.
콰아아앙!
홍왕의 돌려차기가 생강시의 가슴에 틀어박힌다. 가슴이 움푹 꺼진 생강시가 입으로 검은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 구겨진 종이처럼 처박힌다.
하지만 쓰러진 이의 몸이 이내 들썩이기 시작한다. 가슴이 완전히 함몰되어 즉사해야 마땅한 이가 덜덜 떨며 몇 번 요동을 치더니, 이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쿠득! 쿠드득! 쿠득!
함몰된 가슴 안에서 끔찍한 뼛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내 움푹 꺼진 부분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과할 정도로 부푼 가슴이 이내 다시 쪼그라들자, 처음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강화한 생강시의 육체를 일격에 부순다라…….’
가공할 파괴력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안 되지.’
애초에 홍왕과 강시들은 상성이 좋지 않다. 저런 식으로는…….
그때였다.
위이이이잉!
홍왕의 손끝에 머무르던 황금빛의 권강이 그 형태를 바꾸더니, 마치 길쭉한 칼과 같은 형태를 이룬다. 그 모습을 본 혈왕의 표정이 바뀌었다.
“타아아압!”
홍왕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눈앞의 강시를 강기로 내려친다.
카가가가각!
‘벤다’기보다는 ‘깎아낸다’에 가깝다. 날카롭기 짝이 없게 벼려진 강기가 검디검은 생강시의 어깨를 갈라내며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간다.
카각! 카가가각!
마치 쇠로 쇠를 잘라내는 듯한 소음.
이 공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어떤 상황에서도 무심하게 접근해 공격을 해 대던 생강시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카가각!
강기가 가슴 어림까지 파고들었지만, 그 이상은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홍왕이 눈을 찌푸리며 강기를 풀고 몸을 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 되지.”
등 뒤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홍왕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려찼다.
하지만 발에 걸리는 것은 없다. 대신 그의 허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큭!”
홍왕이 권력을 내뿜어 등 뒤를 쓸어냈다. 일시에 사방으로 주먹을 날려 접근하는 생강시들을 모조리 튕겨내 버린 홍왕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다시 잡는다.
어느새 그에게서 부쩍 멀어진 혈왕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멍청이는 아니로군.”
“…….”
홍왕의 손이 자신의 허리 어림을 더듬는다. 손끝에 축축한 액체가 느껴진다. 손을 들어 손가락 끝에 묻은 피를 확인한 홍왕의 눈이 깊이 가라앉는다.
“몸뚱아리가 꽤 단단하군. 연구해 보고 싶을 정도야.”
“……그쪽이라면 더 적당한 이가 하나 있긴 하지.”
“호오?”
홍왕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마왕의 말이 틀린 게 없었군.’
마왕은 그에게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왜 강진호가 그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흑왕계와 싸운 이후로 그가 겪는 전투들은 이제껏 그가 겪어온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단순히 누가 더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가 극한까지 갈고닦은 무학으로 서로의 약점을 노린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하여 오로지 승리라는 결과만을 만들어낸다.
이제껏 그는 이런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홍왕의 시선이 슬쩍 뒤로 향했다.
장로를 둘이나 데리고 오긴 했지만, 그들은 지금 생강시 하나를 상대하는 데도 버거워하고 있는 중이다.
홍왕이야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강제로 벌리고 숨을 고를 수 있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으며, 심지어 다쳐도 회복해 버리는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
‘이런 놈들이 풀려나면 재앙이다.’
거기다…….
허리춤이 축축하게 젖어든다.
강시들을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건만, 아무리 봐도 저 혈왕이라는 자는 그의 하수가 아니다. 그가 전면에 나서서 강시들과 함께 공격해 왔다면, 이미 자신은 패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상황은 최악 중의 최악.
‘어떻게 할…….’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음?”
홍왕과 혈왕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그들의 바로 앞쪽 허공에 갑자기 새하얀 원이 나타난다.
“엇?”
“뭐냐?”
당황한 두 사람이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 반응으로 두 사람은 이 기괴한 현상이 서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색의 원에서 무언가 검붉은 것이 가공할 속도로 튀어나와 바닥에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지형 자체를 뒤틀어 버릴 듯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함께 세상이 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린다.
“…….”
“이…….”
홍왕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고. 혈왕은 붕대 밖으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표정을 구겼다.
“이 병신 같은 놈이…….”
그 어마어마한 돌격에 휩쓸린 생강시들이 바닥에 처박힌 채 경련을 일으킨다. 홍왕의 권력을 맞고도 벌떡벌떡 일어나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뭐 하는 거냐, 이 멍청한 중놈 같으…….”
콰쾅!
검붉은 인영이 틀어박힌 곳이 단번에 터져 나가더니, 그 안에서 회색빛 승포를 두른 승려가 모습을 드러낸다. 걸치고 있는 승포가 무색하게 붉게 달아오른 승려의 얼굴은 마치 지옥의 수라를 연상케 했다.
“이 마구니 같은 놈이! 수작질을 부려!”
승려.
괴불이 두 사람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별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한다.
“죽여 버리겠다아아아아!”
상처 입은 커다란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노성을 토해낸 괴불이 순식간에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뭔…….”
홍왕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이가 없다 못해 어처구니가 날아갈 판이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홍왕이 괴불에게 신경을 끄고 혈왕에게 집중하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앙!
별장 안으로 달려간 괴불이 뛰쳐 들어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온다.
쿠웅! 쿵!
바닥을 몇 번이고 친 괴불이 몸을 돌려 자세를 바로잡는다. 하지만 충격이 컸는지, 버티지 못한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고 말았다.
“이…….”
괴불이 핏발 선 눈으로 별장 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그 안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여하튼 그 인간은 귀신같단 말이야. 한 놈 밖으로 보낸다는 게 진짜일 줄이야.”
커다란 덩치.
거대한 체구를 가진 홍왕을 작아 보이게 만들 만큼 거대한 덩치의 사내.
이전에 비해서는 나름 사람다운 크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거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바토르가 씨익 웃으며 걸어 나온다.
큼직한 걸음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바토르가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후려쳤다.
“너는 내가 상대해 주…….”
“바토르!”
“음? 뭐냐, 홍왕. 아직 시간을 끌고…….”
“바꾸자!”
“……뭐?”
홍왕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이쪽은 네가 맡는 쪽이 낫겠군. 내가 저놈을 상대하마.”
“뭐라는 거야? 여기 있는…… 저건 뭐냐?”
그를 둘러싸며 다가오는 생강시들을 본 바토르가 고개를 살짝 꺾었다.
“미친놈들인가?”
“카아아아악!”
선두의 생강시가 바토르에게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긁는다. 시커멓게 물든 손톱이 더없이 날카롭게 바토르를 긁어 댔다. 저 홍왕의 육체마저 가볍게 꿰뚫는 날카로운…….
가각! 가가가각!
“뭐야, 이건?”
……그 날카로운 손톱이 바토르의 육체에는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쾅!
생강시의 턱을 후려쳐 날려 버린 바토르가 콧김을 내뿜었다.
“뭐, 여하튼 좋다! 이것들을 다 조지면 된다는 거지? 간만에 몸 좀 풀겠군.”
생강시들을 향해 달려드는 바토르를 보며 홍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상성이란 게 정말 무섭군.”
이제 혈왕도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