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57
#1956.
신음하다 (1)
바토르 쪽을 바라보던 홍왕이 시선을 앞으로 돌린다.
‘확실히 상성이라는 건 무섭군.’
과거, 홍왕은 벽을 초월한 이들끼리의 전투는 상성에 얽매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만류귀종.
모든 강은 결국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초인이라 불려야 마땅한 이들과 전투를 치르면서 그런 홍왕의 생각은 완전히 수정되었다.
만류귀종이란 모든 것이 끝에 이르러서는 같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창을 완벽하게 익혀낸 이는 검을 들어도 그 검을 창처럼 펼쳐 낼 수 있고, 창을 들어도 그 창을 검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단점을 보완하여 균형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장점을 극한까지 갈고닦아 그 단점마저 덮어버리는 게 진정한 만류귀종이다.
결국 극한으로 갈수록 상성은 생각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거기까지는 이제 이해가 끝난 홍왕이지만…….
‘또 이런 경우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군.’
홍왕의 시선이 그의 앞쪽에 서 있는 괴불에게로 향한다. 치솟던 노기를 어느 정도 가라앉혔는지, 괴불의 얼굴이 본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중치고는 성격이 급한 모양이군.”
“아미타불.”
“아니, 성격만 급한 게 아닌가?”
괴불을 바라보는 홍왕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물론 조금 전 혈왕을 대할 때만큼 혐오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은 아니지만, 분명 적의가 어려 있었다.
“승복을 입고도 이토록 피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라니, 차림이 무색하군.”
홍왕이 차가운 눈으로 괴불을 노려보았다.
저번 신창과 싸웠을 때만 해도 십이비도나 흑왕에 대한 적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서로 다른 길을 가기에 어쩔 수 없이 싸울 수밖에 없지만, 딱히 저들을 증오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상대하는 이들은 다르다.
인간이라고 칭하기도 역겨운 혈왕도 그렇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괴불 역시 그의 신경을 있는 대로 긁어 대고 있다.
무엇보다 홍왕을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은 저 승복을 입은 살귀에게서 은은한 불문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폼으로 승포를 입고 다니는 게 아니라 정말 불문의 무학을 익힌 이라는 점.
그 순간, 홍왕의 눈이 살짝 떨렸다.
“……너, 혹시 마불(魔佛)인가?”
“아미타불,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구려.”
홍왕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마불.
저 천 년 소림이 낳은 희대의 배덕자. 소림 역사상 최고의 천재였다 불리는 육조 혜능을 뛰어넘어 소림을 반석에 올릴 기재라 불리던 이.
하지만 그는 소림의 바람과는 달리 불문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무학을 쌓아 올렸다.
거기까지였으면 마불이라는 이름을 얻을 이유도 없고, 그 마불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불이 무인계의 역사에 그 이름을 각인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무학을 완성하겠다고 달마동에 제 스스로를 가둔 마불이, 어느 날 달마동을 부수고 뛰쳐나와 소림승들을 상대로 잔혹한 학살극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날, 마불의 손에 죽은 소림승만 해도 삼백이 넘는다고 전해진다.
결국 소림승들의 합공을 이겨내지 못하고 숭산에서 달아난 마불은 소림의 황포가 아닌 평범한 승포를 입고, 스스로를 여래라 칭하며 강호행을 이어갔다.
소림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죽이고 싶어 하고, 천하의 모두가 그런 마불을 경원시했지만, 당대의 그 누구도 마불의 무학을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그가 스스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강호는 수도 없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런 이가 지금 홍왕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네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네놈이 주화입마로 미쳐서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그렇소이까?”
“한데…… 지금 보니 아니로군. 주화입마라면 죽고 다시 태어난 새로운 육체에서는 제정신을 되찾았을 터. 그럼에도 네놈에게서 흉성이 느껴진다는 건, 그 모든 게 네 의지였다는 말이로군.”
괴불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소이다, 시주. 소승은 단 한 번도 미쳐 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내 의지가 아닌 일을 해본 적이 없소이다.”
“그럼 왜 그랬나?”
홍왕이 이를 악물고 괴불을 노려보았다.
딱히 스스로 소림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림이 이어오던 무학의 명맥은 이미 오래전에 끊겼고, 이제 소림은 그저 커다란 사찰이자 관광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스로가 불문 무학의 적통을 잇는다는 자부심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니 괴불을 마주하고 웃을 수 없는 것이다.
“왜라…….”
괴불이 빙그레 웃었다.
“시주께서는 불법을 따르시오?”
“비록 내가 출가는 하지 않았으나, 불법을 거부해 본 적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불문의 속가제자라 할 수 있겠지.”
“그러시구려. 시주, 그럼 내 하나 묻겠소이다. 시주께서는 윤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윤회?”
“믿소?”
홍왕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 믿는 종교를 하나만 택하라면 주저앉고 불교를 택할 홍왕이지만, 윤회를 믿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믿소이다. 내가 그 증거이기도 하고.”
괴불이 빙긋 웃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윤회를 믿소. 공덕을 쌓아 윤회를 거듭하다 보면 결국은 부처가 된다는 말도 한 점 의심 없이 신뢰한다오.”
그 목소리에 조롱의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꽤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믿는 불법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가르치지 않은 모양이지?”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괴불이 더없이 맑은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가르침이란 언제나 옳소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중 더 옳은 가르침이 있는 법이지. 내가 불가에서 배운 가르침 중 가장 귀한 것은 대자대비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외다.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제 한 몸을 아끼지 않고,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라는 말 역시.”
“그런데 사형제들을, 스승을 죽였다고?”
“그것이 바로 자비요, 시주.”
“뭐?”
홍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놈이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자비? 지금 자비라고 했는가?”
“그렇소이다. 그게 더없는 자비요, 시주.”
“미친 소리 작작하시지.”
괴불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보시오, 시주. 시주는 윤회가 뭐라고 생각하오?”
“……다시 되살아나는 것 아닌가? 불법을 갈고닦아 해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그렇소이다. 그게 바로 윤회이지요. 하지만 이런 말도 들어보지 않았소? 인생은 고(苦)요,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외다.”
“…….”
“다시 말하자면,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현세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형벌이지. 불가의 가르침대로라면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불법을 갈고닦아 이 형벌의 수레를 벗어나는 것이 모두의 목표가 되어야 하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잘 들어보시오, 시주. 하지만 해탈에 이르는 이들은 극도로 적단 말이오. 깨우침을 얻는 것은 더없이 지난하고, 공덕을 쌓는 것 역시 쉽지 않소. 특히나 그 시대는 더했지. 쌀 한 줌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여 대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시대에 공덕을 쌓는 건 불가능한 일이오.”
홍왕이 입을 다물었다. 대체 저놈이 무슨 요설을 늘어놓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네가 사형제들을 죽인 것과 무슨 관계냐?”
“모르겠소, 시주?”
괴불의 얼굴이 살짝 뒤틀렸다.
“그런 세상에서 불법을 쌓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오. 결국에는 세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죄를 저지르게 되지. 한데 삼생 동안 공덕을 쌓는다 해도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면 그 공덕은 모두 날아가 버린단 말이오.”
“…….”
“이 윤회의 수레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요. 가혹하지. 더없이 가혹하지. 공덕을 쌓는 것보다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만, 세상은 죄를 저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소.”
“너…….”
“그렇소이다.”
괴불의 얼굴이 마귀처럼 변해간다.
“그럼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소. 살면 살수록 죄를 지을 확률은 더 올라가니까. 차라리 빨리 죽어 깨끗한 혼을 지닌 채 새 삶을 살아간다면, 공덕은 늘어나고 죄악은 줄어드는 것이오!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이 미친놈이!”
홍왕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게 무슨 궤변이냐, 이 마귀 같은 놈아! 다시 생을 산다고 이전보다 죄를 적게 짓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다고!”
“있지.”
“……뭐?”
괴불이 낮게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없어도, 내게는 있지. 나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
홍왕이 입을 다물었다.
“그대 역시 오래 살아왔으니 알 것이오. 그대가 어리던 시절에 비해 지금의 사람들이 얼마나 깨끗하게 살고 있는지. 불과 백 년만으로도 인간은 죄악에서 훨씬 자유로워진다오. 그런데…… 배가 고프다고 사람을 죽여 인육을 뜯어먹던 그 시절을 죄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게 가능 할 것 같소?”
홍왕이 아연한 얼굴로 괴불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하지만 저 괴불은 지금 스스로의 말을 완전히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괴불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이 든 사형제들을,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을 죽이는 것이 즐거울 리 있겠소? 하나 그 모두가 그들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기 위한 고육책일 터. 나는 나를 지옥으로 몰아 그들을 구원하려 하오.”
“미친놈…….”
저건 완전히 돌아버린 놈이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그리 화낼 것 없소. 생을 잃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나, 결국은 윤회의 굴레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 지금 그대의 삶 역시 수백 번의 삶 중 하나에 불과하오.”
“…….”
“더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내가 목숨을 빼앗았을 때 그들은 나를 원망했겠지만, 훗날 그들이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내게 감사하게 될 것이오.”
홍왕이 멍한 눈으로 괴불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수많은 적을 만났다. 하지만 이런 미친놈은 생전 처음이다.
그를 정말 아연하게 만드는 것은 저자가 자신의 논리를 신앙처럼 믿고 있다는 것이다. 날카로운 명검으로 찔러 대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하기 짝이 없는 믿음.
그 뒤틀린 믿음이 구역감을 자아낸다.
“네 말대로라면…….”
홍왕이 이를 갈았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너를 죽여주는 것 역시 구원이고 자비겠군!”
“이해한 모양이구려, 시주.”
괴불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사양하겠소이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지은 몸. 내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다짐한 몸이외다. 오시오, 시주. 그대의 삶을 내 구원해 주리니.”
“이 미친놈이!”
홍왕이 고함을 내지르며 괴불에게로 내달렸다.
그런 홍왕을 바라보는 괴불의 두 눈에 섬뜩한 흉성이 어렸다.
“아미타불! 죽음은 곧 구원이오! 살인은 곧 자비이리니, 살계를 열어 중생을 구휼하사!”
괴불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핏빛 혈광과 홍왕의 금빛 권강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