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64
#1963.
경외하다 (3)
카가가가각!
얇디얇은 와이어가 전신에 난 균열 사이로 파고든다.
아무리 그 피부가 단단하다고 해도 속살까지 그와 같은 강도일 수는 없는 법.
예기가 가득 담긴 와이어가 혈왕의 근육을 갈라내고, 뒤이어 밀려 들어온 마기가 그의 전신으로 파고든다.
“끄륵, 끄르르륵…….”
혈왕의 몸이 뒤로 뒤틀렸다.
핏발로 가득 찬 두 눈이 혈기 없이도 붉게 빛나고, 벌어진 입으로 피거품이 차오른다.
전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감각.
면도날보다 더 예리한 와이어가 몸을 파고들어 베어내는 감각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그만한 인내력이 없다면 혈왕이 지금 같은 수준에 오를 수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딴 것이 아니었다.
와이어를 타고 그의 몸을 파고드는 마기가 차마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만들어낸다.
마치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날카로운 바늘로 찔러 대는 느낌.
전신이 불에 타는 작열통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도 높은 고통이라고 하지만, 혈왕쯤 되는 이는 몸이 타오르는 고통 정도는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전신을 휘감고 도는 이 고통은 제아무리 혈왕이라고 해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끄륵, 끄르르르륵.”
찢겨진 목에서 피가 진득하게 흘러나온다. 채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목 너머로 흘러 들어가지도 못한 피가 입안 가득 고이며 부글대며 끓어오른다.
전신의 모든 혈관을 수억 마리의 지네가 물어뜯는 듯한 고통.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압도적인 고통 앞에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신음하고 경련하는 것뿐이었다.
시야가 검게 물든다.
눈앞이 점점 더 시커멓게 변하는 이유가 그의 몸을 불태우듯 휘감고 도는 검은 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끄르르륵!”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혈왕은 자신의 몸을 강시로 바꾼 것을 피눈물 나도록 후회했다.
재생한다.
마기에 타들어간 육체가, 와이어에 갈라진 육체가 어떻게든 상처를 수복시키며 다시 재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혈왕에게 그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고통과 마기의 압력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에게 육체가 재생하고 회복된다는 것은 이 고통을 느껴야 할 시간이 늘어난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가 아직 사람이었다면 내력을 끊어내 이 끔찍한 고통의 굴레를 스스로 벗어던졌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강시가 된 몸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움직여 육체를 회복한다.
그렇기에 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전신이 검은 마기로 뒤덮인 혈왕이 꺽꺽대는 신음을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털썩.
그 강대함이 무색하도록 힘을 잃은 몸뚱아리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는 딱히 다를 게 없었다.
저벅저벅.
손에 붙은 와이어를 움켜잡은 강진호가 느긋하게 혈왕에게로 다가간다.
그가 무감정한 눈으로 혈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혈왕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덥썩.
우악스런 손길로 혈왕을 잡아 올린 강진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혈왕의 눈보다 더욱 선명하고 짙은 붉은 눈. 그 눈을 마주한 혈왕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쿵.
한참 동안 혈왕을 마주보던 강진호가 혈왕의 몸뚱아리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손에 붙은 와이어를 털어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
공령이 굳은 얼굴로 그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뭘…… 한 거냐?”
그의 시선이 강진호와 그 앞쪽에 쓰려져 경련하고 있는 혈왕에게로 향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방금 강진호가 저 혈왕에게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을.
“별거 아냐.”
강진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제가 하던 걸 그대로 돌려줬을 뿐이지.”
“……제가 하던 것?”
“사람을 강시로 만들었더군.”
“…….”
설마?
공령의 고개가 혈왕에게로 홱 돌아갔다.
슬쩍 벌어진 입과 초점이 풀린 눈, 그리고 쉴 새 없이 경련하고 있는 몸.
“너…….”
“내 지론은 간단하지.”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피에는 피, 이에는 이로.”
“…….”
“힘을 가진 자가 나약한 자를 농락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강진호의 시선이 저 멀리 쓰러져 있는 강시들에게로 향했다. 그 강화된 육체 덕분인지 이 가공할 전투에 휘말렸음에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강시들에게로.
“사람을 죽이는 자는 자신 역시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고, 사람을 농락하는 자는 자신 역시 같은 꼴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지.”
움찔.
움찔.
바닥에 쓰러진 혈왕이 쉴 새 없이 경련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령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은데?”
“똑같이 돌려준다고 하지는 않았어. 그건 불공평하지.”
강진호의 가라앉은 눈이 공령에게로 향했다. 강진호와 시선을 마주한 공령이 흠칫 몸을 떨고는 입을 열었다.
“뭘…… 대체 뭘 한 거냐?”
“말했을 텐데, 별것 아니라고.”
강진호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냥 지금 자신이 느끼던 고통을 영원히 느끼게 만들어줬을 뿐이야.”
“…….”
강진호의 입가가 뒤틀렸다.
“본인이 모르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건 어렵지만, 알고 있는 걸 겪게 하는 건 간단하거든.”
……영원히?
공령의 뇌리에 조금 전 혈왕의 반응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잔혹하던 혈왕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거품을 토해내던 그 광경을 말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혈왕은 그 순간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영원히 겪는다고?
공령이 몸이 절로 떨려온다.
강시는 쉽사리 죽지 않는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버텨야 한다면 평범한 인간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무인은 한 달은 쉽게 버틸 수 있고, 초인이라면 일 년도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강시는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고도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버텨낼 수 있다.
평범한 강시가 그럴진대, 저 혈왕이라면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살 수 있겠는가.
어쩌면 백 년 이상의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길고 긴 시간을 저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한다고?
이건 불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불타는 것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혈왕…….”
공령은 혈왕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혈왕을 좋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공령 역시 혈왕을 찢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강진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공령과 혈왕 중 하나는 서로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이나 공령은 혈왕을 증오했다.
하지만…….
그토록 혈왕을 증오하는 공령이 보기에도 지금 혈왕이 받고 있는 형벌은 너무도 가혹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 대한 존중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는 인간의 목숨이 가지는 가치와 사람의 목숨이 가지는 가치를 딱히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몸서리를 칠 만큼 저 광경은 너무도 끔찍했다.
바닥에 드러누운 혈왕의 몸에서 점점 움직임이 사라져 간다. 이제는 경련을 일으킬 만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초점을 잃은 채로도 끊임없이 흔들리는 혈왕의 동공은 그의 지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공령이 이를 악물었다.
촤르륵.
그의 손끝에서 와이어가 뻗어 나가 혈왕의 목을 휘감는다. 어차피 그로서는 혈왕을 구할 도리가 없으니, 차라리 그의 목숨을 끊어 저 끔찍한 지옥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다.
혈왕에게 정신이라는 게 남아 있었다면 그런 공령의 시도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쩌면 공령이 생에 최초로 베풀었을지도 모르는 자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카앙!
와이어의 중간이 끊어지며 팽팽하게 당겨졌던 와이어가 축 늘어진다.
공령의 떨리는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찰칵.
어느새 담배 한 대를 빼 문 강진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공령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연기가 강진호의 얼굴을 반쯤 가리며 뭐라 말할 수 없는 퇴폐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가련하기라도 한가?”
“너는…….”
공령이 이를 악물었다.
“너는 심판자도 아니고, 재판관도 아니야. 혈왕이 무슨 짓을 했든 그를 단죄할 자격이 네게 있을 리 없지!”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하지만 공령은 그 웃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더욱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혈왕을 비난하고, 욕하지? 네가 죽인 사람의 수가 혈왕이 죽인 이들의 수보다 더 많을 텐데?”
“…….”
“고통을 주지 않고 죽이는 게 선이라도 된다고 말할 셈이냐?”
강진호가 큭큭대며 웃었다.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이.
“착각하는 모양인데…….”
“착각?”
“나는 그대로 되돌려 준다고 말했을 뿐이지, 심판한 적이 없어. 그냥 거슬려서 짓밟았을 뿐이야.”
“…….”
“그게 불만이라면 네가 나를 짓밟으면 되겠지. 그럴 수 있다면 말이야.”
“잘도…….”
“언젠가는 자신보다 더 강한 이에게 짓밟힌다.”
강진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럴 각오 없이 검을 든 이는 가짜지. 그렇지 않나?”
공령이 입을 다물었다.
강진호의 논리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이자와는 그 어떤 대화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걱정할 것 없어.”
강진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너는 좀 편히 죽여줄 테니까.”
“…….”
눈물나게 고마운 말이지만, 지금의 공령에게는 입으로 감사를 표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벅.
강진호가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옮기며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온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새하얗게 번져 나간다.
죽음.
죽음이 다가온다.
인간이란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강해져도,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아도,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고 해도 결국 죽음이라는 절대의 존재 앞에 인간은 평등할 수밖에 없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결과.
그 선명한 시림이 공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툭.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아 끈 강진호가 양손을 늘어뜨린다.
“큭.”
공령이 최후의 내력을 끌어 올렸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야겠지. 손을 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지독하게 살아온 그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공령이 막 이를 악물고 고함을 내지르려는 바로 그 순간.
우우우웅!
강진호의 바로 옆에서 위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내려선 위긴스가 공령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핏기가 가신 위긴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강진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뭐지?”
“로, 로드……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위긴스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태블릿 PC?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 소리를 하려던 강진호가 그 입을 다문다.
켜진 태블릿 피시의 화면으로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이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청마.”
옅은 울림이 담긴 목소리를 토해낸 강진호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