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66
#1965.
경외하다 (5)
북경.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거대한 교차로. 그 교차로 한쪽 건물 위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에서 광고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사람의 이목을 잡아끄는 광고가 다양하게 흘러나오지만, 막상 그 아래를 지나는 이들은 머리 위로 보이는 광고판에 딱히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배경처럼 생명력 없이 무의미한 화면을 송출하던 화면에 일순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스피커가 없는 화면이기에 소리가 들릴 리는 없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지직대는 소리를 절로 연상케 만들 만큼 선명한 노이즈가 화면을 가득 뒤덮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광경이 지나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제 역할을 할 때는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이상을 보여 제대로 된 영상을 보여주지 못하자 걸음을 멈추고 일제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건 참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지직거리던 화면이 순간 검게 암전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제껏 보지 못한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남자.
화면에 뜬 것은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한 남자의 상반신이었다.
나름 수려한 얼굴이기는 하지만, 그게 특별할 것은 없었다. 저 전광판에 나오는 이들은 다들 미남미녀들뿐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광판을 바라본 이들은 사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 너머로도 전해지는 기묘한 아우라가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뭐지?”
이변을 발견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던 이들 중 하나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옆쪽 상가 안의 모습이 들어온다. 투명한 전면 유리창 안쪽 벽에 달린 TV에서도 전광판과 같은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어?”
사람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지금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엄마!”
“왜?”
“TV가 이상해. 같은 화면만 나와.”
“채널 돌려봐.”
“채널을 돌려도 같은 게 나온다니까?”
“특별 방송 아니니?”
“젊은 사람이 나오는데?”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젊은 여성이 고무장갑을 벗고는 마루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누르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간 그녀가 화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아이에게서 리모콘을 받아 든 그녀가 채널을 돌렸다.
“응?”
채널을 돌려도 같은 화면이 나온다. 꽤 여러 번 채널을 돌리고서야 정상적인 방송이 출력되는 채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뭔지 한 번 보자.”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여러 채널에서 같은 화면이 나온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TV 볼륨을 높였다.
* * *
“저 사람은 뭐지?”
“왜 채널을 돌려도 같은 게 나오지?”
“어? 이거 봐.”
“응?”
“여기도 나오는데? 여기 동영상 사이튼데.”
“뭐가 나온다고?”
“지금 TV에 나오는 화면이랑 똑같은 게 나오고 있다니까? 여기 봐봐.”
“……그러네?”
남자가 휴대폰 화면과 TV를 번갈아 바라본다. 확실히 같은 화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라이븐가 보네?”
“그러니까. 근데 대체 이거 무슨 채널이야? 채널명도 막 지은 것 같은데.”
그때였다.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남자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그러고는 불만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나오고 있는 건 맞아?] [방송 중입니다.] [여기서는 확인이 안 되잖아. 제대로 나오고 있어?] [진짜 방송 중입니다.] [흐으음.]사내가 볼을 긁더니 시선을 여기저기로 옮겨 댔다.
[그럼 시작하면 되겠군.] [예.]정면을 바라본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이들은 모두가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시달려야 했다.
* * *
“여유가 넘치시는군. 재수 없게.”
이번만은 위긴스도 바토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간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은, 전대미문의 사태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음에도 흑왕의 얼굴에는 일말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지인끼리 영상 통화를 하며 장난이라도 치는 듯 여유로움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군.’
이런 느낌은 과거에 강진호에게서도 받았다.
그도 이제 나름 초인의 영역에 오른 사람이지만, 저 강진호와 흑왕만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저들의 사고방식은 평범한 삶을 살아온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위긴스가 자신도 모르게 강진호를 슬쩍 돌아보았다.
담담한 얼굴.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꼰 강진호의 표정만 봐서는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아니, 어쩌면 이 방송을 보고 있는 이들을 모두 통틀어 강진호만이 지금 흑왕이 벌이고 있는 일을 당황하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숙적이라는 건가?’
왜 흑왕이 그토록 강진호에게 집착했는지, 왜 세상 모든 것에 초탈하던 강진호가 흑왕이라는 이름만은 무시해 버리지 못했는지 지금에야 이해할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방 안으로 두 사람이 달려왔다.
주석과 그의 비서장.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주석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위긴스의 물음에 비서장이 대답한다. 왜 일국의 권력자인 그가 아무것도 아닌 민간인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파악이 안 됩니다. 송출을 역으로 추적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셧다운은?”
“몇몇 방송은 바로 끊어냈습니다. 하지만 연결된 채널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걸립니다. 특히나 몇 군데는 지금 연락이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제압이라도 당했다는 겁니까?”
“그건 모릅니다. 현 상황에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대체…….”
“설사 방송을 막는다 하더라도 인터넷 동영상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해외의 서버는 이쪽에서 연결을 끊는 게 불가능합니다. 셧다운을 지시해 뒀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무의미한 짓이야.”
위긴스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놈에게 남아도는게 뭔지 알아?”
“……선문답을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시간.”
“예?”
“이 계획을 떠올린 게 언제쯤일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준비해 왔겠지. 못 막아.”
“…….”
위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만약 흑왕이 십 년 전에만 이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해도 방송국에 사람을 심어놓고 장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혈왕을 활용한다면 사람을 세뇌하는 건 일도 아니었겠군요.”
“아니지.”
“예?”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세뇌와 섭혼이라면 혈왕보다 저놈이 더 전문가야. 놈이 마음만 먹으면 방송국 몇 개를 제 수족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야.”
“…….”
“그러니 보자고, 뭔 말을 지껄일지.”
위긴스가 고개를 돌려 화면에 나오는 흑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지켜보라는 건가.’
사실 위긴스도 알고 있다.
발악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저 화면을 봐버린 이상 지금와 방송을 끊고 인터넷을 셧다운시킨다고 해도 사람들은 제 손으로 저 동영상을 찾아보려 할 것이다.
이 시대는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시대이고, 인간의 호기심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건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위긴스가 의미 없는 발악을 멈추지 못한 이유는 이 허탈함과 무력감 때문이었다.
마치 링 코너에 몰린 채 노 가드로 상대가 날리는 펀치를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는 기분이다.
‘그럼 대체 주석은 뭐였던 거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주석을 지킬 동안 흑왕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른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흑왕의 입장에서 주석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카드가 존재한다는 건가?
그때.
화면 안의 흑왕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음, 이런 소개는 딱히 의미가 없겠군. 딱히 서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러니까 저는…….]화면이 뒤쪽으로 쭉 밀리며 의자에 앉아 있는 흑왕의 전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흑왕이 살짝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뒤쪽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가볍게 손을 휘저어 벽면으로 장력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박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순식간에 반쯤 무너진 벽에 부러진 철골이 삐죽삐죽 흉하게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 화면에 똑똑히 잡힌다.
[이런 사람입니다.]흑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특수 효과라고 생각하셔도 좋고, 조작된 영상이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증명할 방법이야 많지만, 믿지 않으려는 자는 어떻게 해도 믿지 않는다는 걸 저는 이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설득하려 들지는 않겠습니다.]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행위를 똑똑히 지켜본 바토르와 위긴스는 반쯤 넋을 잃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저…….”
“…….”
아주 간단한 한 동작.
그 동작만으로 흑왕은 지금까지 온 세계가 지켜오던 불문율의 벽을 부숴 버렸다. 물리적으로 부서진 것은 콘크리트 벽이지만, 실제로 부서진 것은 세계의 경계를 나눈 벽이다.
구토감이 치민다.
저건 저리 쉽게 부서져서는 안 되는 벽이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벽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지켜왔던 세상의 경계가 산산조각 나 무너진다.
[쉽게 설명하자면, 세상에는 무인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몸으로 불을 만들어내고…….]그 순간, 흑왕의 손끝에서 화염이 타올랐다.
[얼음을 얼리고…….]불이 사라지고, 흑왕의 손끝에 새하얀 서리가 생겨난다.
[조금 전에 보여 드렸듯이 맨몸으로 벽을 부수고, 한 걸음에 강을 뛰어넘습니다. 네. 쉽게 말하면 여러분이 무협 영화나 판타지 영화에서나 보던 이들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죠. 그것도 당신들의 바로 옆에.]찰칵.
강진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짧게 숨을 들이켠 강진호가 길게 연기를 뿜어낸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이…….”
왠지 유쾌하다.
저 벽은 심지어 강진호마저 옭아매고 있었다.
넘으려 하면 넘을 수 있지만, 차마 넘을 엄두를 내지 못한 벽. 그는 두 세계가 뒤섞이는 여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흑왕이 그에게 말하고 있다.
자신은 넘을 수 있다고.
자신은 세상을 뒤흔들고, 뒤바꾸고, 개변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흑왕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어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은 흑왕이 선언하듯 말했다.
[당신들이 알고 있던 세상은 모두 가짜입니다. 진짜 세상은 숨겨져 왔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바뀔 겁니다. 더는 어떠한 권력으로도, 어떠한 폭력으로도 무인이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지울 수 없을 겁니다. 이제 내가 그걸 허락지 않아.]흑왕의 두 눈이 선연하게 빛난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눈.
그 눈이 이 흑왕의 모든 행위가 절대 충동적으로 벌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세상은 바뀔 겁니다. 아니, 세상을 바꿔야겠지. 숨죽이고 있던 이들이 들고일어나고, 우리의 존재를 당당히 밝히게 될 테니까. 잘 들어. 우린 역사 속에서 썩어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서서히 사라져 가는,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 더 나아가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다.]흑왕이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댄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이거였군.”
강진호가 낄낄 웃어 댔다.
강진호의 안에서 무언가가 들끓어 올랐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청마의 웃음소리와 강진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합을 맞춘 것처럼 울려 퍼진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을 나누는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