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73
#1972.
고민하다 (2)
통화가 연결이 되자마자 유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방송 보셨습니까?]마치 우연찮게 TV에 나온 사람이 친한 지인에게 건네는 말 같다. 헛웃음을 흘려 버린 강진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화면발 잘 받더군.”
[보신 모양이군요. 나름 고민 많이 했습니다. 좀 센 컵셉으로 나가볼까. 악당처럼 복면도 쓰고 말이죠. 그래야 사람들이 겁을 좀 먹을 것도 같고.]“멍청한 생각이군.”
[네. 그래서 평소대로 했습니다. 교주님이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차마 반말은 못하겠더군요.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예전에도 알던 일이지만, 이놈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이놈 하나 때문에 지금 세상이 뒤집혔다. 자신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나름 조용한 편이지만, 바깥은 지금 난리도 아니다.
각국의 수뇌부들은 이 사태를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 때문에 연신 밤샘 회의 중이고, 진실을 요구하는 기자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국회와 국가 수뇌가 머무는 곳으로 쳐들어가 시위 중이다.
몇몇 국가에서는 폭동의 기미까지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모든 사태를 만든 놈은 여유롭기 짝이 없다. 그 담대함에는 강진호조차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아주 화려하게 해주셨더군.”
[오래 준비한 일이니까요. 제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이리 긴 시간 동안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해 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하필이면 시행에 거의 도달해서 교주님이 나타나서 식은땀을 좀 흘리기는 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부담이니까요.]“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제가 가만히 있었다면 알아챘을지도 모르죠.]“저 빌어먹을 놈이…….”
이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그 말인즉, 청마가 강진호의 앞에 나타나서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하고, 십이비도 등을 통해 세상을 흔든 일련의 행위에 강진호의 이목을 속이는 목적도 있었다는 의미였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들을 농락한 흑왕의 존재도, 그리고 그 계획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자신도 말이다.
[그래서 감상은 어떠십니까?]“엿 같더군.”
[그리 말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강진호가 청마를 잘 아는 것처럼, 청마 역시 강진호를 잘 알고 있다.
[반면에 통쾌하기도 하셨겠죠. 그렇지 않습니까?]“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제가 아는 교주님은 억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엄정하던 마교에서도 피를 흘려가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던 사람이 교주님이죠. 그러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런 분이 이 세계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제가 하지 않았더라면 언젠가는 교주님이 했을 일이죠. 오히려 저는 교주님이 이런 일을 전혀 시도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의 그 시대에도 수라경을 세상에 뿌려서 뒤틀린 걸 바로잡으려 한 이가 바로 교주님 아닙니까.]강진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심 청마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과거의 강진호였다면 무인계를 일통하는 순간, 바깥세상과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인들을 양지로 이끌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 뒤틀려 있는 세상을 견디는 것 역시 그에게는 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뭘 위해서?”
[예?]“대체 뭘 위해서? 그래서 뭐가 더 나아진다는 거냐? 그렇기 피를 흘리고, 싸워서 얻은 그 지위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냐? 그냥 무인이라는 것만 포기하면 지금도 양지를 걸을 수 있는데.”
[…….]“내 손에 쥔 것은 어느 하나 놓지 못하고, 얻을 것만 얻어내겠다는 건 그냥 투정이지.”
잠시 침묵이 감돈다.
다시 들려오는 흑왕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이거, 놀랐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교주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제가 아는 교주님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무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였으니까요.]“너…….”
[아니요, 아니요. 뭐, 그런 건 별 상관 없습니다. 어쨌거나 강은 건넜고, 화살은 쏘아졌으니까요. 이제 와 뭐가 옳은가에 대한 논쟁 같은 건 쓸데없는 짓이죠.]강진호가 입을 닫았다.
이 말도 맞다.
이런 말은 청마가 일을 벌이기 전에 했어야 하는 말이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다. 청마가 벌인 일이 옳든 틀리든, 제 스스로 멈출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아는 청마라면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멈출 생각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재미있지 않습니까?]“뭐가?”
[과거에는 교주님이 세상을 바꾸려 했고, 제가 그걸 막았습니다. 그 대가로 저는 목숨을 잃었지만, 어쨌거나 저는 무인계라는 곳을 존속시켰습니다. 교주님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결국 모든 것은 파탄이 나고도 남았을 테니까요.]강진호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과거에 그는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의 흐름 같은 것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이었다.
이제는 이해한다, 그가 하려 한 것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세상을 바꾸려 하고, 교주님이 저를 막으려 합니다.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네요. 그럼 그 결과는 또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하나는 알지.”
[물어도 됩니까?]“네가 죽는다는 건 바뀌지 않아.”
[하하하하하하핫!]지체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비웃음이 아니라, 정말 유쾌하다는 듯 터져 나오는 웃음.
[제가 이래서 교주님을 좋아합니다.]“헛소리하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전화한 건 아닐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용건은 간단합니다. 교주님,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아니, 이제 바뀔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생각입니다.]“…….”
[방송을 보았다면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이 일로 인해 무인계를 지배하겠다든가, 혹은 제 권리를 늘릴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이대로는 언젠가 무인들의 세상이 무너지고, 모두가 도태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뿐입니다.]강진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결론을 내린 것은 강진호 역시 같다. 하지만 그 해결책은 서로 달랐던 모양이다.
강진호는 좀 더 강한 통제와 좀 더 완벽한 결집을 노렸다. 날이 갈수록 무인들이 설 곳이 없어진다 해도 총회가 존재하고 총회가 무인들을 지원하는 한, 그리고 세상에 녹아들겠다고 하는 이들을 성공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면, 무인의 세상도 좀 더 지속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청마는 근본을 뒤틀었다.
굳이 우리가 변할 이유가 없다. 변해야 하는 것은 이 잘못된 세상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뀌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꾼다.
‘뭐가 옳았던 걸까?’
그건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진호는 이 과격한 결론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게 오십시오.]“…….”
[제가 먼저 제안드렸습니다, 교주님. 그저 뒤에서 지켜보시라고, 그러면 제가 세상을 바꿔 교주님의 삶 역시 지켜 드리겠노라고.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이게?”
[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될 겁니다. 제가 어떻게 일하는지는 교주님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강진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대 피우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심정이다.
[안타깝지만, 제게는 사람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부족합니다. 제가 사람을 이끄는 방식은 공포로 억압하고, 비전으로 유혹하는 것뿐이죠.]“충분해 보이는데?”
[천만에요. 십이비도들조차도 저를 완전히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방대한 조직을 만드는 걸 깔끔하게 포기한 겁니다. 저는 세상을 바꿀 수는 있지만, 그 바뀐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법 따위는 모릅니다.]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청마가 할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제게 오십시오. 아니, 이런 말은 건방지군요. 제가 하려는 일을 함께해 주십시오, 교주님. 교주님이 전면에서 모두를 이끌고, 제가 보좌한다면, 누구도 저희를 막을 수 없을 겁니다.]“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천만에요. 그건 교주님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교주님은 과거에도 마교를 수족처럼 부렸습니다. 모든 일을 도맡아하던 제가 다른 마교도들의 눈을 피하고 정파를 끌어들여 반란을 획책해야 했을 정도로 공고하게 마교를 장악하셨죠.]“…….”
[그리고 지금은 불과 몇 년 만에 총회라는 조직을 장악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게 교주님이 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멋모르는 멍청한 놈들의 말일 뿐입니다. 그건 무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후우우우.”
강진호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갑갑하다.
가슴이 갑갑해져 온다.
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그의 귀에 청마의 목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만한 설명을 했음에도 자꾸 말을 한다는 것은 청마 역시 강진호의 합류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교주님과 제가 함께한다면, 바꾼 세상을 공고히 하고 무인들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무인들의 세계를 존속시킬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듣던 위긴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스터가 그에게 한 말이 귓가를 맴돈다.
이쪽이 정의라는 발상이 그의 사고를 막고 있다고. 어쩌면 그들이 상대하는 이들이 정의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정말 흑왕이 본인의 이득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인들의 세상을 존속시키고, 그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거라면, 무인들 중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일을 후세가 평가한다면?
후세의 무인이 지금 지금을 돌아본다면 뭐라 평할 것인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설사 방법의 과격함은 논할 수 있을지언정 흑왕을 모든 무인들을 위해 싸운 혁명가라 지칭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 자신들은?
그런 흑왕을 막아서는 자신들은 대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끔찍하군.’
이 상황이 너무 버겁다.
[어쩌면 이미 과거의 그때 이뤄졌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교주님께서 무림을 일통하고 안정화가 될 때까지 시간이 조금만 더 흘렀다면, 그 시대에 벌어졌어야 할 일이겠죠.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청마…….”
[함께합시다, 교주님. 예전처럼, 당신이 이끌고 제가 보좌하는 그때로 돌아갑시다. 그때 하지 못한 걸 지금 다시 이룰 수 있습니다.]그건…….
회유라기보다는 구애에 가까웠다.
어쩌면 흑왕이 강진호를 회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들조차, 설마 저 흑왕이 저토록 저자세로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강진호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모두의 시선이 강진호의 입으로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