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74
#1973.
고민하다 (3)
“이해가 안 가는군.”
강진호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네게 내가 필요한가? 이미 너는 혼자서도 모든 걸 다 해냈는데 말이야. 있는 그대로만 보자면, 넌 이미 이 세계를 혼자 뒤흔들고 있다. 그런데 네게 내가 필요하다고?”
[저는 부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부수고, 파괴하고, 재정립하는 데는 저만 한 사람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이미 결과로도 증명했듯이.]그렇겠지.
말 그대로 방송 한 번으로 이 세상의 질서를 파괴해 버렸으니까.
저 창왕도, 이곳에 있는 홍왕도, 심지어 강진호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세상을 지배하는 각국의 손발마저 묶어버렸다.
이건 흑왕이 아니면 그 누구도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제 능력은 거기까지입니다. 무인 자치구를 평탄하게 이끄는 방법 같은 건 저는 모릅니다. 그건 애초에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향의 문제죠.]“성향?”
[난세의 군왕은 평범한 세상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치세의 명군은 난세에는 책상물림에 불과해집니다. 저는 부수는 사람이지, 이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제게는 뒤가 없다는 걸. 뒤를 위해서는 다른 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해보고 알았는데, 저는 체질적으로 일인자는 맞지 않습니다. 계획은 제가 수립하는 대신에 책임은 남이 져줄 때, 제일 머리가 잘 돌아가더군요.]“어. 그건 그렇지.”
“…….”
모두의 시선이 이현수에게로 향했다.
이현수가 그 시선을 받고는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교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벌인 일의 결과가 어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망하겠지. 처참하게.”
[하핫, 저도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의외로 쾌활한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교주님이 있다면, 그리고 교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저를 지지해 준다면, 그러면 세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손에 넣은 강력한 위협에, 총회와 홍왕계라는 전 세계 최대 세력의 힘이 더해진다면, 말 그대로 전 세계 어느 곳도 무시하지 못하는 강력한 국가가 됩니다.]위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무인들은 한 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을 한데 다 모은다면 만만찮은 수가 된다. 어떤 국가도 단독으로 그 국가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아마 지금 저를 어떻게 잡아 죽일 건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겠죠.]“부정하지는 않지.”
[방향을 조금 바꿔볼 수 있잖습니까. 이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물론 저를 죽이고 나서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사과하며 공존을 모색하는 방법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저들의 우월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굴욕적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와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회주님과 제가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강진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저 논리가 궤변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청마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달랐을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청마의 저 말이 지금 강진호의 마음을 흔들고, 그의 생각을 뒤틀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진호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분위기가 미묘하다.
청마의 논리가 저들마저 뒤흔든 모양이었다. 완벽하게 동조하는 얼굴은 아니지만, 다들 마음이 흔들리는 걸 어찌할 수 없는 듯했다.
“이제 내가 대답하면 되나?”
[예.]“개소리 집어치워.”
[…….]강진호가 입술을 살짝 깨문다.
“네가 지껄이는 말은 제법 그럴싸하지만,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해. 무인 자치령에 사람을 모조리 끌어들인다고 치자. 그럼 그때부터는 어떻게 할 거지?”
[무슨 말씀이십니까?]“애초에 다수를 이끌기 어려워서 소수만을 끌고 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그럼 내가 말해주지. 무인이라는 족속은 혼자서는 제 밥벌이도 못하는 놈들이다. 씀씀이는 헤프고, 시간이 나면 돈은 안 벌고 수련이나 해 대고, 혼자서는 신형 스마트폰도 사러 가지 못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사회의 기생충이고, 생산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멍청이들이지.”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다들 일정 이상의 무인들을 이끄는 이들이다. 그래서 강진호가 한 말에 완벽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맞는 말이죠.”
“솔직히 부정하기 힘든 말입니다.”
특히나 총회의 이사들은 적극 공감했다. 아니, 제일 크게 공감하는 건 한쪽에서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차이커창일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골머리를 썩는 부분은 ‘총회를 어떻게 세상에 숨길까’가 아니라, ‘이 한 끼에 남들 열 배는 먹어 치우는 식충이들을 대체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까’야.”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천하의 청마조차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과거의 저도…….]“개소리하지 마. 과거의 너는 적당한 문파를 멸문시키고 그들이 모아놓은 재산을 빼앗기만 하면 됐지. 그건 생산이라고 하지 않아. 약탈이라고 하지.”
대답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쩔 셈이지? 네가 말한 그 강력한 국가를 이끌고 약탈이라도 할 텐가?”
[그건…….]“아니면 그 무인의 국가에 평범한 이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리기라도 할 텐가?”
옅은 비웃음을 흘린 강진호가 입에 문 필터를 잘근 씹고는 말했다.
“하나 잊은 모양인데, 우리는 무인이기 이전에 사람이야. 무인으로서의 권리를 논하기 전에 사람으로서 살아갈 방법부터 마련해야지. 네가 짓는 성은 모래 위에 지어진 성에 불과해.”
[교주님…….]“너는 예전부터 그랬어. 사람을 보지 않아. 무인을 위한다지만, 네가 위하는 무인이라는 건 개념에 불과해.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정말 뭘 원하는지는 네 머릿속에 없지.”
강진호가 담배를 깊게 빨았다.
연기가 폐 속을 헤집는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좀 더 명확하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네 논리는 공허한 거야. 잘난 네가 멋대로 이끌고 부속품에 불과한 이들이 그 뒤를 따르지. 그 더없이 간결하고 옳아 보이는 결론을 피하기 위해 사람은 여기까지 왔다.”
이현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조차 강진호가 저리 논리정연하게 흑왕의 말을 받아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때때로 핵심을 짚는 게 강진호지만, 이번 강진호의 말은 흑왕의 논리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있었다.
[듣다 보니 조금 재미있습니다.]“뭐가 재밌지?”
[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게 바로 교주님 아니셨습니까?]“맞아.”
강진호가 순순히 인정했다.
“예전의 나는 그랬지. 지금의 너보다 더한 사람이었지. 나는 숨을 쉬었지만, 숨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강진호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또 한 번 배울 기회를 얻었으니까. 내가 저지른 멍청한 짓을 반성하고 돌이킬 기회를 잡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놓친 것이 뭔지, 내가 잘못한 건지를 알았다. 그게 살아간다는 거다. 하지만…….”
강진호의 두 눈이 가라앉는다.
“넌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
긴 침묵이 감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의 청마조차도 깊은 침묵으로 강진호의 말에 화답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너와는 다르게.”
[거절당할 확률이 8할은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가 이런 것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문이 좀 막히네요. 그 말이 별로 틀린 게 아니라는 것도…….]살짝 말끝을 흐린 청마의 목소리가 다시 쾌활해졌다.
[하지만 그건 그냥 부정적으로 생각했을 때의 일일 뿐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렇기에 제가 교주님을 원하는 거죠. 이 세상에 제가 틀린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걸 틀렸다 말하고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교주님 한 분뿐이거든요.]“미친놈이…….”
강진호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역시나 이렇다.
이놈은 검은 태양과도 같다.
해는 바뀌지 않는다. 십 년이 지나도 백 년이 지나도, 천 년, 만 년, 백만 년이 지나도 태양은 같은 자리에 머물 뿐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은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 나갈 수 있죠.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일을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실 겁니다.]“적어도 네 방식은 아니야.”
[그럼 그 방식을 바꿔보죠. 교주님이 오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 방식으로 하는 수밖에요.]결국 결론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제게 오십시오, 교주님. 그게 아니라면 물러나서 지켜보십시오. 이건 경고가 아니라 부탁입니다.]“부탁?”
[교주님이 말한 대로 제가 실패한다면, 그 뒷일을 수습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무인들에 대한 증오로 불탈 때, 구심점이 없다면 무너지겠죠. 홍왕이나 마스터 따위는 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알고 계시겠죠.]사람들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홍왕에게로 향했다.
무시를 당한 입장이지만, 홍왕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심지어 자신은 흑왕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손을 내젓기까지 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맞는 말이다. 나는 중원 하나를 감당하는 것도 벅차다. 내 그릇이 그 정도가 안 된다는 건 이미 뼈저리게 실감했다.”
“…….”
[주제 파악은 잘되어 있어 다행입니다.]청마가 낮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닐 겁니다. 함께하시거나 물러서거나. 적대하지 않는다는 결론만 내리시면 어느 쪽이든 교주님께는 피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나는 그렇겠지.”
강진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지옥에 처박힐 수도 있는 거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차피 이대로 가도 남은 것은 지옥뿐이니까요.]“…….”
[하나는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 모든 건 오로지 무인들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제가 좁은 시야와 오만함으로 시작한 일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 믿습니다.]“잘도 지껄이는군.”
[그러니 교주님, 부디 영민하신 결정을.]전화가 끊겼다.
동시에 강진호도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주…….”
테이블에 휴대폰을 내려놓은 강진호가 낮게 웃어버렸다.
“제멋대로군.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이 제멋대로인 이가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가 휘두르고 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달리 최강이자 최악의 적이 된 모습으로 강진호의 앞에 나타났다.
강진호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청마.’
어쩌면 정해진 결론.
하지만 결코 바라지 않던 결론을 향해.
운명의 강이 그를 휩쓸어 끌고 간다.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