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8
#197.
출연하다 (2)
장학선은 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컨테이너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한 대 빼 물었다.
어떻게든 이 속을 달랜 후에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지금 같은 기분으로 컨테이너 안에 들어갔다가는 더 이상 이 일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잡을 게 없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지푸라기를 잡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그냥 얌전히 물에 빠져 죽으라고 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
이윽고 장학선은 비장한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는 최연하를 보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녀는 여배우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저런 몰골이라는 것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전혀 쓰지 못할 만큼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았다는 뜻이다.
‘탈모 오는 것 아닌가.’
붉게 달아오른 최연하의 얼굴을 보니 건강이 걱정될 정도였다.
“……어떻습니까?”
물어보나마나지.
하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최연하의 옆에 들린 소형 카메라가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 무슨 귀신도 아니고…… 카메라를 안 보이게 해서 버튼을 누르는데, 어떻게 카메라만 켜지면 하던 대사를 못하는 거예요?”
“저는 똑같이 했습니다만?”
“똑같이요? 똑같이?”
“지, 진정하세요, 최연하 씨!”
아무리 열이 받아도 이미지는 생각해야지.
이성 잃은 최연하를 달래며 장학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작년 대종상 여우주연상 출신의 여배우가 네 시간 동안 대사 하나를 교정했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면, 이건 가망이 없는 수준이었다.
“안 됩니까?”
장학선의 물음에 최연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댔다.
“시, 실전에서는 다를지도 몰라요.”
네, 그렇죠.
대한민국의 지역 예선에서 탈락한 사람들 중 올림픽에 내보내면 금메달을 따 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이건 양궁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학선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빤히 끝을 알면서도 그 끝을 향해 기름을 지고 달려드는 기분이었다.
“……해보죠, 뭐.”
장학선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헤.어.지.자.”
“카아아앗!
“우.리. 헤.어.지.자.”
“카아아아아뚜!”
“우.리! 헤.어.지.자.”
“으아아앗! 캇캇캇캇!”
장학선은 목이 쉬어라 캇을 외쳐 댔다.
“아니, 이런 빌어먹을! 왜 그 대사 하나를!”
조연출이 장학선을 억지로 잡고 말렸다.
“피디님, 진정하십시오! 일반인입니다! 배우가 아니라구요!”
“아오! 아오오오오!”
장학선이 차마 욕은 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이거, 언제까지 할 겁니까?”
카메라 감독도 지친 얼굴로 피디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지금 새벽 두 십니다. 해 지고 여섯 시간째 한 테이크를 찍고 있다구요. 잘생긴 얼굴도 어느 정도 봐야지, 하루 종일 보고 있으니 이제는 눈 감아도 보입니다. 이러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것 같아요.”
“진정하시죠.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시구요.”
장학선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부터 진정하자.’
애초에 이건 강진호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다가 흥행에 이용하려 한 벌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장학선이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하자 조연출이 그를 잡고 매달렸다.
“피디님! 이성을 찾으세요. 이건 안 됩니다. 날 샐 때까지 찍어도 안 된다구요.”
“야, 인마! 여기까지 투자한 시간이 얼만데! 지금 접는다고 나아질 게 있을 거 같아? 조금만! 조금만 더 해보면 돼!”
“그게 도박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패턴이라구요!”
“성공하면 될 거 아냐!”
촬영장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가만히 돌아보고는 몸을 돌려 촬영장 구석으로 천천히 걸었다.
“어, 어디 가세요?”
“화장실요.”
“아…….”
장학선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고마운 거지.’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갑갑하고 짜증이 나는데, 본인은 오죽하겠는가. 한 번 신을 찍을 때마다 사람들이 한숨을 쉬고 좌절하는데, 부담이 적을 리가 없었다.
“예. 다녀오세요.”
강진호가 화장실 쪽으로 사라지자 장학선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미치겠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강진호가 소변을 보고 나오자 강은영이 그를 맞았다.
“자.”
강진호는 강은영이 내민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었다.
“……힘들지, 오빠?”
“응?”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힘들어?”
“응. 힘들지? 같은 대사만 몇 시간째 하고 있는데. 미안해. 내가 괜히 고집 부려서…….”
“왜 힘들지?”
“……응?”
강진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같은 대사만 하고 있는데, 힘들 게 뭐가 있나?”
“오빠, 지금 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지?”
“걱정?”
강은영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이 인간, 지금 진심이구나.
강진호의 핏줄인 강은영은 알 수 있었다.
강진호는 진짜 지금 전혀 힘들어 하지 않고 있었다.
“오빠, 신경 안 쓰여?”
“뭐가?”
“오빠가 계속 NG 내서 다른 사람들이 아직 다 잡혀 있잖아.”
강진호는 피식 웃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억지로 한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는 사람 잡고 억지로 시킨 쪽은 저쪽인데, 왜 내가 신경을 써야 하냐?”
진심이다.
이 인간, 진심이야.
강은영은 강진호의 얼굴을 보며 몸을 떨었다.
멘탈이 강철로 만들어져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그녀의 오라비는 정신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와! 정말 강건하신 멘탈을 지니고 계시네요, 오라버니.”
“별말씀을.”
“오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
강진호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심각해졌다.
“그렇게 이상하냐?”
“응.”
“나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병이네, 병.’
불치병의 일종이라는 카메라 울렁증이 분명했다.
‘아쉽네.’
강은영은 강진호가 연예계에 데뷔하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녀에게 어떤 도움이 되고 말고를 떠나서 그녀의 오빠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런 극도의 카메라 울렁증 환자는 결코 연예계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강은영은 아쉬움 반, 다행스러움 반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끼며 강진호와 함께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래도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오빠가 언제 최연하 선배님하고 연기를 해보겠어. 하루 동안 완전 전세 냈던데? 나는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어.”
“쯧.”
강진호는 혀를 찼다.
촬영장으로 돌아가니 모두가 긴장된 자세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새든 내일이 오든 장면이 완성될 때까지 촬영을 강행하겠다는 장학선 피디의 고집이 통한 것이다.
드라마 초반, 피디의 권력에 항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나름의 입지를 가진 후라면 입을 열 수 있겠지만, 지금은 드라마 1화 촬영 중이다. 거슬리는 순간 교체였다.
‘같이 방송 만들기 싫은 사람은 나가라’라는 말에 모두가 침묵하고 말았다.
‘그 배짱으로 배우를 바꾸라고!’
카메라 감독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강진호가 제자리에 들어서자 한숨이 더 크게 나왔다.
이어진 몇 번의 테이크에서도 강진호의 대사에 차도가 보이지 않자 카메라 감독과 피디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의자에 늘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아직 촬영하고 계셨습니까?”
촬영장 안으로 검은 슈트를 입은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뭐야?”
안 그래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쳐 있던 장학선은 못 보던 얼굴이 촬영장에 들어오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씨! 누가 촬영장에 일반인 들어오게 하라고 했어! 촬영장 관리 이따위로 할 거야? 이 지랄이니까 촬영이 개판 되는 거 아냐!”
조연출이 장학선 뒤에서 마구 삿대질을 하자, FD들이 우르르 뛰어가 사내를 밀어내려 했다.
“잠시만요.”
하지만 사내는 당당하게 태도로 밀어내려는 FD들을 정중히 막은 뒤, 강진호를 가리켰다.
“저분 매니접니다.”
“……응?”
장학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속사도 없고, 오늘 처음 연기하는 사람한테 무슨 매니저가 있다는 말인가.
“끌어내!”
“에헤이!”
조규민이 씨익 웃더니, 다시 명함을 내밀었다.
“코드 엔터테인먼트 이사 조규민입니다.”
“……코드?”
명함을 확인한 이들이 장학선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함이 맞다는 뜻이었다.
‘코드라고?’
코드라면 강은영의 소속사다. 아직 배우 쪽으로는 그 입지가 크지 않지만, 연예계를 통틀어 코드보다 큰 기획사는 딱히 떠오르지 않을 정도의 공룡 기획사였다. 그런 곳의 이사라면 아무리 장학선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규민이 주춤 물러난 사람들을 쓱 훑어보고는 강진호에게 물었다.
“대체 왜 지금까지 여기 계셨던 겁니까?”
상황을 모두 전해 들은 조규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얼마나 발연기를 하셨기에…….”
“…….”
“와, 나는 강진호 씨가 세상에 못하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약점이 있었네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사람이 그리 발연기를 해 대면 거짓말은 못하겠네요.”
정확하게 말하면 발연기라기보다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못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강진호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 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요. 별것도 아니구만.”
“별게 아냐?”
장학선이 이를 갈았다.
그 별거 아닌 것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막 한 소리를 하려는 찰나에 조규민이 장학선을 보며 말했다.
“촬영한 테입 좀 볼 수 있습니까?”
“……당연히 못 보여 드리죠.”
“그러지 마시고, 좀 보여주십시오. 제가 바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이 새끼, 사기꾼인가?
막 장학선이 발악을 하려는 찰나에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끄응.”
강진호가 저렇게 말한다면 또 상황이 달랐다.
‘그래, 잡자. 지푸라기.’
“이쪽으로 오세요.”
“아, 그전에…….”
조규민이 피디를 보며 말했다.
“강진호 씨가 해야 하는 대사를 좀 말해주십시오. 톤이랑 속도까지 완벽하게요.”
“…….”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장학선은 조규민이 시키는 대로 대사를 말해주었다. 조규민의 요청에 따라 몇 번이고 대사를 읊어주자 조규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촬영한 필름들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보았을까.
조규민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이거, 이걸로 가시죠!”
조규민이 가리킨 화면에는 ‘TAKE 152’라는 클래퍼보드가 떠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장난하나!”
장학선이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이걸로 가기는 뭘 이걸로 가요! 그 국어책 읽는 발성 못 들었어요? 안 그래도 사람 짜증나 죽겠는데, 누구 놀리나?”
하지만 조규민은 장학선의 화를 정면으로 받았음에도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제가 더 이해 못하겠네요. 분위기는 죽이지 않습니까. 우리 배우님 얼굴에서 아주 광이 나네요, 광이!”
“아, 진짜! 얼굴이야 그렇다 치고, 연기는 어쩔 거냐고! 소리는 안 들어?”
“참 답답하시네요.”
조규민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대사야 더빙으로 처리하면 되잖습니까. 성우 없어요?”
“……더, 더빙?”
그 순간, 오디오 감독이 혼자 중얼거린 목소리가 장학선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와, 씨.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저 사람…… 천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