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83
#1982.
정리하다 (2)
“마스터.”
그 목소리에는 진중한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울림이 마스터에게 닿지는 못한 모양이다. 마스터가 미묘한 미소를 담은 얼굴로 위긴스를 응시했다.
“예전에 말한 적이 있던가, 지혜란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고 말이야.”
“…….”
“이유는 간단하지. 모든 지식은 결국 사람의 주관으로 해석되어야 그 의미를 가지는 법이지. 하지만 사람의 주관이란 흔들리기 마련이지 않은가.”
“마스터…….”
“자네는 훌륭한 학생이었지, 위긴스. 때때로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 냉철함을 보일 때가 많았지. 하지만 결국 자네도 나이를 먹었군. 그 주관을 밀어내지 못하는 걸 보니.”
“…….”
위긴스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목에 밧줄이 걸린 채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묵묵히 마스터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결과는 나와 있잖은가. 자네도 이미 알고 있을 걸세. 둑이 무너지면 보수할 방법 같은 건 없네. 보수란 무너지기 전에 하는 걸세. 그렇지 않나?”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을 막고 있던 둑이 무너졌네. 이제는 흘러 들어오겠지.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정복자네. 자신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을 내버려 두지 못하는 존재란 의미지. 그렇기에 인간은 산소도 희박한 고산의 위를 밟아대고,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해로 탐사정을 보내네. 심지어 저 우주까지 나아가지.”
“…….”
“그런 이들이 무인들의 세계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 같은가? 잠시잠깐의 공존은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 인간의 탐욕은 미지의 세상을 용납하지 못해.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계기로든 결국 무인들의 세상은 무너질 걸세.”
정론이다.
너무 완벽해서 반박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 정론.
그 정론이 지금 위긴스를 거대한 산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어떤 방법도 없다는 말입니까?”
“이보게, 위긴스.”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눈에는 내가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건 큰 오해일세. 나 역시 이 세상의 질서를 수호하는 데 평생을 바쳐 온 이일세. 물론 돌이켜 보면 잘못된 일도 많고,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말일세.”
“마스터의 의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진정성은 제가 가장 잘 압니다.”
설사 그 방법과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고맙네.”
마스터가 낮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나 역시 안타깝네. 이 일은 내가 해온 모든 것들마저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 버렸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쏟아진 물을 담을 길이 없는 것을.”
“흑왕을 처리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사람들이 무인들의 존재를 잊겠는가?”
“…….”
“강대한 적의 직접적인 위협에 시달리는 자네는 흑왕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겠지만, 흑왕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흑왕의 존재 같은 건 티끌만도 못하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인이라는 존재를 알았다는 것. 그리고…….”
마스터가 목이 탄다는 듯 물로 입을 축이고 말을 이어갔다.
“그 사실을 무인들도 알아버렸다는 걸세.”
“…….”
불친절한 설명이지만, 위긴스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세상 사람들이 무인의 존재를 알아버렸다. 그리고 무인들도 이제 다른 이들이 무인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그동안 무인들을 제약하고 있던 리미트가 하나 풀려 버렸다는 의미다.
어쩌면 그 무엇보다 가장 강력했던 제약이.
“법이 생겨난 이유는…… 인간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닐세. 인간을 강제하기 위해서지. 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굴지 생각해 보게.”
“…….”
“지금의 무인계는 가장 강력한 법이 사라졌네. 무인은 평범한 인간에게 그 존재를 알려서는 안 된다. 평범한 이들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
“이어지겠군요.”
“그렇지.”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의식적으로 피해왔든, 아니면 보복과 처벌이 무서워 참아왔든, 평범한 이들에게 무력을 쓰거나 그들에게 이득을 취하는 걸 참아오던 이들이 이제 더는 참지 않으려 들 걸세.”
“하지만 총회는…….”
“언제부터 자네가 총회 사람이었는가. 이 작은 나라 밖에도 무인은 살고 있다는 걸 잊었는가?”
위긴스가 대답을 망설이자, 마스터가 혀를 찼다.
“의미 없는 이야기로군. 답을 정해놓고 하는 대화는 어떤 가치도 없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자네는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는 방향으로 틀어버릴 걸세. 그걸 주관이라 하지.”
“하지만 마스터.”
위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찾아오는 종말을 손 놓고 기다리기라도 하라는 겁니까? 발버둥을 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하실 셈입니까?”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네.”
마스터의 두 눈이 위긴스를 응시한다.
“하지만 거짓된 결과를 믿는 것과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다르지. 자네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현실은 똑바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위긴스가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처진 어깨와 떨리는 턱 끝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애잔함이 드는 마스터였다.
‘힘겹겠지.’
평범한 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일이다.
아니, 위긴스쯤 되는 이라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해결책을 내는 건 고사하고, 밀려오는 세파의 압력을 버텨내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이건 위긴스가 택한 일이다.
‘아이러니하군.’
원래라면 각국의 무인계들이 이 압력을 나눠 받아야 했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마스터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머리를 짜냈어야 할 것이고, 일본에서는 각 구미들이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중국에서는 창왕계와 홍왕계의 전쟁이 멈췄을 것이고, 미국 역시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 조련하던 특수부대들을 움직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 압력을 나눠 받을 이들이 없다.
역설적으로 총회가 그 모든 이들을 무너뜨리고 정리해 버리면서 무인계의 입장 자체를 총회가 대변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이트들의 손발이 잘리고 위긴스가 마스터의 자리에 올라 버린 원탁은 더 이상 거수기 이상의 입지를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총회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창왕계를 무너뜨리는 대가로 총회에 주도권을 넘겨준 홍왕계 역시 마찬가지다. 홍왕에게는 더 이상 강진호 없이 이만한 일을 단독으로 해결할 만한 패기가 없다.
일본은 무인이 씨가 말라 버렸고, 미국은 무인계 내에서의 자신들의 한계를 절감해 숨죽인다.
‘결국 총회밖에 없군.’
총회의 이사.
그 말이 가지는 의미가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얼마나 거대해졌는가.
원탁의 마스터라는 자리보다 총회의 이사라는 단어가 더 큰 힘을 가지게 된 세상이다. 그러니 위긴스가 받는 압력도 상상을 초월할 게 분명하다.
마스터가 그런 위긴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한때는 총애했고, 한때는 신뢰했다. 한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하지만 지금 위긴스의 이런 모습을 보니,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어진다. 남은 것은 그저…….
“위긴스.”
“……예, 마스터.”
“조언 하나 하지.”
마스터의 말에 위긴스가 진중한 눈으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해결하려 들지 말게.”
“…….”
“무책임한 소리 같겠지만, 자네가 발버둥 쳐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네. 이건 우리 같은 범인들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자네도 알지 않는가.”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세상이 뒤바뀌는 순간에 이전의 지식을 지혜라 믿고 살아오던 우리 같은 이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세상을 이끄는 건 왕이지, 책사가 아닐세.”
위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고 있다.
그는 왕이 될 수 없는 이다. 한때는 그런 꿈을 꾼 적도 있지만, 강진호나 흑왕 같은 이를 보며 알게 되었다.
그건 노력하고 연구한다고 이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온 삶이 달라야 한다.
“자네가 해야 할 일은 회주님의 부담을 덜어주는 걸세.”
“……그저 맡기라는 말입니까?”
“그건 적당한 표현이 아니군. 믿는 거지.”
“믿는다라…….”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네. 그런 건 꿈속에서나 얻을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이들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의 빛을 찾아내는 법이지.”
마스터가 빙긋 웃는다.
“자네 역시 그 빛에 이끌려 회주님을 선택한 게 아니던가?”
“…….”
“그게 거짓된 빛일 수도 있지. 오히려 더 깊은 절망으로 떨어지는 함정일 수도 있을 걸세.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까지 각오했던 것 아닌가? 아니면? 이제 와 그때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후회할 텐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위긴스가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로드께서 이 세상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다면 저는 그 불지옥 속에서 웃을 겁니다.”
“많이 바뀌었군, 많이…….”
과거의 위긴스의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위긴스의 눈에는 그때 없던 열의가 존재했다.
그가 바꾸지 못한 위긴스를 강진호는 바꿔놓은 것이다.
“그럼 흔들리지 말게나.”
“…….”
“그분이 내놓을 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들만은 믿고 따라줘야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위긴스가 피식 웃어버렸다.
“제일 쉬워 보이면서도 제일 어려운 걸 시키시는군요.”
“세상일이란 결국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알겠습니다.”
위긴스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재밌군요.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머리가 맑아진 느낌입니다.”
마스터가 낮게 웃었다.
“그래서 때때로 수다가 필요한 법이지. 수다 떨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게.”
“……마스터.”
“또 빤한 이야기를 할 셈인가?”
위긴스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스터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건 원칙이지. 필요에 의해 깨지는 것은 원칙이 아닐세.”
“…….”
“나는 여기가 좋아. 내가 밖에 있었으면 지금 자네보다 더 속을 끓였을 것 아닌가. 위장에 구멍이 뚫렸을지도 모르겠군.”
위긴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발 떨어져 있어서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일세. 내가 여기에 있는 게 자네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위긴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커피 머신이라도 하나 놔드리죠.”
“……그렇게까지?”
“괜찮을 겁니다. 세상 마지막 호사일지도 모르니까요.”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군. 감사히 받지.”
자문료치고는 너무도 쌌지만, 마스터는 만족한 듯 웃었다.
“그런데 마스터.”
“뭔가?”
“마스터께서는 지금 로드께서 대책을 생각하기 위해서 고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넨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예?”
마스터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위긴스는 보좌해 본 적은 있지만, 이끌어본 적은 없다. 그렇기에 알 수 없으리라.
“결론은 이미 나와 있을 걸세.”
“…….”
“지금은 그저 정리를 하는 거겠지.”
“뭘…….”
위긴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면서 이해해 버렸다. 그 정리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그분의 힘이 되어드리게나.”
“……알겠습니다.”
마스터의 시선이 위긴스 너머의 허공으로 향했다.
‘외롭겠지.’
그건…….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한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