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91
#1990.
마주하다 (5)
와그작, 와그작.
“…….”
와그작, 와그작.
“…….”
세상에는 분명 그런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존재한다.
‘얼굴값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던가.’
그 완벽한 예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 늘어난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진호가 벽에 기대앉아 과자를 흡입하고 있었다.
저 풀린 눈과 멍하게 벌어진 입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조미혜의 볼이 미미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저기, 오빠.”
“……응?”
“……아니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니, 뭐…….”
조미혜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물론 그럴 때가 좀 자주, 너무 자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든다.
하지만 저걸 탓하기에는 올 때를 대비해서 강진호 전용 트레이닝복을 보육원에 보관하고 있는 그들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해한다.
설사 저 과자가 애들이 먹으려고 사둔 건데, 저 아귀 같은 놈이 벌써 네 봉째를 뜯어 먹고 있다고 해도…….
“이 쿠션 줄까? 등에 받칠래?”
“괜찮아.”
“…….”
그리고…….
강진호가 심신이 지칠 때마다 여길 찾는다는 건 알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 편할 때는 안 찾다가 지칠 때만 찾아오는 나쁜 놈이기도 하지만, 조미혜는 그게 싫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안식처를 찾는 법이니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만 모여 있는 이곳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강진호가 이곳에 있는 이들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말해주지 않는가.
그러니 기분 나쁠 이유는 없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동태눈인데…….’
아무리 봐도 맛이 갔다.
평소 강진호는 늘어졌지, 맛탱이가 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 강진호는 늘어진 백수라기보다는 나사 풀린 빙구 같다.
“많이 힘들어?”
“……뭐가?”
강진호의 고개가 꺼걱거리며 돌아오는 걸 본 조미혜가 머리를 내저었다.
‘내버려 두자.’
사람이란 누구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함을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조미혜도 어릴 적에는 언니 오빠들의 눈을 피해서 장롱 안으로 숨어들어 훌쩍일 때가 있지 않았는가.
그래도 이 사람은 어른은 어른인 모양이다. 이 정도로 끝나는 걸 보니.
“언니! 언니!”
그때, 작은 원생 하나가 조미혜를 향해 달려왔다.
“왜?”
“정수기에 물이 안 나와.”
“뭐…….”
“뭐라고? 그럼 사야지!”
강진호의 썩어가던 눈에 순간 생기가 돌아온다.
“잠깐 있어봐! 정수기 파는 데가…… 그냥 이 실장한테 사 오라고…….”
“오빠!”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려 하는 강진호에게 조미혜가 고함을 빽! 질렀다.
“멀쩡한 정수기를 왜 사! 그냥 고쳐 쓰면 되지!”
“아냐. 정수기 낡았잖아. 이 기회에…….”
“뭘 낡아! 아직 멀쩡한데!”
조미혜가 버럭대자 찔끔한 강진호가 목을 움츠린다. 하지만 그러고도 포기를 못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기 식탁이 낡았는데…….”
“완전 멀쩡하거든?”
“형광등이 좀 어두침침한 것 같지 않아? LED로 교체를 하는 게…….”
“저거 LED야! 노안 왔어?”
“TV가 작다! 저건 너무 작아!”
“왜? 극장 만드시게? 요새 애들 TV도 잘 안 봐!”
“그럼 태블릿! 애들이 TV 안 보고 동영상 사이트 보면 태블릿이…….”
“언니가 예전에 다 사서 돌렸네요. 완전 신형이네요.”
“…….”
강진호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럼…… 그럼 뭘 해야 하지?”
술 없는 알콜중독자라도 된 것처럼, 핏발이 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강진호가 이내 찾았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이사! 건물이 낡았으니 새로 짓고 이사를…….”
퍼억!
털썩.
조미혜가 던진 쿠션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강진호가 모로 엎어졌다.
“정신 좀 차려, 이 양반아! 여기 옮긴 지 몇 년이나 됐다고!”
“……한 십 년쯤?”
“이 년도 안 됐어!”
“…….”
강진호가 시무룩한 얼굴로 일어난다.
“그럼 뭐 다른 거 필요한 거 없어?”
“없어.”
“없을 리가 있나……. 분명히…….”
강진호가 말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부모 없이 보육원에만 지내는 애들에게 부족한 게 없을 리 없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해도 조미혜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뭐? 부족한 게 있을 거라고?”
“아니, 그냥…….”
“있어도 냅 둬.”
“응?”
조미혜가 고개를 내저었다.
“과한 것도 좋은 게 아냐.”
“…….”
“오빠, 내가 재미있는 것 하나 말해줄까?”
“뭐?”
“애들이 예전 집에 있을 때는 불평불만이 엄청 많았다? 낡은 데서 사니까 불편한 게 있잖아.”
“애들이?”
강진호가 뜻밖이라는 듯 조미혜를 바라보았다.
그가 애들을 잡고 물었을 때는 아무도 그에게 불편한 게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들 너무 좋다고 했을 뿐.
“오빠한테는 말 못해.”
“……바깥사람이라서?”
“아니. 오빠는 말만 하면 뭐든 과하게 해결하려고 하잖아. 애들도 아는 거지.”
“…….”
“하여튼 재밌는 건, 그러다가 이 건물로 옮기고 나서부터는 다들 너무 좋다고, 여기 너무 편하고 재밌다고 좋아 죽는 거야. 그런데 육 개월쯤 지나고는 어떻게 된 줄 알아?”
“……어떻게 됐는데?”
조미혜의 입가에 뭔가 사악해 보이는 미소가 피어났다.
“전이랑 똑같아.”
“……응?”
“전이랑 똑같이 불만이 생겨. 여긴 전보다 뭐가 불편하다. 여긴 전이랑 다르게 학교 가기가 멀다. 학교에 다른 애들은 뭐가 있는데 우리는 없다.”
강진호가 멍한 얼굴로 조미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부족한 게 덜 채워진 건가?”
“아니지. 오빠는 그래서 문제야. 부족한 건 채운다고 채워지는 게 아냐. 그건 영영 안 채워져.”
“…….”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부자들은 부족한 게 없을까?”
“……있겠지.”
이 말에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당장 강진호가 그러니까.
강진호가 가진 돈은 어마어마하고, 그가 가진 폭력이나 권력은 재력의 가치를 우습게 뛰어넘는다.
하지만 당장 강진호도 이렇게 허덕이고 있는데, 돈이 많다고 모든 게 풍족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가난한 이보다야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만, 삶이란 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부족함이 보이는 게 순리다.
“그 부족한 걸 채우면서 사는 게 사람이잖아. 차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돈을 벌고 모아서 차를 사고, 새 집을 사고 싶은 사람은 열심히 저축하고 융자해서 갚아 나가고.”
“그렇지.”
“보통은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부족할 걸 더 얻으려고.”
조미혜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긴 아니야.”
“…….”
“여기는 부족한 게 있으면 말만 하면 채워져.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예쁘게 입만 벌리고 있으면 오빠가 와서 턱하니 채워주고, 언니가 와서 입안에 쑤셔 넣지.”
“……어감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언니한테는 비밀이야.”
조미혜가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쉿,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나도 그게 너무 좋았지. 행복했고, 너무 고마웠고. 그런데 내가 애들을 혼내고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까…… 그게 정말 좋은 건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
“오빠.”
“응?”
“너무 애들한테 과하게 해주지 마.”
조미혜가 싱긋 웃는다.
“오빠가 평생 데리고 살 건 아니잖아. 얘들도 언젠가는 보육원 나가서 자기 힘으로 살아야지. 그런데 그때는 오빠가 없잖아.”
“나는…….”
“왜? 그때도 찾아오면 도와주겠다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강진호가 턱에 힘을 주었다.
“오빠가 생각해도 좀 그렇지?”
“…….”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강진호가 가진 재력과 능력이라면 보육원을 졸업하는 아이들을 평생 먹여 살리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건…….
‘애를 영원히 애로 두겠다는 거지.’
그는 총회의 회원들에게 언제나 더 발전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리고 스스로 더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못하는 이들은 과감하게 밀어내고 차별했다.
그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인은 그래야 더 강해진다고.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보육원의 아이들은 언제까지 그가 품고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무인들과 같은 기준을 이들에게 적용했다면 과연 강진호의 고개가 끄덕여질 일이 있었을까?
“결국은 누구나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해. 그런데 오빠, 나는 우리 애들이 입을 벌리고 있으면 누가 도와준다는 것에 익숙해질까 봐 겁나.”
“…….”
“그러니까 그러지 마. 오빠 할 만큼 했잖아. 지금도 얘들 충분히 누리고 살아. 부모 있는 집보다 더 누리고 살잖아.”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게…….”
“사람은 누구나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
“…….”
“그걸 채우기 위해서 다른 걸 과하게 채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건 결국 자기가 해결하거나 극복해야지. 왜? 나도 부모 없이 자라서 평생 가슴에 구멍 뚫려 있을 것 같아?”
“그런 말은 아니었어.”
“알아. 오빠 그런 생각 하는 사람 아니니까.”
조미혜가 빙긋 웃는다.
“여하튼 오빠.”
“응?”
“애들, 오빠 생각보다 강해.”
“…….”
“부모 없이 산다는 건 그런 거야. 별것 아닌 거에도 주눅 들고, 괜히 남하고 계속 비교되는 것 같고,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해도 별것 아닌 거에 상처받고.”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첫 번째 삶에 장애인이 되었을 때, 저 기분을 똑똑히 느꼈다.
“그런데도 애들 다 안 삐뚤어지고 잘 버티잖아. 오빠 생각보다 우리 애들 다 강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싸돌고, 애들 좀 믿어줘.”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찌 보자면 지금까지 강진호가 해온 것들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해가 되었다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미혜의 의도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건 강진호도 알고 있다.
“믿어줘야 한다라…….”
“응.”
강진호가 웃고 말았다.
‘같은 소리구나.’
그가 총회의 회원들 앞에서 한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말이다. 그가 회원들을 믿고 무인계의 미래를 맡기려 한 것처럼, 이 아이들도 믿어주고 그들의 미래를 제 손에 맡겨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손을 떼야 할 때가 왔다는 거겠지.’
한때는 모두가 강진호의 등만 바라보던 이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제 발로 서려고 하고 있다. 더는 강진호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지 않아도, 늦지 않도록 끌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려 한다.
그건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하지만…….
‘조금 서글프네.’
세상에서 강진호가 해야 할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마치…….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이 다 끝났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
“오빠는 그냥 거기 있어주기만 하면 돼.”
“응?”
조미혜가 빙긋 웃었다.
“사람은 부모한테서 독립하고 싶어 하지만, 부모가 없기를 바라지는 않잖아. 마찬가지야. 애들도 오빠한테서 홀로 서야 하지만, 오빠가 없는 걸 바라는 건 아냐.”
“…….”
“그냥 지금처럼 거기서 그렇게 과자나 먹고 있으면 됩니다, 강진호 이사장님.”
조미혜가 입가에 손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대신에 부스러기 작작 흘리고, 트레이닝복도 좀 예쁜 걸로, 새걸로 좀 입고. 응?”
“하, 하하…….”
웃어버린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가 오빠 자리야. 그러니까 그냥 거기에 있기만 하면 돼.”
아직 있구나.
내가 있어야 할 곳이.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닌 저 말에 괜스레 눈이 아파온다.
“그럼 과자 한 봉 더 먹어도 돼?”
“나가.”
“…….”
아무래도…….
여긴 아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