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92
#1991.
결심하다 (1)
홀로서기란 중요한 것이다.
강진호도 결국 조미혜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나치게 보육원에 관여하는 건 원생들에게 해가 된다.
그러니 이제는 평범한…… 아니, 평범보다는 조금만 과한 이사장 정도로 남아야 한다.
분명…….
그래, 분명 그래야 했는데…….
“뭐? 대학 가면 보육원에서 지원이 안 나온다고?”
“…….”
“아니! 그럼 난 뭐 먹고 살아?”
“…….”
강진호가 흐린 눈으로 한진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참 이상하거나 괴이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 생명체는 그런 이들과는 다른 의미로 좀 괴이하다.
‘때때로는…….’
그래. 뭔가 어른스럽고 듬직하다. 강진호가 보육원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조미혜라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한진성이다.
그런데…….
‘왜 때때로만 듬직한 거지?’
평소에는 왜 이리 등신 같냐고! 왜!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조미혜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미혜도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대하는 듯한 눈으로 한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조미혜가 말문이 막힌다는 듯 가슴 어림을 부여잡았다.
“이게 언제부터 나온 이야긴데 이제 와…….”
“아니, 형이 졸업자 기숙사 만들어서 살게 해주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사람이 잠만 자고 사나? 밥만 먹고 살아? 내 용돈은? 나도 대학생 되면 이거저거 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
“형! 아니지? 용돈 줄 거지! 진호…… 아아악!”
조미혜의 발이 한진성의 이마에 틀어박혔다.
“죽어! 제발 좀 죽어줘!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굳이 왜 살아서 산소 낭비하냐고! 안 그래도 산소 부족한데!”
“사, 산소가 왜 부족…….”
“니가 마실 건 없어!”
조미혜에게 걷어차인 한진성이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좋은 방어다.’
무학에 재능이 있을지도?
아니, 너무 맞아서 그런가?
강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한진성의 말이 그리 틀린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만 18세가 되어 보육원을 졸업한 이들은 국가로부터 500만 원의 지원금을 받고 보육원에서 나가야 한다.
500만 원.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지만, 한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그렇기에 보육원을 졸업한 이들이 쉽사리 범죄의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나마 바로 취직을 한 이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 삶을 유지할 수 있지만, 취직을 못하거나 한진성처럼 대학에 진학하는 이들은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기 마련이다.
그나마 이곳이 성심 보육원이라 강진호의 지원하에 재수를 해볼 수 있던 거지, 다른 보육원 출신 같았으면 현실적으로 재수라는 선택지를 고려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 아니, 돈이 없잖아!”
“돈이 없으면 벌어!”
“내, 내가 돈을 무슨 수로 벌어!”
“과외하면 되지!”
그 말을 들은 한진성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빙긋 웃었다.
“미혜야.”
“……또 무슨 말 하려고?”
“네가 나를 과대평가하는 모양인데, 내가 부모라도 나한테 제 자식 과외는 안 시켜. 서울에 넘쳐 나는 게 대학생인데, 왜 나 같은 놈한테 시키겠어? 안 그래?”
“…….”
뭐라 반박할 수 없는 정론에 조미혜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그냥 용돈이나 받아 쓰는 게 현실적이라 이거지. 내가 용돈 받아봐야 진호 형 통장에 쌓이는 돈 이자의 이자의 이자도 안 될 텐데 뭐가 문제…….”
뻑!
강진호가 움찔했다.
‘무학의 재능은 저쪽에 있었나?’
제대로 날린 정권이 한진성의 이마에 틀어박혔다. 한진성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모로 쓰러졌다.
털썩.
‘죽었나?’
아니, 들썩대는 것을 보면 살아 있는 것도 같고…….
“과외를 못하면 편의점에서 일하면 되지! 아니면 배달이나 뛰든가!”
“그,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어디 계속 말해봐, 어디.”
“……아닙니다.”
순식간에 제압된 한진성의 난을 감상한 강진호가 근본적인 의문을 입 밖으로 냈다.
“그런데 진성아.”
“응?”
“합격은 했냐?”
한진성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 정도야 기본 아니겠어? 실력이지, 실력.”
“으…… 꼴보기 싫어.”
조미혜가 꼴사나워하면서도 딱히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성적은 잘 받은 모양이다.
“인 서울! 어? 무려 인 서울!”
“…….”
“서우우우울!”
“그, 그만해.”
알았다고…….
한진성의 어깨가 과도하게 올라간다. 어깨를 얼마나 올렸는지, 목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좋을까…….”
“당연히 좋지!”
“남들은 한 번에 가는 대학.”
“…….”
한진성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진호가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홀로서기라…….’
미혜야.
그거 조금 일렀던 것 아닐까?
“그런데 너, 어디 다녀온 거야? 수능 끝났는데.”
“어디 가긴. 알바 다녀왔지.”
“응? 알바?”
조금 전에는 용돈 달라고 하더니?
강진호의 표정을 본 한진성이 피식 웃었다.
“우리 형은 이상한 데서 순진하단 말이야. 당연히 농담이지. 내 나이가 몇인데 용돈을 받아 써.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보육원에 재워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 집세는 아끼잖아.”
그 말이 참 기특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한진성의 말대로 이 나이 대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부모의 지원을 받기 마련이다.
한진성이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해결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이 강진호를 조금 안타깝게 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강진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애들이 우르르 뛰쳐 들어왔다.
“형! 과자 사 왔어?”
“오는 길에 사 오라고 톡했잖아!”
“아니! 이놈들아! 내가 알바비 얼마 번다고 나한테 과자를 사 달라고 해?! 앞에 진호 형 있잖아! 이사장님!”
“에이, 진호 형은 만날 사 주잖아.”
“형이 사 줘야 의미가 있지.”
“맞아. 피와 땀과 눈물이 어린 과자.”
“……마귀 같은 것들.”
아이들이 한진성을 둘러싸고 매달린다.
“과자 내놓으라고!”
“아! 꺼져!”
“뒤져 봐! 가방 뒤져 봐! 분명 있을 텐데!”
“으아아! 이 새끼들아!”
강진호가 그 광경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지는구나.’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이건 강진호가 많이 봤던 광경이다.
예전에 성심에서는 흔한 광경이었다. 아이들의 밥을 준비하는 박유민과 그런 박유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
그 모습이 강진호가 기억하는 성심 보육원의 원형이었다.
이제는 박유민도 제 삶을 찾아 떠나 성심을 잘 찾지 못하지만, 건물이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고, 세월이 변해도 이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강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과거, 박유민이 맡은 역할을 한진성이 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진성도 자신의 삶을 찾아 보육원을 떠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지금 한진성에게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다시 한진성이 하는 역할을 대신할 것이다.
‘그거면 됐지.’
원장 수녀님이 이 모습을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오늘따라…….
그 얼굴이 그립다.
옅은 미소를 띠고 인자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던 그분의 모습이 말이다.
‘그저 바라보셨겠지.’
수녀님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제 발로 걸어야 한다는 것을.
조금 더 지켜주고 싶고, 조금 더 안아주고 싶어도 한 발 물러서서 지켜봐 주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다는 걸.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가 한 게 아니구나.’
그가 없다고 해서 성심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저 아이들은 강진호가 없었어도 지금처럼 화내고, 웃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서로를 보듬으며 그렇게 살아갔을 것이다.
조금 더 불편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이 아이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굳이 내가 있어야 한다는 건 오만이었군.’
조금은 섭섭하다.
하지만 그게 꼭 싫지는 않다.
“형.”
“응?”
“오늘 자고 가?”
한진성이 심드렁하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 속에 강진호가 자고 갔으면 좋겠다는 뜻이 너무 노골적으로 박혀 있었다.
“……그럴까?”
“자고 간 지는 좀 됐지.”
“오빠가 뭔 상관이야? 오빠는 자기 방에서 자야 되잖아.”
“거, 놀다 보면 남의 집 거실에서 잘 수도 있는 거지! 어때, 형? 오랜만에 맥주 한잔?”
“……나 너랑 맥주 마신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에이, 뭐야. 김빠지게.”
“그럼 맥주 한잔할까?”
“아, 나 술 못 먹어.”
“…….”
대체 뭘까, 이놈은?
어쩌다가 아름다운 성심 보육원에서 이런 괴상한 놈이 생성(?) 되었단 말인가.
“……그럼 콜라나 한잔하자.”
“콜라 좋지!”
“과자다!”
“여기다가 숨겨놨네. 하여튼 저 형 수작 참 빤해.”
“내, 내 안주야, 이것들아!”
“콜라에 뭔 안주! 그냥 마셔! 이건 우리가 접수할게.”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강진호가 그 광경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가 있든 없든…….
여긴 성심보육원이다.
그래.
그걸로 됐다.
* * *
취이익.
콜라 캔을 따는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간다.
찰칵.
입에 담배를 문 강진호가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그가 앉은 그네가 천천히 흔들린다.
‘콜라라…….’
중원에 있을 당시, 그가 가장 그리워했던 현대의 문물이 바로 콜라와 담배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도 가장 먼저 콜라부터 찾지 않았던가.
어느 순간부터 너무 쉽게 사 먹을 수 있게 되다 보니 한동안 콜라를 전혀 마시지 않았다.
‘한때는 그토록 간절했는데…….’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한때는 변하는 게 두려웠고, 달라지는 것이 겁이 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변한다는 건 나아가는 거니까.
총회의 회원들도 그렇고, 보육원의 아이들도 그렇고.
저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을 지고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다.
그러니…….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이제는 내 할 일을 해야지.”
새하얀 담배 연기가 차가운 밤공기를 타고 천천히 옅어져 간다.
두려웠다.
정리할 시간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이제 그가 극복해야 할 상황은 지금까지 그가 겪어온 그 어떤 전투와도 다르다.
그 결말이 어찌 될지는 강진호조차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배를 염두에 둔 적이 없던 강진호이지만, 이번만은 그의 모든 것을 걸고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겁이 났다.
그가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을 놓게 될까 봐.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두가 제 나름의 두려움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회원들에게 세상과 맞서라고 말하면서 그가 두려워 나아가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후우.”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은 강진호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지켜야지.”
그가 그리워했던 세상을.
그리고 저들이 살아갈 세상을.
그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가 숨 쉬는 이 세상을.
담배를 비벼 끈 강진호가 그네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손에 든 콜라를 단숨에 마셔 버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놀이터 밖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