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02
#2001.
포고하다 (1)
“뭐냐?”
“뭐가?”
“뭘 자꾸 노려보냐는 말이다.”
“내가?”
“그래. 뽑아드릴까?”
“딱히 노려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그때까지 네 머리가 목에 붙어 있다면 말이야.”
“이 새끼가?”
신창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좀 닥쳐, 이 빌어먹을 놈들아!”
“…….”
“…….”
신창이 이를 드러내고서야 다른 이들이 입을 닫는다.
그들 사이의 서열을 정하는 데 실력은 딱히 의미가 없다. 모두가 나름의 경지에 오른 이들, 더 강한 이가 있다고 해도 그날, 그날의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일발 역전을 만들어낼 만한 능력은 다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창의 목소리가 힘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십이비도 중 가장 창왕의 총애를 받는 이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들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빌어먹을.”
“쳇.”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두 사람을 보며 신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도 아니지.’
그 역시 지금 더없이 날카롭다.
흑왕이 선언한 날부터 남은 시간은 불과 이틀. 이제 이틀 뒤면 그들이 평생 준비해 온 일의 결과가 나온다.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워야 할 건지, 그게 아니면 무인들이 거할 수 있는 안주의 땅을 얻어낼 건지.
고작 몇 년 준비한, 다시 응시가 가능한 시험을 치러 가는 수험생도 칼날처럼 날카로운 법인데, 평생 동안 준비해 온 숙원,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 숙원의 결과를 직면하게 될 이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
신창의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돌아간다.
그의 눈에 상황실 의자를 두 개 붙여 드러누워 있는 흑왕의 모습이 들어온다.
‘……정말 주무시는 건가?’
신경이 고래 힘줄로 되어 있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 잠이 오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겪는 이 위장이 뒤틀리는 긴장이 흑왕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침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백연홍, 그리고 공령이었다.
공령이야 원래 성정이 차분한 편이니 그렇다 치고, 저 백연홍이 이런 상황에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꽤 신기한 일이다. 원래라면 가장 먼저 시비를 걸고 싸워 댔을 이건만.
흑왕의 한쪽 곁에서 그를 호위하듯 서 있는 백연홍의 모습에서 이전과는 다른 단단한 결의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한 팔이 없음에도 말이다.
‘모를 일이군.’
그 역시 흑왕이라는 존재에 홀려 여기까지 온 이. 흑왕이 얼마나 사람을 빨아당기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본인이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자신의 한 팔을 앗아간 이에게 전보다 더한 충성을 바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세 살짜리 어린애도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틀이라…….”
공령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백연홍.”
공령의 목소리에 백연홍이 시선을 돌려 공령을 바라보았다.
“뭐냐?”
“어떻게 생각하나?”
“뭐가?”
“바깥세상 놈들이 어떻게 나올 것이라고 보느냔 소리다.”
신창의 눈이 살짝 커졌다.
기본적으로 공령과 백연홍은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다. 십이비도 중 서로 사이가 좋은 이를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그중 서로 사이가 가장 나쁜 이를 고르는 건 너무도 쉽다. 바로 저 둘이다.
그런데 백연홍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공령이 먼저 백연홍에게 말을 걸고 있다.
“내 알 바 아니지.”
백연홍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덤비면 죽이고, 물러나면 살려준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야.”
“단순해서 좋군.”
“어차피 내가 머리를 굴려봐야 의미도 없지. 머리는 따로 있으니까.”
그 말에 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까드드득.
팔짱을 낀 공령의 주먹이 꽉 쥐어지며 낮은 소음을 만들어낸다.
그도 그 빤한 사실을 몰라 묻는 게 아니다.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었을 뿐.
‘사람이 아니라니까.’
태연하게 잠들어 있는 흑왕을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다. 그들은 신경이 극한까지 날카로워진 덕분에 어젯밤 흑왕이 직접 수혈을 짚어 강제로 수면을 당했다.
그럼에도 털이 거꾸로 곤두서 있는 느낌인데,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자다니.
‘애초에 그릇이 다른 거겠지.’
어쩌면 이 모든 일조차 흑왕에게는 너무도 작은 통과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가 이 일을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은, 그가 이 일을 통해 만들어내려 하는 세상은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겠지. 어쩌면 이 두 눈으로 그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래도 큰 그릇은 아닌 모양이로군.’
이런 생각을 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불안함이 심해지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안으로 리우양이 들어온다. 그러고는 잠을 자고 있는 흑왕의 바로 앞까지 와서 작게 입을 열었다.
“보고입니다.”
“으음.”
흑왕이 눈을 뜨고는 리우양을 바라보았다.
“하암.”
흑왕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한다.
“잠을 설쳤어.”
“흑왕께서도 긴장되시는 모양입니다.”
“나도 사람인데, 그렇겠지.”
공령과 백연홍의 입에서 헛웃음을 흘러나왔다. 저게 긴장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면 대부분의 인간은 벌써 신경과민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옛 꿈을 꿔서 말이야.”
“아주 옛날 말입니까?”
“아주 옛날이라…….”
흑왕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시간과 그들의 시간은 다르다. 그건 이 세상의 시간으로는 얼마 되지 않은 전의 일이지만, 그의 시간으로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다.
“그래, 아주 옛날이지. 그때의 꿈을 꿨어. 이 일을 처음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던 그때 말이야.”
흑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공령이 일순 숨을 멈췄다.
그저 드러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는 간단한 동작임에도 순간 흑왕이 거대해 보인다.
“보고는 뭐지?”
“외부의 상황을 다시 파악했습니다. 현 시각, 추가적으로 움직이는 병력은 없습니다. 아직 공격이 없을 거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희가 생각한 가장 위험한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좋은 소식이로군. 새삼스럽게도 말이야.”
흑왕이 입가를 비틀었다.
그의 시선이 리우양 너머의 모두에게로 향했다.
“어때? 좋은 소식이지 않나?”
“그렇습니다, 흑왕.”
“저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흑왕이 키득대며 웃었다. 한참을 웃어 대던 흑왕이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의 나는…….”
흑왕이 입을 열자 모두가 흑왕을 바라보았다.
“힘은 없고 의욕만이 가득찬 애송이에 불과했지. 그때의 나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그는 세상을 뒤엎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아니, 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맞이한 결말은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힘이 없는 자가 원대한 꿈을 꾸게 된다면 대부분 그렇게 되듯 말이다.
“그리고 중원에서 다시 태어난 뒤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는 건 꼭 현대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과거를 바꾸면 미래도 바뀐다. 하지만…….”
흑왕이 씁쓸하게 턱을 긁어 댔다.
“결국 힘이 부족한 게 문제였지. 그 인간이 내 생각과 다르게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어. 적어도 상의 정도는 해줄 줄 알았는데. 하…… 친구라는 게 참.”
“……갑자기 뭔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한탄하는 거다, 한탄. 믿었는데…… 나쁜 놈 같으니.”
흑왕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가 강진호를 배반한 게 아니라, 강진호가 그를 배반한 것에 가깝다.
모든 것을 논의하고 대화해 줄 거라 믿은 강진호가 갑자기 정신 나간 짓을 저질러 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그건 강진호 나름의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그건 충분히 이해한다. 문제는 강진호의 방향과 그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가 되어 있었다는 것, 모두를 무인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중원을 평정하고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다른 무인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무인들의 힘만으로 국가를 전복해 버릴 수 있었는데.’
그랬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실패했다.
“내가 얻은 교훈은 간단했지. 정말 원하는 일이라면 다른 이의 힘을 빌릴 게 아니라 제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힘을 얻었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힘을,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힘을!”
“…….”
흑왕의 눈이 평소와 다른 열기를 담았다.
“나는 세상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
“우리가 과거를 겪고 이 세상으로 돌아온 이유 역시 존재하겠지. 우리는 누구보다 절망한 이들. 세상의 부조리를 이기지 못하고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은 이들. 그런 우리에게 과거를 겪게 하고 이 세상으로 돌려보낸 이가 있다면…… 그가 원하는 바가 ‘지금이 과거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니, 그냥 행복하게 살아라’였을까?”
흑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부조리한 것을 바꿀 힘을 얻어 이곳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그런 일들을 겪어야 했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는 거다.”
흑왕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단호하게 파고들었다.
“절망을 겪어 행복을 찾아야 했다면, 힘을 얻어 돌아올 이유가 없다. 설사 이게 우리에게 새로운 행복을 찾아주겠다는 신의 호의라 해도 나는 그걸 거부하겠다.”
흑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상을 바꾼다. 이 몸을 불태워서라도 나는 멈추지 않는다. 세상 누가 나를 막는다 해도 나는 이뤄낼 것이다.”
대답은 없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애초에 그런 홍왕의 의지에 자신의 목숨을 건 이들. 홍왕이 열어젖힐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이니까.
“기억해 주기를 원하지 마라.”
“…….”
“대가를 받으려 하지 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 하지 마라. 세상은 눈부신 곳에서 찬사를 받는 이들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손으로 바뀐다. 어차피 우리는 사회의 쓰레기에 불과하지. 그럼 쓰레기답게 죽어라.”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대신…….”
흑왕이 천천히 손을 펼쳐 들었다.
“내가 바꿔줄 테니까. 다른 이들의 미래를 말이다.”
고요한 정적이 지하실을 가득 채운다.
이틀.
그래, 이제 이틀이다.
한껏 날카로워졌던 감각이 가라앉고, 불안 대신 희망이 그들의 가슴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열어낼 것이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도 저 사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낼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 여기에 있으니까.
그리고…….
모두가 흑왕의 뜻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그 순간.
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테이블 위에 올려둔 흑왕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음?”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흑왕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